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역 세미나

성역 4학기 세 번째 시간(10.15)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1-10-13 12:34
조회
116
“혹시 여기에 높고 단단한 벽이 있고, 거기에 부딪혀서 깨지는 알이 있다면, 나는 늘 그 알의 편에 서겠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벽이 옳고 알이 그르더라도, 그래도 나는 알 편에 설 것입니다. 옳고 그름은 다른 누군가가 결정할 일입니다. 혹은 시간이나 역사가 결정할 일입니다. 혹시라도 소설가가 어떤 이유에서든 벽쪽에 서서 작품을 썼다면, 과연 그 작가에게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을까요?
자 그럼, 이 은유는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어떤 경우에는 단순명쾌합니다. 폭격기, 전차, 로켓탄, 백린탄, 기관총은 높고 단단한 벽입니다. 그것들에 짓눌리고 불타고 총상을 입는 비무장 시민은 알입니다. 그것이 이 은유의 한 가지 해석입니다.
그러나 단지 그것만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렇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각자 하나의 알이라고, 더 없이 소중한 하나의 영혼과 그것을 감싸는 깨지기 쉬운 껍질을 가진 알이라고. 나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저마다 높고 단단한 벽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 벽에는 이름이 있습니다. ‘시스템’입니다. 본래 그 시스템은 우리를 보호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그것이 저 혼자 작동하여 우리를 죽이고,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살해하게 만듭니다. 냉혹하고 효율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내가 소설을 쓰는 이유를 요약하자면 단 한가지입니다. 개인이 지닌 영혼의 존엄을 부각시키고 거기에 빛을 비추기 위함입니다. 우리 영혼이 시스템에 얽매여 멸시당하지 않도록 늘 빛을 비추고 경종을 울리자, 이것이 바로 이야기의 역할입니다. 나는 그렇게 믿습니다. 삶과 죽음의 이야기를 쓰고, 사랑의 이야기를 쓰고, 사람을 울리고 두려움에 떨게 하고 웃게 만들어 개개인의 영혼의 더할나위 없는 소중함을 명확히 밝혀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소설가의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날마다 진지하게 허구를 만들어나갑니다.” (무라키미 하루키, ‘벽과 알’)

채운샘이 강의 중 언급하신 무라카미 하루키의 ‘벽과 알’의 일부입니다. 알의 편에 서기 위해 소설을 쓴다는 하루키. 가끔은 이런 식의 즉자적인 비유가 오히려 더 큰 울림을 줄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물론 하루키의 비유는 단지 단순명료하기만 한 것은 아닌 듯합니다. 그가 말하는 벽은 무장하지 않은 사람들을 공격하는 전차나 폭격기일 수도 있지만 더욱 넓은 의미에서는 우리를 보호한다고 말하는 ‘시스템’이기도 합니다. 하루키가 글을 쓰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시스템은 우리의 영혼을 몇몇 숫자들로, 예측 가능한 흐름으로 요약하려는 습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말 잘 듣는 어린 양으로 길들이기 위해 다양한 수단을 동원합니다. 학교나 병원, 군대, 감옥 등의 장치들 속에서 우리의 신체와 정신을 직접적으로 훈육하기도 하고, 또 이러저러한 보상체계와 환상의 체제로 우리를 포획하기도 합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이 스스로의 두려움과 초조함, 중독과 자기학대, 집착과 갈망 속에서 순식간에 벽 쪽에 선 자가 되어버린다는 점입니다. 하루키는 소설을 씀으로써 우리 안의 벽과, 우리 자신의 자발적 복종과 싸우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요?

푸코도 마찬가지입니다. 푸코는 ‘금지’와 ‘억압’의 구도로는 우리의 자발적 복종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자신의 신자유주의 분석에서 가장 명확히 드러나는 것처럼, 우리는 자유와 능동성의 이름하에 스스로를 예속으로 이끌 수조차 있습니다. 권력은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합니다. 무엇을? 바로 시스템적인 주체를. 그러한 주체에게 모든 것은 결국 복종으로 환원됩니다. 그것이 특정한 이름을 가진 권력에 대한 복종이 아니더라도, 주어진 선택지에 반응하는 방식으로밖에는 자신의 삶을 구성해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는 예속적입니다. 이렇게 보면 문제의 초점이 조금 달라집니다. 우리는 우리를 존재하고 행위 하도록 하는 외부적 원인들과 관계 맺지 않고는 존재하지도 행위 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 자체가 예속을 구성하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시스템이 규정하는 바에 복종하는 방식으로밖에는 우리의 행위를 구성해내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외부적 조건 전체를 전복하고 개혁해야만 자유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신중한 해석의 기예와 실천의 발명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존재 방식에 변환을 가할 수 있으며, 그러한 변환 속에서 우리를 구성하는 시스템을 구부려낼 수 있습니다.

