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문회 세미나

[청문회] 9주차 공지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21-05-07 16:06
조회
120
이제 마지막 시간만 남았네요! 같이 공부하면서 저도 모르게 경제적인 척도로 삶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미래를 생각할 때라든지 지구(와 다른 모든 것들과)와의 관계에서라든지 ‘발전과 성장’의 관점이 아닌 게 없었습니다. 이렇게 호모 에코노미쿠스적인 인간이었는지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요. 뾰족한 해결책을 내지는 못하더라도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주 금요일 오전 10시에 만나요!

 

이번에는 조너선 크레리의 《24/7 잠의 종말》을 읽었습니다. ‘24/7’이란 ‘일주일 24시간 내내’란 뜻입니다. 즉, 잠을 자지 않는 일상, 예기치 않은 사건이 배제된 일주일을 보내는 일상이 출현했음을 암시합니다. 저자가 ‘24/365(365일 24시간 내내)’가 아니라 ‘24/7’을 문제 삼은 이유는 “선진국의 많은 기관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24/7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입니다.(24) 사실 책을 피기 전에는 ‘24/7이든 24/365든 잠을 자지 않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가?’라는 생각이었는데, 그건 이미 제가 호모 에코노미쿠스로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잠이라고 하면 ‘생물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라는 생각이 들지만, ‘줄이면 줄일수록 좋다’는 생각도 듭니다. 혹은 ‘잠을 자는 것이 효율적으로 일하는 데 도움된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관념들은 모두 잠을 경제적인 척도 속에서 평가한 결과입니다. 서구 역사에서 잠 혹은 밤의 시간은 오랫동안 이성이 작동하지 않는 영역으로 간주돼 왔습니다. 그것은 데카르트를 비롯한 합리주의 철학자들의 꿈에 대한 평가절하와 홉스의 ‘국가의 기본적인 의무는 잠자는 자를 보호하는 것’이란 논의에서 드러납니다. 그러나 철학자들의 논의와 달리, 홉스에게 잠을 잔다는 것은 유산계급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즉, 홉스의 국가에서는 더 많이 일할 수 있는 사람만이 안전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산계급이 평온하게 잠을 잘 수 있다는 것은 곧 재산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며, 이는 재산을 가지지 못한 궁핍한 자들과 이방인들에 대한 억압과 배제를 동반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산계급이 밤에 잠을 자는 동안, 그들의 재산을 약탈할 수 있는 야만적인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홉스의 국가가 ‘이성적’이라면, 그 이성은 궁핍한 자들을 야만적인 존재로 규정하는 폭력과 다르지 않습니다.

크레리는 잠이 침해되는 상황을 사회·정치적인 수준의 문제라고 제기합니다. 잠을 덜 자게 되는 것은 단순히 효율적으로 잔다거나 잠을 덜 자도 되는 신체의 발명과 무관합니다. 그것은 개인적으로는 더 열심히 일하기 위해 그리하여 더 많은 부를 소유하기 위한 자본주의적 상황과 얽혀있음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집단적으로는 돈을 벌지 않으면 스스로의 실존조차 보장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 내몰려 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자야 할 권리’는 주장돼야 하지만, 단순히 개인의 피곤을 회복하기 위한 목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피로의 회복은 노동할 수 있는 신체와 연관되기 때문이죠. 근본적으로 잠을 줄여가면서까지 일하지 않으면 실존할 수 없는 사회적 구조에 대한 문제제기여야 합니다.

크레리는 “잠은 우리가 의식하든 안 하든 우리 자신을 타인의 돌봄에 내맡기는, 아직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경험 중 하나다 (…) 잠은 어떤 면제, 우리가 깨어있는 동안 얽혀든 그 모든 가닥들의 ‘변함없는 연속성’으로부터의 놓여남이다. 잠이 비활동성과 무용성의 상태에 들기 위해 네트워크와 기기로부터의 주기적 이탈을 요구한다는 진술은 너무나 자명해 보인다. 잠은 우리가 소유한 것들 또는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들은 것들로가 아니라 어떤 다른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시간의 형태다.”라고 말했죠.(196~197) 호모 에코노미쿠스로서 잠을 경시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타인의 돌봄에 자신을 내맡기는 데 그리고 경제적 척도가 아닌 다른 것으로 삶을 바라보는 데 미숙하다는 것과 연관됩니다. 잠을 줄이는 것이 활동량의 증가와 연관될지는 모르겠지만, 세계를 지각하는 능력의 축소와 연관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잠의 축소는 나 혼자서 살아갈 수 있다는 호모 에코노미쿠스적 인간의 고립된 생활에서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잠을 비롯하여 타인의 돌봄을 경험할 수 있는 생활양식의 발명일 텐데, 이 부분에서 저희가 그동안 읽어왔던 책들이 같이 떠오르네요. 타인과 함께할 수 있는 생활양식의 발명은 이 시대에서 ‘집단지성’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기승전 ‘집단지성’이네요. ㅋㅋ

또, 이번에 읽은 책들은 공통되게 ‘풍요’에 대한 다른 관점을 제시했죠. 경제적 풍요가 아니라 관계의 풍요(?)라 할 수 있겠는데요. 확실히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필요는 결코 엄밀한 의미에서 풍요로 이어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계속해서 결여를 생산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구체적으로 다른 풍요가 무엇일지는 아직 깜깜합니다. 여기서 〈응제왕〉의 마지막 에피소드, 깨달은 열자의 삶이 다른 풍요의 단서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열자는 “3년간 밖을 나가지 않고서 아내를 위해 밥을 짓고 돼지 먹이기를 사람 먹이듯 하여, 매사에 친소를 두지 않았다. ‘수행해서 자연으로 복귀하여(雕琢復朴)’, 우두커니 홀로 그 모습으로 서 있고 어지러이 뒤섞이되, 오로지 이렇게 하여 생을 마쳤다.” 열자가 사람이 언제 죽는지 귀신같이 맞추는 계함에게 빠진 것을 부자가 되기 위한 비법에 홀려서 어떤 짓이든 할 수 있는 호모 에코노미쿠스로 읽을 수 있는데, 장자는 그런 삶보다 ‘소박함의 회복(復朴)’에서 풍요로운 삶을 그리죠. 이런 것을 보면 우리가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을 짐작하게 됩니다. 딱히 해결책이란 것은 없지만, 어떤 풍요를 만끽하며 살지 고민하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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