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역 세미나

성역세미나 4학기 두 번째 시간 후기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21-10-11 23:39
조회
103

<성의 역사> 처음을 돌아보면 푸코가 비판하는 것은 억압이론이었습니다. 우리는 권력에 의해 억압되었고, 자유롭게 욕망을 펼치지 못했고, 해방을 위해서는 맞서 싸워야 한다는 이론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죠. 푸코의 분석은 우리가 어떻게 억압되었는가가 아닌, 우리는 어떻게 길들여졌는가로 향합니다. 개인들은 어떻게 관리(통치)되었는가. 이 분석에서 푸코는 권력이란 금지할 때조차 금지가 목적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권력은 억압,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못하게 가로막지 않습니다. 다만 권력은 생산합니다. 자발적으로 시스템을 작동시키는 시스템적 주체를 말입니다. 이렇게 물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욕망에 따라 자유롭게 사는 것 같아도 그 행동의 준거점이 결국 시스템이라면 그게 정말 자유로운 것일까? 이미 만들어진 정책을 비판하는 것은 단순히 반응적인 것은 아닐까? 푸코는 좀 더 근본적인 조건을 살피기 위해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 그리고 이제 막 기독교가 정착하기 시작한 2세기 로마 제국으로 갑니다. 그곳에서 지금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위생, 성생활, 놀이, 식생활, 병과 관계하는, 자신의 진실을 구성하는 지금과 전혀 다른 방식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진실이 구성되는 방식이 달라지는 단절의 순간을 포착하게 됩니다. 자신의 진실을 구성하는 방식, 그러니까 주체를 구성하는 방식이 어느 기점을 계기로 전혀 달라지게 된 것입니다.

푸코는 이를 기독교가 정착되기 시작하는 기원후 2세기 클레멘스와 아우구스투스의 텍스트에서 포착합니다. 클레멘스는 스토아 학파의 어휘를 그대로 가져와 기독교와 접목시킨, 기독교 이론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하는 말은 스토아 학파의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절제를 강조하고, 자연에서 배워야 한다고 말하죠. 하지만 푸코는 클레멘스의 텍스트에서 지금 우리의 주체화 양식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를 발견합니다. 바로 타동성입니다. 클레멘스는 인간의 몸을 하느님과의 공조를 통해 태어난 신성한 것이라고 치켜세웁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순수성을 잃어버리면 하느님은 그를 저버릴 것이고, 그때부터 타락의 길로 접어드는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를 위해 인간은 끊임없이, 심지어 내가 의식하지 못하고 행위한 적도 없는 것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검열하고 검증받아야 하는 존재가 됩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아프로디지아, 육체라는 축을 통해 성을 경험하면서 어떻게 성욕의 노예가 되지 않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기예의 관점에서 몸을 경험했습니다. 양생이란 몸을 건강하게 하는 것 이상으로 자신의 윤리를 구성하는 문제였습니다. 이때 주체의 진실은 내가 내 몸과 관계맺는 행위로 드러났지요. 자기와 어떻게 관계맺을 것인가, 그 기예의 문제가 진실의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기원후 2세기 클레멘스의 텍스트에서는 이 주체화의 타동화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주체의 진실은 기예에서 타인에 의해 검증받아야 하는 의무가 되고, 동시에 너무나 은밀해서 본인조차 장담할 수 없는 그래서 판단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주체의 진실을 판단해주는 것은 신을 대신해 고해를 들은 사제의 몫이 되고, 주체가 순수성을 검증받거나 회복받기 위해서는 언제나 사제를 찾아야 했던 것입니다.

푸코는 기독교의 문제를, 자기 스스로가 자기를 다스리는 기예 없이 모든 것을 타인에게 맡겨버리는 것으로 들었습니다. "그 어떤 끈으로도 자기 자신에 매여 있지 않음으로써 자기 자신이 되지 않으려는 태도"(<성의 역사 4>, p.221)가 있다고 말입니다. 이 구절은 지금 우리에게도 뜨끔한 말입니다. 지금은 사제의 역할이 부모, 의사, 교사, 각종 상담사에게 분할되었고, 어쩌면 개인은 더 촘촘하게 자신을 검증받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심지어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선보이면서 그에 대한 호감도를 측정받는 SNS 활동이 어느때보다 활발하죠. 각종 테스트나 알고리즘 등 내가 누군지 드러내주는 시스템은 너무도 많고, 더 많이 원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런 시스템과, 나 자신과 관계맺는 기예의 다른 점은 역시 윤리의 유무가 아닐까요? 나는 어떻게 순수한 '나'를 찾는 게 아닌, 자기 자신이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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