푸코는 고대 그리스, 로마를 연구하면서 자신의 남다른 존재방식을 구성하기 위한 기예의 발명이라는 문제를 연구했습니다. 그리스-로마인들은 몇 가지 축을 중심으로 아프로디지아의 경험을 구축했죠. 여기서 핵심은 스스로 자신의 몸의 규울을 만들어내는 것, 보편적 규범에의 복종이 아닌 자기 규율의 생산 속에서 주체성을 구성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인들에게는 이러한 작업을 위해서 철학이 필요했죠. 그들에게 철학이란 자기배려, 즉 자기 실존의 변형이라는 문제와 뗄 수 없이 결부되어 있었습니다. 자, 이제 푸코의 시선은 초기 기독교 시대로 향합니다. 이제 점점 윤리의 문제는 스스로의 실천을 변환함으로써 자신의 남다른 행위 속에서 자기 진실을 생산해내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내면에 감추어져 있는 진실을 끄집어내는 것, 타자의 권위에 자신의 내밀한 진실을 내맡기는 것으로 옮겨가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윤리를 조형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자.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기를 시도하는 자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자. 이것이 윤리적 주체의 전형을 이루게 됩니다.

우리 근대인들은, 반드시 기독교 문화의 세례를 받지 않았을지라도, 고대 그리스인들보다는 기독교적 주체와 더 닮아 있는 것 같습니다. 고대인들과 근대인들의 가장 큰 차이 중 하나는 바로 ‘내면’입니다. 디오게네스에게서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그들은 비대한 내면을 짊어지고 살아가지 않았습니다. 누군가의 진실은 그의 행위에서 모두 드러나는 것이지 의식 깊은 곳에 감추어진 비밀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누군가 자신의 내밀한 진실을 알아주기를 바라지도 않았죠. 반면 우리는 자신이 구성하고 있는 일련의 행위들과 조응하지 않는 어떤 감추어진 진실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러한 진실 주변에서 자신의 자아를 구성합니다. 우리는 행위로 모조리 표현되지 않는 잉여로서의 ‘의도’를 따로 설정하고,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구체적 장(場)이 아닌 어떤 관념이나 기억들과 더불어 스스로의 정체성을 형성합니다. 그리고 스스로의 비대한 자아를 돌보고 치장하는 데 에너지를 모두 허비하죠. 역설적인 것은, 우리가 스스로의 진실을 감추어놓을수록 다른 누군가에 의해 그것이 발견되기를, 이해되고 공감받기를 갈망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진실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욕망. 이로 인해 우리는 타자의 권위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대해진 자아가 감당하기 힘들어질 때, 우리는 관점을 전환하고 시야를 넓힘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병을 겪어낼 지혜를 터득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로 도피하려 합니다. 자신의 진실을 대신 해석해줄 전문가-사제에게로, 자기 문제를 대신 감당하고 보살펴줄 부모에게로. 결국은 자기 내면의 불안정함을 외면하기 위하여 무리에게로 향하고 시스템에 자신을 내어줍니다. 저는 푸코가 진실의 역사를 쓰는 대신에 주체가 진실과 맺는 관계의 역사를 썼다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윤리의 문제는 진실을 발견하는 데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진실과 능동적인 방식으로 관계하는 데에 있다는 생각입니다. 자기 진실의 주체가 되는 것, 그리고 ‘알’의 편에 서는 것. 아직은 이 문제들이 스무스하게 연결되지는 않으나 분명 둘 사이에 근본적인 관계가 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 시간에는 《육체의 고백》 1장 4번 ‘최고의 기술’ 中 1 지도의 원칙, 2 복종의 규칙, 3 하느님에 대한 의존을 읽고 오시면 됩니다(~204쪽). 간식은 경혜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그럼 금요일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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