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읽기

9일 후기 및 16일 세미나 공지

작성자
현옥
작성일
2017-02-14 09:30
조회
283
이번에 개인적으로 매우 인상적이었던 것은, 마슈레의 설명을 통해 헤겔의 ‘절대적 관념론’을 다소나마 맛보았던 점입니다. 그동안 막연하게 생각했던 헤겔의 변증법은 ‘하나의 부정을 그것에 대한 다른 부정으로 소멸시키고 통합하면서 더 큰 것으로 나아가는’ 식의 기계적인 것이었는데, 놀랍게도 헤겔 자신은 이런 ‘유한한 부정’의 방식을 강력히 부정했다고 하네요. 생각해보니 이런 단순한 방식은 우리가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반성의 형식으로 지난 일을 합리화하고 앞으로는 이러저러하게 잘 해보리라는 계획을 세워놓고 안심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이더라구요. 이런 경우 ‘조작의 결과는 실정적이지만 그 결과는 이성적으로 증명된 것이 아니며, 필연성은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 즉 그런 나의 결심이 끝까지 진행되어 첫 번째 부정이 수정되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실정적인 것의 자기복귀의 필연성은 보증되지 않는다는 거지요. 그러면 그렇지, 대가의 사유가 그토록 허술할 리가 없었던 겁니다. 헤겔은 물론 부정을 얘기하고는 있지만, 그 부정은 어디까지나 실정적인 것을 생산하기 위한 매개일 뿐, 부정 그 자체를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즉 헤겔에게도 궁극의 목적은 실정적인 것을 생산하는 것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결과를 산출할 수 있을만한 강력한 수단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데요, 그게 바로 주체적 정신에 의해 수행되는 ‘절대적 부정’입니다.

한 마디로 ‘절대적 부정의 정신’이란 이미 자기 안에 결과를 산출할 만한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무한하고 절대적인 정신입니다. 따라서 중간에 어떤 모순을 만나더라도 쇠퇴하거나 타락하는 법이 없으며, 오로지 자신의 한계까지 나아간 다음 자신에게로 돌아오고 또 돌아오는 불굴의 과정을 거쳐 내생적으로 일관되고 필연적인 어떤 과정으로서의 ‘절대적 부정의 운동’을 완수한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하여 탄생하는 실정성이 ‘절대정신’입니다. 어째서 ‘절대적’이라는 말이 붙는지를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죠. 우리가 흔히 역경을 딛고 위대한 성취를 이루어낸 어떤 인물을 상상할 때 흔히 떠올리는 그런 이미지가 아닐까 싶어요.

헤겔은 바로 이런 입장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사유에는 ‘절대적 주체’와 부정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모순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즉 주체가 있고 대상이 있어야 목적이 성립하고, 그 목적을 향한 운동이 가능하기 때문이지요.

그런 헤겔이 보기에 스피노자의 사유체계가 부실해보였던 것은 당연한 듯해요. 지난 시간에도 얘기했지만, 스피노자가 상정해놓은 절대자로서의 실체(혹은 神)는 서로를 제한하는 속성들의 통일체로서, 겉으로는 분명 절대적이고 완전해보이지만 그 운동성을 속성들에게 모두 양도해버린 유명무실한 것 즉 ‘주체가 아니라는 것‘이 첫 번째 문제입니다. 다음으로 속성들은 말로는 ’각자의 有안에서 무한하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속성들끼리 서로를 제한하며 대립하고 있고, 또 실체의 한 부분으로서만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그 무한성 역시 제한될 수밖에 없으니 실정적인 무한성이 아니라는 겁니다. 헤겔은 무엇보다 스피노자의 사유에서 원인과 결과가 동시적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해요. 도대체 수단 없이 목적에 이르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단 말인가? 원인이 차이를 지양하고 타자를 분리시키기 위한 치열한 자기운동의 과정을 거쳐 생산될 수밖에 없는 것이 결과인데, 모순을 전개시키지도 않고 원인과 동시에 얻어지는 게 결과라니 말이 되는가? 거칠게 얘기하자면, 이게 헤겔의 답답한 사정이었던 셈이지요.^^ 따라서 (속성을 연장속성과 사유속성의 단 두 가지로만 제한하고 있던) 헤겔이 보기에는 속성들을 서로 분리시키고 대립시켜서 모순의 상황을 만들었어야 했고, 다시 그 속성들을 실체로부터 분리시켜서 실체를 주체로 만든 후에 실체가 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운동을 펼칠 수 있도록 했어야 한다는 얘기지요.

하지만 우리가 계속 얘기해왔듯이, 스피노자의 철학은 주체와 대상, 그리고 목적을 설정하지 않기에 그의 사유 안에서는 그 어느 것도 부정을 함축하지 않습니다. 속성은 그 어떤 다른 속성에게 의지하거나 제한되지 않고 자기 자신에 의해서 인식되는 것이며(다른 것에 의해 인식되거나 제한되는 것은 무한할 수 없으며, 그 본성상 부정을 함축한다), 유한양태들 역시 타동적 원인과의 관계 속에서 필연적으로 존재하지만 그 ‘내재적 원인(신)’에 의해 무한합니다.  일정한 조건(어쩌면 한계처럼 보이는) 속에서도 우리는 무한할 수 있다는 것! 바로 이 점이야말로 스피노자가 새로운 神을 통해 사유하고 펼쳐보이려고 했던 놀라운 세계가 아닐까요?!

이제 재미난 <헤겔 또는 스피노자>도 두 번을 남겨놓고 있네요. 헤겔의 스피노자에 대한 비판의 지점은 거의 드러난 것 같으니까, 남은 시간은 스피노자가 어떤 방식으로 헤겔과는 다른 사유를 펼치고 있는지, 주체도 대상도 목적도 없으며, 원인과 결과가 분리되지 않으며, 전체와 부분이 별개가 아니고, 부분들의 차이가 대립 없이 실존한다는 게 대체 어떤 모양으로 구체화될 수 있는지를 사유하고 상상해보시면 좋을 듯해요!

다음시간엔 p274(대립이 아닌 차이)까지 읽습니다. 앞의 ‘무한양태’부분은 은정쌤이, 뒤의 ‘대립없는 차이’는 현옥이 발제합니다. 간식은 은하쌤이 맡아주셨습니다.

* 이번 주에 하동쌤이 하시는 연극을 함께 관람하기로 해서, 세미나 시간이 4시 30분으로 앞당겨졌습니다.(공연은 7시 반) 우리 앞에 삼국지 세미나가 있어서, 외부에서 해야 하지 않을까 했는데, 규창쌤께 확인해본 결과 연구실에서 해도 상관이 없겠다고 하네요.

4시 30분에 연구실에서 만납니다! 재미나게 공부하시고 즐겁게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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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2-15 06:53
    위에서 유한양태인 우리가 무한할 수 있는 이유는 '내재적 원인(신의 무한한 역량)'에 의해서라고만 했는데요, 그와 동시에 '자신의 타동적 원인의 무한한 다양성에 의해서도 무한하다'는 것을 반드시 덧붙여야 할 듯합니다. 우리가 어떤 물체에 의해 많은 방식으로 변용되는 것을 느끼는 것 자체가, '인간의 신체가 아주 많은 방식으로 외부물체에 의해 변용된다'(에티카2-공리3)는 얘기라는 거죠. 이 중요한 걸 제가 자꾸 까먹는건, 여전히 외부물체 즉 타동적 원인을 자꾸만 한계(나의 동일성을 위협하는 모순)로만 여기고 있기 때문인 듯! 바로 헤겔적 사유방식인데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