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비기너스 세미나

뉴비기너스 시즌 2 마지막 시간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1-08-05 11:43
조회
84
뉴비기너스 세미나 2학기가 지난주에 끝이 났습니다. 지난 시즌의 주제는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였는데요, 《소피스트 운동》, 《소크라테스 회상록》, 《소크라테스의 변명》, 《구름》 을 읽으면서 우리는 아테네 광장을 누비며 ‘어떻게 살 것인지’를 질문한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를 만나보았습니다. 각 책들의 논점이 달라서 재밌었던 것 같습니다. 《소피스트 운동》의 저자 조지 커퍼드는 플라톤 이래로 형성된 소피스트들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자 합니다. 《소크라테스 회상록》의 크세노폰은 몸의 단련과 절제에 최고 가치를 부여하는 소크라테스의 수행자적인 면모를 강조합니다. 반면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플라톤은 델포이 신탁을 받고 타인들의 앎을 검토하러 다니는 소크라테스의 철학자적 모습에 집중합니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소크라테스를 전형적인 궤변론자로 그리죠.

이 책들을 통해 우리는 무엇과 만났을까요? 솔직히 아직도 소피스트들에 대해서는 오리무중이지만, 소크라테스라는 거인의 모습을 슬며시 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참 놀랍습니다. 중요한 지위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국가를 설립하거나 법을 만든 것도 아니고, 전쟁에서 승리한 것도 아니고, 기적을 일으킨 것도 아니고, 저서를 남기지도 않았는데 소크라테스는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립니다. 그는 자신의 삶으로, 말과 행위와 존재만으로 철학사에 어떤 돌이킬 수 없는 파장을 일으켰던 것이죠. 대체 얼마나 강도 높은 삶이었을까. 상상을 해보게 됩니다. 저는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를 특히 감명 깊게 읽었는데요,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법에 대한 복종, 종교적 경건함, 섭생과 양생, 우정, 정치 등등 인간 삶의 모든 요소들을 자기 배려의 실천으로 본격화하기를 사람들에게 주문하고, 스스로의 삶으로 그것을 보여준 자로 나타납니다. 이것을 읽으며 저는 소크라테스가 ‘철학적 삶’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한 삶의 강도 높은 자유로움에 감탄하기도 했고요. 아래는 마지막 에세이 발표를 함께하신 성희샘과 소정샘의 후기입니다.

<성희샘>

소크라테스에게 자유로운 삶, 자기 자신으로 산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주는 풍요로움이나 타인의 지배 등에 의해 길들여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욕망에 지배당하지 않아야 하며 자제력이나 절제 등 훈련을 통하여 얻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먼저 어떤 것이 좋고 나쁜지를 분별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고 되도록 적게 필요로 하는 것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말이나 생각이 아니라 실제로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고, 민주시민으로서 누구로부터 지배받지 않는 능동성이 중요한 가치였던 시대에 절제없는 쾌락의 추구는 내가 나를 조절할 수 없고 나다운 삶이 불가능하다는 관점은 현재도 유효해 보인다.

자기욕망을 더 적절하게 작동하게 하는 자유를 통해 주어진 상황에 복종하며 자기를 맞추고 깎아내는 것이 아니라 지혜롭게 자기의 삶을 구성하는 방법을 제안하고 있다. 이번 두 번째 시즌의 주인공인 소크라테스를 통해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를 질문하고, 늘 추구하지만 막연한 행복하고 즐거운 삶이란 무절제가 아닌 절제의 힘에서 찾을 수 있음을 생각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소정샘>

드디어 그리스 철학공부 대장정의 첫 부분인 소크라테스 읽기를 끝냈다. 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리스철학 세미나는 고정된 생각의 지점들을 자유롭게 하는 유연성을 가져왔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각자 한 편의 에세이로 소크라테스와의 만남을 마무리하였는데, 나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평온함에 매혹되어 그것을 주제로 가져왔다. 날마다 덕에 관해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최상의 좋음을 죽음 앞에서도 멈추지 않은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현재 죽음을 유예시키려고 전전긍긍하는 나의 모습과 대비되었다. 나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 자유를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성희 쌤의 에세이는 사회를 긍정하면서 개별자도 함께 긍정하는 소크라테스를 주시하였다. 여기에서 우정이 작동되는 지점에 친구에게 쓸모 있음이 들어간다는 것이 낯설게 다가왔다. 철학함이란 친구와 나의 관계에서 선함의 역량이 어떻게 극대화되는가를 통찰하는 지점도 갖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건화 쌤의 에세이는 소크라테스의 절제가 욕망에서조차 길들여지지 않는 실존을 창조한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길들여지지 않는’ 이라는 형용사구는 지금까지 내가 생각해왔던 관념의 지점을 낯설게 만들었다. 나에게 길들여지지 않음이란 ‘훈련되지 않음’, 내지는 ‘유용해지지 않음’의 의미였는데, 다시 ‘규정당하지 않음’, ‘구속당하지 않음’이라는 의미로 다양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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