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Q

절차탁마Q 푸코 6주차 수업후기

작성자
키키이림
작성일
2017-11-17 11:28
조회
152
이번 주는 자발적 복종을 만드는 규율권력과 판옵티콘에 대해 복습하고 비행(범죄)을 출현시킨 감옥체계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저는 규율불복종에 대한 이반 일리치의 근본적인 문제의식과 실천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런 삶을 산다는 것은 참 치열하고도 전투적인 것 같습니다. 규율에 능동적으로 저항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엄밀하게 봐야할 거 같습니다.

감시와 처벌 책을 다 읽었지만 푸코의 권력개념은 아직 어렴풋합니다. 권력은 권력관계이자 권력게임!!!! 권력관계는 이미 존재에 내재되어 있고 우리의 활동과 욕망 속에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개념화하기가 어렵네요. 아무리 들어도 권력을 주체나 제도로 환원하거나 지배관계와 동일시해버리는 함정에 빠집니다. 채운쌤은 개념하나를 제대로 이해하고 푸코의 문제의식을 알아야 우리 삶의 절실한 문제들을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는 사유의 길이 열린다고 하셨습니다. 어설프게 공부하면 죽도 밥도 똥도 안된다!!! 

개인의 신체를 가시화해 정상으로 길들이는 규율권력

규율권력의 특징은 정상성의 척도로부터 벗어난 모든 것들을 잘 보이게 만드는 가시성의 권력이다. 규율권력은 억압하거나 안보이게 하는 권력이 아니라 다 드러내는 권력이다. 판옵티콘은 하나의 관념이자 펑션으로 엄청난 경제성과 합리성의 장치다. 잘 보이게 만들어 끝없이 관리, 감시해서 다시 정상성으로 돌리는 것이다. 정상적이지 않은 것들은 안보이게 했던 대감금의 시대에는 없던 정상의 기제가 작동한다. 비정상성을 가시화하면 끊임없이 정상성과 비정상성을 내면화해서 척도에 들어가게 만든다. 가시화시켜놓고 그 가시화된 것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스스로를 정상화하려는 노력들을 알아서 자동적으로 하게 만드는 것이다. 비정상성을 정상적으로 변모시키는 일련의 프로그램이 규율권력이다.

규율권력은 전체 흐름을 관리하는 동시에 개개인의 신체를 관리한다. 사망률과 출생률 등 통계를 통해 흐름을 관리하고 개개인에 대한 세분적인 감시, 관리 통제하며 개별화하는 권력이다. 규율권력과 생명권력(성의 역사에서 나오는 개념)의 측면을 다 가지고 있다. 모든 개인을 대상으로 끊임없이 행해지는 정상, 비정상의 구분이다. 여기서 정상은 노말한 평균치다. 평균치는 새로운 앎과 연관된다. 개인에 대한 세밀한 관찰과 세세한 기록을 통해 통계학이 출현한다. 개별자의 대한 기록을 수치화해서 나온 평균값, 통계학 그래프의 정상분포도에 들어가는 것이 진리값이다. 정상, 비정상은 이런 앎과 함께 만들어지는 것이다. 교율권력은 학교와 공장에도 끊임없이 작동한다. 평균적 노동력을 지닌 정상적 노동자, 일정한 학습을 받고 그 학습의 결과를 일련의 시험을 통해 일정하게 산출해 낼 수 있는 정상적 학생으로 길들인다.

시선의 비대칭성으로 행동양식을 인도하는 규율권력

규율권력의 기능과 작동방식은 판옵티콘이라는 말(옵티콘은 시각, 판은 범)이 잘 보여준다. 모든 신체들을 관찰하고 관리할 수 있는 도처에 존재하는 권력! 완전히 개체화되고 언제나 완벽하게 시선에 노출된다. 시선은 그냥 봄이 아니라 게이지로 사회화된 봄, 분절화된 봄이다. 특정한 젠더의 문제와 계급의 문제, 여러 가지 사회이데올로기를 내재하고 있는 봄이 시선이다. 시선에 노출되었다는 것은 그 시선에 맞춰 내 행동을 규율하게 된다는 것이다. 학생다움과 여성다움 등 다움이 품행을 결정한다. 내 행동을 규정할 때 그것을 규정하게 하는 잠재적 시선이 판옵티콘적 시선이다. 규율권력은 그 시선을 통해서 자신의 행위양식의 가이드라인을 정하는 것이다. 어떤 시대도 이 시선에서 독립해서 행위할 수 없다. 우리는 ‘답다’라는 수많은 행동양식의 아웃트라인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걸 인식할 때 다른 행동양식을 만들어내는 가능성 또한 있다. 행위양식의 인도가 규율이다.

