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Q

절차탁마Q 10월 25일 공지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7-10-23 13:35
조회
72
푸코는 귀동냥하듯이 여기저기서 들었던 것 같은데, 이렇게 공부하니 정말 복잡하네요. 예전에 남산강학원에서 채운쌤한테 담론의 질서랑 감시와 처벌을 읽었는데 어찌 처음 보는 얘기 같은지요. ^^;; 하지만 그의 ‘권력관계’를 잘 파고들면 기존에 고정돼있던 것들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다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푸코는 민머리 아저씨로 보였었는데, 지금은 그의 맨들맨들하고 반짝이는 머리마저 섹시해보입니다.

 

(담론의 희박성, 앎과 실천)

먼저 폴 벤느의 ‘역사학을 혁신한 푸코’에 대한 채운쌤의 설명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폴 벤느가 주목한 것은 ‘담론의 희박성’이었죠. 채운쌤은 먼저 이런 질문을 던져주셨습니다.
  1. 왜 우린 어떤 것에 대해서는 얘기하고, 다른 것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는 걸까요?


우리는 사료를 절대화하고 그것을 잘 분석만 하면 그 시대를 100% 복구·재현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푸코는 어떤 시대든 모든 것에 대해 얘기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어떤 시대든 그 시대에만 말할 수 있는 것만 말하고, 생각할 수 있는 것만 생각합니다. 그건 곧 말할 수 없도록 배제된 앎이 있다는 것이고, 앎이란 시대를 초월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조건 속에서 ‘구성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어떤 말해질 수 있는 앎을 말해지지 않는 앎과 관계로 보면 자명한 앎은 사라지고, 그것이 출현하게 된 조건을 탐구하게 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분노하는 사건들, 가령 어금니아빠 사건처럼 인륜에 어긋난 것으로 느끼는 문제들에 대해 판단하는 우리의 앎이 초월적 앎이라고 생각할 수 없게 됩니다. 이건 판단기준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앎을 다른 차원에서 생각하는 것이죠.

보통 우리는 시대를 초월한 앎이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특정 대상을 실체화합니다. 어떤 앎이 있고 우리의 인식이 그 앎에 도달해야 우리의 가치판단, 실천지점도 가능하다고 생각하죠. 여기서 앎과 실천이 분리됩니다. 하지만 푸코는 우리가 진리라 생각하는 앎, 판단기준이 진리를 담지하고 있는지, 초월적 앎이란 것이 존재하는지를 의심하고, 그 작업이 ‘계보학’이었죠. 어떤 자명한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 근원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앎이 어떤 시대적 조건 속에서 생산되었는지를 밝히는 작업. 그의 작업에 따르면, 우리가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근대에 들어서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감시와 처벌》에서도 그런 시선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퍼포먼스, 스펙터클로서의 신체형이 소멸한 것은 인권의 성장, 휴머니즘의 등장 따위가 아니라 그러한 형벌이 더 이상 효과가 없었기 때문이었죠. ‘인권’이란 어떤 초월적인 앎이 없기 때문에 지금의 시선을 가지고 그대로 과거를 봐서는 안 됩니다. 비슷하게 《주역》에서 하늘과 땅, 양과 음, 남자와 여자 이런 두 개의 항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발끈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하다는 얘기가 아니라 자연의 성질을 설명한 것이었죠. 문득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인권도 주체의 권리를 보장하는 게 아니라 규율권력의 결과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발 하라리의 ‘상상의 질서’도 그랬지만, 푸코의 권력 개념으로 봤을 때 제가 믿었던 가치들 몇 개가 흔들릴 것 같네요.(깨지지는 않겠지만요)

고대 소피스트들에게 진리란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면 그는 진리를 얘기하고 있는 것이었죠. 동양에서도 앎은 그대로 실천으로 드러납니다. 공통적으로 이들은 앎을 구성의 차원에서 사유했고, 실천은 구성된 앎의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앎을 다르게 구성하는 것 자체가 실천이 달라지는 지점입니다. 그렇다면 무지란 단지 지식의 부족함이 아니라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모르는 태도인 것 같습니다. 어떤 자명한 진리만을 가져가면서 바뀌어야한다는 문제도 느끼지 못하는 거죠. 글이 어디서 비약이 있고, 논리에 구멍이 있는지 보지 않으려 하는 저도 너무나 무지합니다. 헤헤

 

(권력관계와 신체형)

