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세키와 글쓰기

11.12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6-11-17 19:51
조회
307
너~~무나 늦어버렸네요ㅠㅠ 죄송.

-프로젝트의 취지 & 각자의 고민

혜원누나가 이미 얘기했지만, 이번 주에는 채운쌤이 소세키 프로젝트의 취지를 밝히셨습니다. 물론 누차 말씀하셨던 부분이지만, 써오는 글들을 보시고서 다시 한 번 강조할 필요성을 느끼신 것 같습니다. 채운쌤이 강조하신 점은 ‘내가! 지금!’ 소세키를 읽는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소세키 프로젝트의 취지는 ‘내가 지금’ 읽는 소세키에 관해 쓰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각자의 위치를 지운 채로 논평적 거리감으로 글을 쓰지 말라는 것이 채운쌤의 당부였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의 문제는 텍스트와 만나지 못하는 것일까요? 채운쌤은 요즘 들어 ‘사람들은 번뇌가 없나?’라는 의문이 든다고 말씀하셨죠. 읽고 공부하는 것과 삶의 문제가 연결되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충분히 번뇌를 겪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중요한 건 번뇌가 없다는 게 고민이 없다는 뜻은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두 나름의 고민이 있죠. 미래에 대한 불안일 수도 있고, 당장에 먹고사는 문제일 수도 있고, 직장생활이나 학교생활에서 느끼는 답답함 같은 것일 수도 있고. 문제는 스트레스만 받고 자기 고민을 파고들어가지 않는다는 점일 것입니다. 채운쌤은 가령 학점이 지금 자신의 걱정이라면, 왜 ‘나는 왜 학점을 고민 하는가’를 묻지 않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개인적인 문제와 시대적인 문제가 따로 있고, 사회적인 문제와 사적인 문제가 따로 있는 게 아니겠죠. 어떤 방식으로 문제화하느냐가 관건일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텍스트를 읽고 글을 쓰는 과정 자체가 확정되어 있지 않은 자기고민을 구체화하고 확장시키는 일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을 것 같습니다. 어쩐지 제가 이 문제를 당위의 차원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네요;;

 

-소세키와 그의 시대

채운쌤은 우리가 자기 문제를 가지고소세키와 만날 수 있도록 소세키의 시대와 그가 그 안에서 품고 있던 고민을 좀 더 구체화시켜주셨습니다. 소세키는 학문적인 텍스트인 <문학론>의 서문에서 자신의 신경쇠약과 광기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흔히 생각하기에 학문적 텍스트의 서문에는 어울리지 않는 내용이 담겨 있죠. 그것은 그의 <문학론> 자체가 서구라는 보편에 대한 이의제기였으며, 동시에 자기를 사로잡고 있던 문제의 돌파구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소세키는 자주 자신이 메이지 이전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실상 메이지와 함께 태어나고 죽은 소세키이지만, 그는 그 시대 안에서 자신을 이방인으로 느꼈던 것이겠지요. 소세키는 일본의 근대화가 자발적이지 않다는 것, 강요된 것이라는 점을 강하게 자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다른 이들이 헐떡이며 좇고 있던 서양이라는 유일한 모델, 그러한 보편성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었겠지요. 그런데 소세키는 서구의 보편적 시간을 거부하기 위해서 동양적인 것, 일본적인 것으로 회귀하지 않습니다. 그는 보편에 대해 또 다른 보편을 내세우는 것으로 맞서지 않습니다. 채운쌤은 소세키가 자신의 소설을 통해 서구적 보편을 다양한 거리에서 보려는 시도를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풀베개>나 <우미인초>에서 소세키는 굉장히 동양적 관점에서 근대를 보고, 정면으로 서구적 근대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읽은 <그 후>와 <문>에서 문제는 훨씬 더 복잡성을 띠고 있습니다. 소세키의 소설들을 떠올려보면 항상 비슷한 구도와 비슷한 인물들이 변주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변주될 때마다 그의 문제의식은 새롭게 출현하는 것 같습니다.

채운쌤은 소세키의 글에서 근대가 불안이나 위험으로 드러난다는 점에 주목하셨습니다. 그러한 불안과 위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소세키가 끊임없이 자신의 메이지의 바깥에 있다고 느끼면서도(메이지 이전에 태어났다는 것에 대한 자각) 동시에 거기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자신이 그 안에 있음을 자각하는 데에서 오는 불안과 위험일 것입니다. 이것은 소세키의 인물들에게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태도입니다. <고양이>에서부터 <그 후>에 이르기까지 거의 대부분의 인물들은 어떤 사건에 들어가거나 들어가지 않는, 그 경계에 있습니다. 소세키의 소설을 관통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경계, 거리감인 것 같습니다. 소세키가 여성을 다루는 방식도 그렇습니다. 소세키 소설에서 여성은 굉장히 시각적으로 다가오면서도 결코 어떤 선을 넘어가지 않죠. 그의 소설에는 결코 낭만적인 사랑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소세키는 계속해서 결코 자기를 일치시킬 수 없지만, 그로부터 벗어날 수도 없는 것에 대해 썼던 것 같습니다.