가이드를 만들어내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을 판옵티콘적 시선이라고 한다. 나는 안 보이는데 그 시선이 나에게 내재되어 있는 것, 그 시선 속에서 나의 행위를 결정하는 것이다. 나의 욕망은 나의 것이 아니다. 푸코, 알튀세르, 들뢰즈 등 구조주의자들이 욕망은 구조화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이런 맥락이다. 욕망은 주체인 개인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며 시대마다 구조화되는 방식이 다르다. 근대 규율권력은 개개인이 자신의 행위양식을 스스로 인도하는데 그것을 규제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판옵티콘적 시선이다. 내면화된 규율권력이다. 판옵티콘이 이런 상징성에서 중요한 것이다. 판옵티콘에서 권력은 보여지지 않지만 모든 것을 시선에 노출시킨다. 가시화되고 있는 개인은 중앙에 있는 사람을 볼 수 없는 시선의 비대칭성이다. 신체형에서 권력은 보이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가시성이 역전되어 누가 나를 감시하는지 안 보인다. 시선은 자기 안에 내면화되었다. 지배 권력의 시선을 자기 안에서 자기가 작동시키는 행위양식이 인도되고 있는 것이다. 모범학생은 선생이 없어도 모범학생이 되는 것은 선생의 시선에서 자신의 품행이 인도되는 것이다. 이것이 권력의 내면화다.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하는 규율권력

판옵티콘은 규율권력에서 규율이 작동하는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점에서 중요한다. 지배 권력은 안보이고 나머지 모든 것은 보인다. 때문에 나를 보고 있는 시선을 내면화해서 유용성이 극대화되는 것이다. 스스로가 복종하는 것이다. 유용성이 극대화될수록 복종이 증대된다. 바라봄과 봄을 결합을 해체시키는 것이다. 권력은 자동적이고 비개성적인 것이 된다. 권력은 자동적인 장치로 저절로 생산하는 기계다. 권력은 인격 속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의 신체, 표면, 빛, 시선(보이기만 하는 것들)이라는 가시적인 것 속에서 작동중인 것이다. 규율권력의 자동성에 의해 생산된 존재이자 생산하는 존재가 된다. 판옵티콘 장치는 다양한 욕망으로부터 권력의 동질적 효과를 만들어내는 경이로운 기계장치이다. 이것은 허구적 관계다. 그런데 이 허구로부터 현실적 예속화가 생겨난다. 남성의 시선, 경찰의 시선, 부모의 시선을 자기 안에서 생산해내는 것이다. 예속화는 억압과 금지로 설명할 수 없다. 주체가 보이지 않지만 시선을 자기 안에서 작동시켜 권력을 생산해내고 있다. 권력의 효과와 강제력인 왕에서 권력의 적용지점으로 옮겨간다. 즉 가시성의 영역에 예속되어 있고, 또한 그 시선을 알고 있는 자는 스스로 권력이 강제력을 떠맡아서 자발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작용시키도록 한다. 그는 권력관계를 내면화하여 1인 2역을 하는 셈이다. 자기가 감시하고 자기가 복종한다. 감시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무엇과 싸워야 하느냐가 권력에 대한 이런 분석에서 전혀 다른 결론을 만들 수 있다. 물론 국면 국면 억압적 지배관계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럴 때조차도 이런 매커니즘의 일부, 이런 매커니즘과 연관되어 있는 또 다른 기능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권력일반이 억압의 매커니즘에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자발적 복종!!!!! 억압이 있어서 복종한다면 오히려 쉽지만 왜 우리는 알아서 복종하는가의 문제이다.

사회적 역량과 유용성을 높이는 규율권력의 기능

판옵티콘은 감옥의 한 형태가 아니라 규율권력의 작동을 가장 핵심적으로 보여주는 권력의 일반적 기능이다. 생산을 증대시키고 경제를 발전시키며, 교육의 기회를 넓히고 공중도덕의 수준을 높이며 권력을 경제적이고 효율적으로 만들었다. 사회적 역량을 강화하고 전반적 유용성의 증대를 위한 기능이었다. 규율을 확대재생산하는 경찰권력은 발생하는 모든 것을 대상화한다. 모든 사건, 행동, 행위, 여론 등 언제나 발생하는 보잘 것 없는 사건이 경찰의 관리 대상이다. 경찰권력은 모든 것에 누구에게도 개입할 수 있다. 경찰이 우리를 보호해준다는 것이 내면화되면 모든 것을 경찰제도에 의존한다. 경찰은 무한히 작은 정치권력이다. 지속적이고 철저하며 모든 것을 가시화하는 것으로 사법영역과는 다르게 작동한다. 인간의 모든 사건에 개입하는 권력이다. 감시는 얼굴 없는 시선이며 행동양식을 가이드 하는 시선이다.