흔히 우리는 권력을 어떤 주체의 소유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가 권력을 가지고 우리를 억압한다. 하지만 푸코에게 권력은 소유물이 아니라 정확히 말하면 ‘권력관계’입니다. 《감시와 처벌》에도 나왔지만, 누군가 갑의 관계에 위치할 수 있는 것은 갑이 그만큼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갑의 위치에 있을 수 있도록 우리 역시 거기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권력은 특정방식의 주체를 생산할 뿐이지 억압하는 게 아닙니다. 억압이라고 여겨지는 순간조차 그건 생산하는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여기서 신체형 얘기와 연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체형에서 목표로 하는 것도 특정주체의 생산이죠. 그러니까 잔인해 보이는 그 모든 처형의 과정이 그걸 보는 모든 이들의 신체를 왕권에 대항할 수 없게 만드는 생산의 과정이었던 것이죠. 그런 점에서 푸코는 이것을 ‘권력의 미시물리학’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특정한 방식으로 행위하는 신체, 특정한 홈만을 따라가는 신체를 생산하는 권력인 것이죠. 예를 들면, 군대가 그렇습니다. 군인의 자격을 가진 사람만이 군인이 되는 게 아니라 군인의 가치와 규율을 몸에 새기면서 군인으로서 훈련됩니다.

주체가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보면, 고전시대의 신체형은 ‘자백’이라는 행위를 통해 진리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즉, 형벌은 항상 진리생산과 연결돼있습니다. 수업시간 채운쌤이 “진실을 요구하지 않는 권력은 없고, 권력과 관계되지 않는 진실은 없다.”고 얘기하신 게 떠오르네요. 그러나 신체는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다르게 만들어질 수 있는 가능성 또한 내포하고 있습니다. 채운쌤은 들뢰즈의 ‘욕망하는 기계’를 설명해주시면서, 우리는 사회의 부품으로서 작동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오작동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오작동이 신체가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것이겠죠. 《감시와 처벌》에서 스펙터클로서의 신체형에서 감시와 규율을 생산하는 신체형으로 바뀌게 된 것도 그 오작동 때문이었죠. 그러니까 우린 권력관계로부터 자유롭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지배되진 않습니다. 여기서 윤리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내가 그렇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하도록 생산되는 조건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주체의 관점에서 벗어나 내가 어떤 배치 속에 있는지를 생각하는 일이겠죠. 이게 푸코가 말한 가장 국지적인 문제가 가장 사회적 문제라는 얘기인 것 같습니다.

푸코의 ‘권력관계’로 보면, 제도와 같은 사회적인 문제도 다르게 문제 삼을 수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제도에 따라 권력이 움직인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제도적으로 우위를 차지하는 게 현실정치의 목표지만, 푸코에 따르면 권력관계가 먼저고 제도는 그것의 결과입니다. 그러니 신체를 생산하는 것(아마도 욕망을 문제시하는 것과 비슷한 얘기인 것 같습니다.)을 문제 삼지 않고 정치에 접근해봤자 근본적인 변혁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똑같은 지점만을 문제 삼지 않고 다양한 지점에서 투쟁해야 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여기서 현장에서의 투쟁하는 사람들과의 연대가 필요합니다. 공부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배치 속에서 앎을 구성하고, 현장에서는 현장이라는 배치 속에서 앎을 구성하겠죠. 상이한 배치에서 구성된 앎이 연대가 될 때, 우리가 투쟁할 수 있는 지점도 더욱 확장됩니다. 아마 이게 푸코가 세계적으로 일어난 많은 정치적 투쟁에 응원을 했던 이유인 것 같습니다.

문득, 노자와 푸코가 연결될 수도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드네요. 노자를 정치철학으로 본다면, 인위(人爲)가 계속됐을 때 나타나는 문제들이 푸코의 신체성 개념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백성들은 항상 통치자의 의도대로만은 되지 않기 때문에 정치는 항상 그런 인위를 제거하는 방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제가 이해한)노자의 큰 틀입니다. 사실 느낌만 그렇고 잘은 모르겠어요. ㅎㅎ;; 생각을 좀 더 해보겠습니다.

다음 주 간식은 저와 정수쌤입니다~

이번에도 나태한 자신을 확인하며, 늦어서 죄송합니다. (_ _)
전체 1

  • 2017-10-24 14:38
    중간중간 깨알같은 반성ㅋㅋㅋ
    마지막 노자 얘기는 좀 더 풀어줬으면 좋았을텐데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