일요 절차탁마

절탁 서양 2학기 7주차 후기 및 8주차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1-07-07 19:19
조회
102
지난 시간에는 《스피노자의 동물우화》 7~9장을 읽고 세미나를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오전 시간을 활용하여 함께 영화 『소울』도 봤습니다. 『소울』은 현정샘이 스피노자 팀 동료 선생님으로부터 추천을 받으신 영화인데요, 영화 자체도 아주 재밌었지만 오랜만에 (혼자가 아니라) 여러 사람들과 영화를 보고 얘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진 것 자체도 좋았습니다.

『소울』의 메시지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삶에 미리 주어진 목적은 없다’가 아닐까 합니다. 재즈 뮤지션인 ‘조’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직전에 불의의 죽음을 맞이하고 생으로 돌아가고자 안간힘을 쓰다 우연히 아직 태어나지 않은 영혼들이 삶에 뛰어들 준비를 하는 ‘그레이트 비포’에 가게 됩니다. 거기서 조는 영혼들에게 ‘불꽃’을 주는 멘토 역할을 하게 되면서 삶에 흥미가 전혀 없는 조숙한 ‘22’와 만나게 됩니다.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조와 22는 인간은 목적을 향해가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을 살아갈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죠.

『소울』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재즈’처럼 우리는 매번의 우연한 결합들 속에서 유일무이한 순간들을 살아낼 뿐이라고. 우리로 하여금 생을 긍정하도록 하는 것은 고귀한 이상이나 원대한 목표의 성취가 아니라 매순간 생성소멸하는 아름다움을 포착해내는 능력이라고. 영화는 조의 몸에 들어간 22가 피자의 맛과 걸으며 맞는 바람의 느낌, 떨어지는 낙엽이 주는 감동을 체험하는 장면을 보여주며 생의 경이로움을 일깨우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물론 스피노자를 공부하고 있는 우리는 ‘감동’에서 멈출 수 없죠. 우리는 우리가 어떠한 경로로 목적론적 가상에 빠져들게 되는지, 어째서 매번의 마주침을 긍정하지 못하고 다양한 미신에 사로잡혀 슬픔의 정서를 재생산하게 되는지 질문해야 합니다. 그리고 스피노자를 따라 인식에 대해, 우리의 신체와 정서에 대해 질문함으로써 우리의 인간적인 관점을 부단히 ‘교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관념’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뒤집어볼 수 있었습니다. 세 가지 정도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우선 스피노자에게서 지성과 의지는 분리 불가능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스피노자에 따르며 관념은 도판 위의 말 없는 그림이 아닙니다. 관념은 운동합니다. 관념은 스스로를 긍정합니다. 따라서 여러 관념들을 표상하는 지성과 그것을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의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인식의 문제와 윤리의 문제, 앎과 행동은 분리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 우리가 형성하고 있는 관념들의 연합입니다.

