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역 세미나

성역 세미나 3학기 3주차 후기

작성자
박경혜
작성일
2021-08-17 17:56
조회
88
성역3학기  3주차 후기

이번 주 성역 세미나는 3학기 시작하고 처음으로 오프라인으로 진행했습니다. 지루하고 답답하게 이어지는 코**시국이어서 그랬을까요? 만나서 얼굴을 보는 기쁨이 훨씬 더 컸습니다. 게다가 새로운 동학의 등장!! 방학인데 게을러질까봐 세미나를 한다는 소개말에 아휴~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몹시 반갑고 격하게 환영합니다.

이번 주에는 『세네카의 대화 :인생에 관하여』 첫 번째 시간이었습니다. 제1권부터 제6권까지인데 그 가운데 「분노에 관하여」가 무려 세 권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발제도 분노에 대한 부분이 많았구요. 논의된 주요 내용들은 화가 난다고 하는 것은 이미 앞선 경험으로 만들어진 쾌와 불쾌에 대한 기준이 있다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서 능동적이고 자유롭기 위해서는 분노에 예속되지 않도록 세심한 관찰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분노에는 이미 내가 옳다는 정념과 판단이 개입하고 있기에 정당한 분노라든가 거룩한 분노는 없다는 것 등이었습니다.
세네카는 책에서 단 한번도, 어떤 경우에도 -마치 도장깨기 하듯이- 분노는 필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분노에는 위대함도, 고귀함도 없' (83)다는 말로 그 당시에 (전쟁에서의 용기를 위해, 부모의 원수 앞에서, 부덕함을 보는 현자 등) 분노를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논리들을 모두 부정합니다. 잘 조절하여 사용할 수 있다면 어떤 정념은 무기와 같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도 세네카는 통제받기를 원하지 않는 분노는 악덕이라고 말합니다. '분노가 영혼의 위대함에 무엇인가 기여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분노는 위대함이 아니라 부종이기 때문입니다.' (81) 게다가 분노는 아주 쉽게 커다란 광기로 그리고 잔혹함과 잔인함으로 사람을 먹어치운다고 말합니다. 그러기에 일단 시작된 분노는 잡기가 어렵다는 것이죠. 분노는 개인 뿐만 아니라 집단을 움직이는 힘도 됩니다. 이렇게까지 '분노 무용론'을 세밀하고 철저하게 펼치는 세네카의 글을 두고 분노에 대해 진지한 사유를 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입니다.
분노는 어떤 덕도 없는 악덕인데 사실 우리는 일정 정도 분노를 정당화하며 우리를 분노에 내어주며 살고 있지 않는가? 분노라는 정념에 예속되어 있으면서도 자신이 옳다는 판단에 기대어 저항 혹은 정의라는 명분을 덧씌우고 있지 않은가? 분노하지 않으면 안되는 어떤 상황 앞에서 분노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 야박한 평가를 하고 있는 사회적 정서를 어떻게 볼 수 있을까? 분노를 생각하고 분출하는 데에는 어떤 특정한 이미지가 개입되었고 그에 따라 특정한 방식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분노에 예속하는 방식이라면 우리는 분노를 지금까지와는 다른 양식으로 다루는 방법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분노하지 않는 현자와 요즘 소위 '쿨하다'고 말하는 성품이나 상황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분노하지 말라는 것은 무심한 것과는 또 어떻게 다른걸까? 등등
현자는 분노하지 않고 이성을 사용합니다. 병자에게 치료가, 어린 아이에겐 훈육이 필요한 것이고 우리에게는 삶의 조건들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도 자신과 다른 이들의 관계를 세심하고 관찰하고 자신에게 분노가 일어나는 지점부터 세밀하게 겪어내는 동안 분노라는 정념에 예속되지 않으려는 의지를 작동시키며 자신의 능동성을 키워야 합니다.  분노 없는 질책, 분노 없는 훈육, 분노 없는 복수…… 이런 일련의 과정에는 반드시 훈련이 있어야 한다고 세네카는 말합니다.  '당신 스스로와 싸우십시오! 만약 당신이 분노를 이기고자 한다면, 분노가 당신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분노를 가두고, 분노에게 출구를 내주지 않는 것으로 당신은 벌써 승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138)
자기를 능동적으로 조형하는 데 유리한 방향으로 힘을 쓰는 것. 이것이 자유롭게 살기 위해 가장 중요한 자기 배려 훈련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섭리에 관하여」, 「현자의 향덕에 관하여」, 「마르키아 여사에게 보내는 위로」에서 논의되었던 문제들도 하나로 요약하자면, 삶이라는 힘 관계의 장에서 외부조건에 기대지 않고, 철학적 관점에서 능동적인 방식으로 관계 맺는 역량을 어떻게 키울 수 있느냐에 대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세네카가 분노에 대하여 세밀하게 관찰하고 분석하는 방식이나, 아들을 잃은 슬픔에 빠진 마르키아 여사에게 그저 괜찮다는 공감이 아닌 철학자로서 전혀 다른 관점으로 위로를 건네는 말들에서 배울 수 있는 지점들. 푸코가 우리에게 안내한 고대 철학자들이 그저 그런 좋은 말씀을 하는 이들로써가 아니라 자기 배려를 통해 이렇게 통치당하지 않는 예를 보여주려는 것이었음을 항상 간직하고 책을 읽는 것이 또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자기 배려를 위한 훈련이 아닐까 생각하며 후기를 마칩니다.
전체 1

  • 2021-08-18 10:25
    분노 도장 깨기! ㅋㅋㅋ 저는 '분노 없는 복수'가 흥미로웠습니다. 도대체 분노 없이, 그저 해야 할 일을 한다는 감각의 복수란 무엇인지!? 이 부분이 재밌었던 건, 세네카의 분노 비판이 관념적인 평화주의나 이타주의 같은 데에 기대고 있지 않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분노하지 않음'은 무력함의 표현이 아니라 강력한 자기지배의 표현이라는 것. 마지막에 상기시켜주신 푸코의 문제의식도 잘 간직하여 읽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