소세키의 모든 소설은 지식인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가 살던 시대에 지식인의 문제를 소설에서 다루는 것은 결코 특별한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지식인의 문제를 풀어내는 매우 독특한 지점이 있습니다. 소세키가 다루는 지식인들은 거의가 고등유민들이죠. 이들에게 주어진 것은 취직이나 돈 벌기입니다. 어영부영 이것을 유예하는 자들이 바로 고등유민이죠. 그러나 이들은 결코 정면에서, 적극적으로 이것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한편으로 이들은 모두 노동에 대해서 밥벌이에 대해서 부채감을 느끼고 있지요. 채운쌤은 메이지 시대 고등유민들의 어영부영함과 지금 우리의 어영부영함을 비교해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등유민들을 결정하지 못하게 하는 힘은 무엇이며, 지금 우리를 어영부영하게 하는 힘은 무엇인지. 어떤 점에서 같고 어떤 점에서 다른지. 이들이 앓고 있는 신경쇠약과 지금 우리의 우울, 무기력감은 어떠한지. 고민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소세키의 소설에서 어떤 갈등이나 불화가 첨예하게 진행되는 일은 없습니다. 가령 <산시로>는 성장소설의 외형을 갖고 있지만, 결코 성장소설과 같은 격렬한 충동, 변화가 없죠. 산시로의 ‘조로함’은 무엇일지, 그리고 왜 소세키의 소설은 표류하는 데에서 멈추는지, 이것 역시 질문해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합평

전체적으로 문제가 촉발될 만한 부분들을 던져 주시고 채운쌤은 개인별로 글을 코멘트해주셨습니다. 꼭 본인에게 주어진 코멘트가 아니더라도 다른 코멘트들도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우선 저에 대해서는 어떤 문제를 풀어야겠다는 당위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문제를가지고 써야하지 않을까’하는 당위에 이끌려서 쓰다 보니 소설의 인물들이나 사건들은 실종되고 인용해온 다른 것들에 휘말려버리는 경우가 많다고 하셨습니다. 종은쌤에 대해서는 소설을 너무 부분적으로 보고 읽는 사람들을 설득하려는 의지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셨고, 락쿤쌤은 전체적으로 글이 무책임하다는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규창에 대해서는 어떤 사소한 것을 특별하게 보려면 그것을 중요하게 본 이유가 설득이 되어야 하는데, 그 부분이 빠져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소세키의 소설이 아니어도, 근대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지양해야 한다고 코멘트하셨습니다. 그러고 감자에 대해서는 글이 미완이거나 내용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번뇌가 드러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다른 개념이나 다른 틀에 기대서 글을 쓰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응쌤에게는 무엇이 되었든 본인의 얘기를 일단 써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떠오르는 것을 일단 풀어내고 거기로부터 소설과의 연결고리를 발견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12월까지(얼마 안 남았네요.) 특정한 주제나 작품을 잡고, 그때부터 목차와 주제를 구체적으로 잡아가며 훈련에 돌입(!)해서 1월 안에 초고를 작성하는 것이 채운쌤의(?) 목표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문제를 툭툭 던지지 말고 세밀하게, 쌓아간다는 마음으로 공통과제를 쓸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끝.
전체 2

  • 2016-11-17 20:20
    소세키를 통해 보는 메이지시대는 분명 소세키 특유의 시각으로 드러나는 지금과의 확연한 차이가 있을텐데, 딱히 느껴지지 않는 이 이상한 일이란 ㅋㅋㅋ 이 시대나 저 시대나 다 비슷해 보이네요....

  • 2016-11-18 13:02
    마지막에 저 '끝'이라는 단어는 뭥미. 의무 완수, 이런 건가-_-? // 소설이란 게 보편적인 주제 - 세계와 인간, 삶과 죽음... 같은 걸 다루고 있으니 그런 측면에서 '같은 것 찾기' 놀이를 하기도 아주 쉬운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런 식의 놀이가 내게 뭘 남기는지를 생각해보면 별 게 없다는 게 함정. 아무리 위대한 작품을 남긴 작가라 할지라도 결국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르는 온갖 정보와 욕망들의 선을 피할 수는 없는 법, 그의 눈으로 포착한 세계, 그가 감각한 사랑, 그가 궁금해 한 존재에 대해 자꾸 추리해보려고 애써야할 것 같아요. 그런데 추리란 게 어디 맨땅에 헤딩이랍디까. 수많은 단서들을 긁어모아 이리저리 짜맞추고 허물고 다시 보고, 그게 추리죠. 단순하게 텔레비전 드라마 따라가듯 작품을 읽어서야 추리가 될 리가 없어요. 그런데 과제들을 읽으면 어째 소설을 드라마 보듯 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서... 감정이입하거나 시시비비를 논하거나 ^^; 그게 아니라 되도록이면 소세키의 렌즈를 추리하기 위해 애써주세요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