그러니까 세계를 편협하게 감각하고 인식하는 사람은 그런 방식으로 자신의 힘을 발휘하고 자신의 행위를 구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과 다르게 살고 싶다면, 우리가 자명한 것으로 믿는 전제를 의심해야 하고 새롭게 질문을 구성해야(다시 말해 관념들의 질서를 변형해야) 합니다. 우리는 삶의 문제들을 해소할 수 있는 해답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을 이루고 있는 관념들의 운동이 늘 동일한 회로를 반복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조건 속에서도 똑같은 문제에 걸려 넘어지고 같은 패턴을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관념의 적합성이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관념이 일종의 역량이자 운동이라면, 관념이 사물들을 재현하는 도판 위의 그림이 아니라 그 자체로 실재성을 갖는 사유 속성의 양태라면, 우리는 관념의 참/거짓을 어떤 기준에 따라 논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해 아리엘 수아미는 ‘생산성’이라는 말을 합니다. 우리는 어떤 관념의 참됨을 그것이 외부 사물과 일치하는가를 놓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모든 외부 사물들과 관념을 통해 접촉할 수 있을 뿐입니다. 외부 대상에 대한 시각 정보도, 우리가 어떤 사물과 마주침으로써 형성하는 신체변용의 관념도 다 우리의 정신의 운동 속에서 생산된 양태들이지 ‘사물 그 자체’는 아닌 것입니다. 관념의 적합성은 (다른 무엇과의 비교 속에서가 아니라) 관념의 운동 안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날개달린 말에 대한 관념은 그 운동의 역량 자체가 매우 낮습니다. 그것은 말의 존재양태와 말의 몸 사이의 연관관계 및 새가 지니고 있는 비행에 적합하게 진화된 신체적 조건 같은 것들에 대한 이해와 연결될 여지가 없습니다. 부적합한 관념은 우리가 경험이나 관찰을 통해 형성하는 다른 관념들과 연결되어 또 다른 관념의 연합을 생산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삶에 대해 갖는 관념이 얼마나 적합한 것인지를 질문해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특정 종교의 교리를 절대화하는 사람이나 사회의 주류적 가치를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의 정신은 다른 관념들과의 접속을 통한 지성의 확장과 관념의 생산을 이루어내기가 극도로 어려울 것입니다. 그저 자신이 형성하고 있는 기존의 관념의 질서에 비추어 다른 견해들, 경험들, 느낌들을 배제하거나 심판하거나 무시할 뿐이겠죠. 자신의 앎으로 지적 위계를 만들어내는 지식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정신은 얼마나 생산적인가? 이건 제 고민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한 가지 요점이 남아 있습니다. 인간 정신이라는 관념의 대상은 인간 신체라는 것. 우리가 형성하는 관념은 언제나 신체변용의 관념입니다. 물론 이때 신체란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해하는 육체를 뜻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스피노자는 정신이란 없으며, 모든 것은 체내 세포의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표상일 뿐이라는 식의 속류 유물론을 따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스피노자는 특정한 운동과 정지의 비율을 지닌 채 끊임없이 외부와 접속하고 소통하며 다른 것들을 변용하고 또 다른 것들에 의해 변용되는 과정 자체로 존재하는, 신의 연장 속성의 한 양태로서의 인간 신체를 말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신체는 그것의 내적인 구조만으로 정의되는 게 아니라, 그 신체의 환경을 이루고 있는 신체들과 맺는 관계에 의해 정의될 것이다.”(아리엘 수아미, 《스피노자의 동물우화》, 열린책들, 62쪽)

이로부터 우리가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은, 관념의 적합성은 신체의 변용능력에 달려 있다는 점입니다. 아리엘 수아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성은 완전한 상태로 주어지는 게 아니다. 어떤 신비에 의해서 동물적인 신체에 접목되는 것이 아니다. 이성은 동물적인 신체와 함께 자기 자신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이성을 생산하려면, 인간 신체의 소질들로 우회해야만 한다. 이성을 준비하는 것은 경외감이 아니라 이러한 합치들을 정서적으로 번역한 것, 즉 기쁨이다.”(아리엘 수아미, 《스피노자의 동물우화》, 열린책들, 63쪽) 인간 정신이 다른 동물들의 정신보다 우월하다면, 그것은 인간 신체가 더욱 다양한 환경에 복잡한 방식으로 적응하고 또 그와 더불어 스스로를 변이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아직 이것이 우리에게 인식에 대해 어떤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주는지 명확히 이해하진 못했습니다(좀더 고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토론 시간에 현정샘이 해주신 말씀이 기억이 나네요. 수영하는 방법을 안다는 것은 실제로 수영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물과의 관계에서 스스로의 신체를 변용시킬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다음 시간에는 《스피노자의 동물우화》 10, 11, 12장을 읽어오시고 관련하여 공통과제를 써 오시면 됩니다. 오전 낭송은 《윤리학》 1부 부록에 돌입! 합니다~
전체 2

  • 2021-07-08 09:18
    정말 많은 얘기가 오갔었네요.. 소울은 정말 재밌었어요
    관념이 스스로를 긍정한다는 것, 역량을 크게 가질 수록 더 적합하고 많은 생산성을 갖는다는 말을 기억해두고 요리조리 생각을 키워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 2021-07-09 22:22
    건화샘의 정성어린 후기를 읽으니 함께 본 영화와 더불어 나누었던 말들이 더 진하게 다가오네요. 1부의 능선을 넘었으니 또 2부의 능선을 함께 넘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