일련의 기술들을 통해 작동하는 것이 규율권력이다. 권력은 주체와 동일시하면 안 된다. 군주에게 모든 권력이 있을 때조차도 군주의 의도에 따른 것이 아니다. 규율은 제도나 기구가 아니다. 복잡한 구도 속에서 행사되는 권력의 하나의 양식이다. 이전에 없던 새로운 기술이다. 징수가 아니라 생산성의 증대, 폭력적 징수가 아니라 부드러움-생산성-이익의 원칙이다. 규율은 이 원칙에 의거해 다수의 인간과 생산 장치의 다양화를 조정하는 기술로 신체의 유용성을 증대시키는 것이다. 유용성의 증대와 복종의 강화로 내가 규율권력이 부품으로 작동한다. 규율은 기계장치다. 잘 돌아갈수록 규율사회의 부품이 되는 수동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개개인의 관찰과 기록에서 앙케이트라는 지식의 출현

권력은 호화롭게 세레모니를 통해 과시하는 권력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권력이다. 페스트모델에서 개개인에 대한 관찰과 분류, 세세한 기록을 통해 나오는 것이라 규율 권력은 새로운 앎과 연관되어 있다. 테일러는 최고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휴식을 고안해 공장에 적용한 것이다. 대상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낸다. 인간의 축척과 자본의 축척은 함께 가는 것이다. 인간의 유용성을 증대시키는 것이 자본의 축척과 함께 간다. 인간이 알아서 노동하는 신체를 만들어야한다. 노동하는 신체만이 정상적 신체라는 인식이 있어야 한다. 더 효율적인 노동이 나를 더 유용하게 만들어주고 효율적인 노동을 통해서만 이익을 증대시킬 수 있다는 것이 하나의 과정이 되어야만 공장의 생산력으로 이어진다. 자본주의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규율권력이 어떤 역할을 했는가는 규율도식이 잘 적용되는 곳이 공장이라는 것을 보면 단적으로 드러난다. 규율권력의 시대에 증거조사라는 앙케이트와 새로운 인문과학이 출현했다. 인류학, 정신의학, 교육학, 범죄학이 새로운 앎의 구성과 연관되어 있다. 앎은 더 이상 왕림00학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아주 구체적인 개개인과 사건에 대한 치밀한 관찰과 기록을 통해 새로운 통계적 앎이 구성된다. 앙케이트를 실행하는 권력이 등장했다. 권력이 달라지면 지식도 달라진다. 테스트, 면담, 신문 등 앙케이트라는 새로운 지식의 형성방식을 알아야 한다.

범죄성을 출현시켜 생활태도를 관리하는 감옥

4부에서 푸코는 감옥이 어떻게 범죄를 출현시켰는가를 분석한다. 감옥은 재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태도와 삶의 양식 전반을 관리하는 범죄성(비행)을 출현시킨 장치다. 비행(범죄)은 위법행위와 구분된다. 위법은 법을 어긴 것이지만 비행은 그것보다 훨씬 폭넓은 개념으로 법을 어길 수 있는 가능성이다. 비행자를 특징짓는 판단근거는 그의 행위라기보다는 생활태도다. 감옥은 투자된 범죄자를 통해 비행자를 생산하고 인간의 행동에 대한 관리와 규제를 했다. 감옥은 사법기관의 보조기관이 아니라 독특한 역할을 수행하는 기관으로 범죄를 생산하는 기관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비판받았음에도 감옥이 사라지지 않은 것은 생활태도를 관리하는 감옥만의 독특한 이 역할 때문이다. 단순히 범죄자의 생활태도를 관리한 것이 아니라 범죄를 저지른 사람의 행동양식을 이력 전체를 문제 삼으며 전기적 조사를 한다. 범법행위로 이어질 수 있는 개개인의 모든 것을 관리하며 위험인물이라는 개념이 형성된다. 모든 범죄자는 지식의 생산자가 되어 새로운 앎이 요청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범죄가 무엇인가라는 새로운 앎이 생겨나고 법의학 감정서가 등장한다. 감옥은 규율권력의 관리 방식을 굉장히 잘 보여준다. 경찰-감옥-범죄는 상호보완적이 되며 결국 중단되지 않는 회로를 형성해 사회 구성원의 전반적인 감시가 가능해지고 사회 내 질서를 형성한다. 경찰은 범국민의 안전에 위해한 모든 것을 사찰하고 관리한다. 경찰의 권력대상은 범법행위가 아니라 감옥이 문제 삼는 것은 범법행위가 아니라 범죄라는 특수한 개념이다.

