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세미나

8.12 인생 세미나 공지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21-08-09 15:07
조회
133
이제까지 나는 우리가 보통 차이 혹은 유사성으로 인식하는 그 무엇에 앞서는 어떤 과정, 즉 혼동이라는 형식에 의존하는 과정을 탐구해왔다. 살아있는 사고에서 혼동(혹은 망각이나 무분별)이 맡은 역할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인간적인 것을 넘어선 인류학을 진전시킬 수 있다. 이 인류학은 살아있는 것과 생각하는 것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저 수많은 역동성을 주시할 수 있다. 생명과 사고는 결코 다수의 차이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에두아르드 콘, <숲은 생각한다> , p.177)


<숲은 생각한다> 두 번째 시간에는 2장을 읽고 각자 나눈 부분을 발제해 오는 방식으로 세미나를 진행해 보았습니다. 2장의 제목은 '살아있는 사고'입니다. '인간적인 것을 넘어선 인류학'을 추구하는 저자는 우리가 '한다'고 여기는 활동인 '사고'를 그 자체로 생명의 작동이라 보았습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사고하는 게 아니라 사고'가' 인간을 찾아오고 경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모든 생명체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죠.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모든 생명체가 기호를 창출한다는 보편성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에두아르드 콘의 사유를 단번에 이해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짧은 분량인데도 같은 구절을 몇 번씩 읽었던 것 같아요. 그만큼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사고방식이기 때문이겠지요. 여전히 내'가' 생각하고 인간'이' 하는 표상활동만을 '사고'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장의 키워드는 '자기들의 생태학'입니다. 여기서 자기(self)는 주체와 자아라는 말이 들어갈 자리에 옵니다.

자기란 무엇일까요? 일단 자기란 나만의 독특한 자아와는 거리가 멉니다. 종이나 성별 같은 것으로 환원되는 정체성에 기반한 것도 아니고요. 자기는 계속해서 중첩되는 개체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과 비인간 모두 '자기'이지만, 이때 자기는 다른 것들과 연관되는 가운데, 그러면서도 구분되는 가운데 있는 '자기'이지요. 다른 것들과 구분되면서도 모든 것의 원형을 포함하고 있는, 집단무의식에 기반한 의식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종의 보편성에 기반한 개체들의 생태는 위계가 있을 수 없고, 모든 면에서 활기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계는 "주술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에 의미가 있고, 살아있는 기호들의 역동적인 의미화 과정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지요. 여기서 인간종에 국한된 잣대를 들이대고 그것의 목적과 위계를 부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바로 관계성, 개체들 간의 공통성을 찾고 무분별을 이루는 것이지 차이를 찾고 구분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자는 2장에서 '혼동'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개들이 퓨마를 사슴으로 착각하고, 사슴을 뜻하는 방식으로 짖고, 사슴을 좇는 방식으로 달려나갔다가 죽어버린 사건을 두고 아빌라 사람들은 개가 멍청해서 그랬다고 합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개가 '혼동'을 한다는 것, 그리고 인간은 그 '혼동'을 이해하고 개의 표상작용을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인간은 다른 것들과 무분별을 느끼고 한편으로 생명활동을 연결시키는 '살아있는 사고'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인류학은 인간적인 것을 구분하는 것을 벗어나 '인간적인 것을 넘어선 인류학'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살아있는 사고', '자기들의 생태학'을 읽으면, 생태적인 문제를 오로지 인간만의 것으로, 인간만의 전유물인 것처럼 여기는 것도 무척 오만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전에 우리는 다른 종과 얼마나 연결되어 있음을 느낄까요? 어떻게 하면 다른 것들과 함께 하며 '숲'을 이룰 수 있을까요?



다음 시간에는 <숲은 생각한다> 3장, 4장 읽어옵니다.


목요일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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