규율 불복종과 이반일리치의 노 땡큐!

규율 불복종의 문제는 이반 일리치가 실천으로 잘 보여줬다. 규율 불복종은 단순히 어떤 규율에 대해 복종하냐 불복종하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규율자체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의 문제이다. 규율자체가 나의 신체와 정신을 어떻게 구속하는지를 사유하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 그래서 불복종은 언표를 바꿔야 하고 내 신체성을 바꿔야 하는 문제다. 예를 들어 의학의 측면에서 규율을 불복종한다는 것은 의학이 우리의 몸을 수동적인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방식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반 일리치는 피부암으로 얼굴에 혹이 났는데도 종양 수술을 거부했다. 삶에 필요한 최소 부분만 선택적으로 의료적 치료받았을 뿐 건강에 대한 모든 것을 의료권력에 내 맡기는 것을 거부했다. 내 몸에 대한 주체성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 지점에서 이반 일리치는 거부한 것이다. 의학권력이 수술하라고 하면 하고, 치료 받으라고 하면 받는 식으로 시스템에 자신의 생명을 바치지 않겠다는 정도가 돼야 규율 불복종이다.

또한 이반 일리치는 핵폭탄 논의에서 핵폭탄을 만드냐 마느냐의 공론의 과정을 거부한다. 이는 최근 신고리 원전 공론화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공론의 장을 만들면 찬반 전문가의 권위에 복종해 하나의 앎을 구성하게 된다. 이때는 밀양 할머니 같은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또 찬성하는 입장도 하나의 합리성을 획득하고 찬성해야하는 이유가 있는 것처럼 느낀다. 반대해야하는 이유와 찬성해야 하는 이유가 동등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우리가 절대로 하면 안되는 게 있다는 걸 간과하게 된다. 이반 일리치는 공론의 장 자체를 거부하고 침묵으로 투쟁해야 한다고 말했다. 플러스 마이너스를 계산해서 합리적인 입장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말살하고 황폐화하는 것에 대해 공론화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근본적인 불복종이다. 우리의 신체와 정신이 특정한 경제적 이해관계를 내면화하는 등 어떤 매커니즘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지를 먼저 성찰해야한다. 규율권력의 자발적 복종은 우리가 규율에 복종할 때 복종한다고 생각하고 복종하는 게 아니다. 규율 권력은 우리를 유용하게 만들어주고 그 유용성으로 복종하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얻는 그 무언가를 버리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 촘촘하게 제도화된 시공간을 살고 있다. 규율 불복종을 규율 안에서의 권리투쟁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어딜 가도 제도적인 권리투쟁을 많이 한다. 권리를 누려야 하는데 무시당했다고 생각할 때 분노한다. 그러나 소비자의 권리라는 것이 과연 주체적인가? 기껏 중간자에게 화풀이하는 소비자의 권리는 과연 누구와 싸우고 있는 것인가? 소비하지 않는 것만큼 의 불복종은 없다. 권리라든가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뒤덮인 우리의 제도화된 신체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야 한다. 굉장히 근본적인 차원의 문제제기다. 이반 일리치의 실천은 과거라는 거울에 비추어볼 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과의 근본적인 투쟁이다. 제도에 내맡기지 않는 삶을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가 푸코와 비슷하다. 이반일리치의 테제를 보여주는 것이 노 땡큐다. 우리를 편리하게 해주는 모든 것은 어떤 임계점을 넘어가면 우리를 그것 없이는 살아갈 수 없도록 구속하게 된다. 권력 관계를 변형시킬 수 있는 새로운 삶의 양식의 문제인 규율 불복종은 이반 일리치에게서 배울 수 있다. 교육, 종교, 기술 발전 등 연구하지 않은 분야가 없는 그의 책을 읽으면 불복종에 대한 문제가 구체적으로 와 닿을 것이다.
전체 2

  • 2017-11-19 19:49
    푸코를 읽고 나면 질문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일상이 막 분해되는 느낌도 있고.... 물론 느낌이지만요 ^^

  • 2017-11-20 22:53
    오오 이림샘 일리치에 제대로 꽂히신 것 같네요ㅎㅎ 규율불복종을 어떻게 구체적이고 능동적이게 이해해볼 수 있을지... 에세이 쓸 때까지 고민해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