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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Q 11.15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7-11-12 17:16
조회
112
지난시간에는 3부 3장 〈판옵티콘 감시체제〉와 4부 1장 〈완전하고 준엄한 제도〉를 읽었죠. 푸코는 제러미 벤담이 제안한 원형 감옥 ‘판옵티콘’의 작동방식을 통해 규율권력의 메커니즘을 설명하면서 3부를 마치고 감옥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벤담이 제안한 판옵티콘, 그리고 그에 대한 푸코의 해석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모양입니다. 지난시간 함께 읽은 논문에서는 판옵티콘을 둘러싼 담론의 흐름들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전자 판옵티콘’, ‘수퍼 판옵티콘’, ‘역 판옵티콘’, ‘시놉티콘’ 등등 판옵티콘을 둘러싼 개념들의 계보만 보아도 푸코의 해석이 얼마나 많은 지적인 촉발을 일으켰는지 알 수 있었죠.

판옵티콘이라는 건축적 착상의 핵심은 ‘가시성의 비대칭성’입니다. 판옵티콘 양식의 원형감옥에서 수감자는 절대적 가시성의 영역에 노출되고 수감자를 감시하는 관리자는 베일에 가려집니다. 고전주의 시대 이전의 권력관계에서 가시성의 영역에 속해있던 것은 국왕의 신체였습니다. 권력은 의례를 통해 드러나는 통치권자의 신체를 매개로 작동했던 것이지요. 이때 피통치자들은 어둠에 가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판옵티콘으로 상징되는 규율적 권력관계에 이르면 가시성의 전도가 일어납니다. 이제 보여지는 것은 피통치자들의 신체입니다. 그리고 이때의 신체란 권력의 상징으로서의 신체가 아니라 규율할 수 있는, 세분화하고 재조립하여 효용성을 증대시킬 수 있는 재료로서의 신체입니다.

계몽(enlightenment)은 가려진 곳에 빛을 비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근대 계몽주의는 ‘인권’이나 ‘보편적 자유’라는 깃발을 내걸고 소외된 계층에 빛을 전합니다. 그런데 판옵티콘에 대한 푸코의 해석은 계몽에 대한 낯선 감각을 갖게 합니다. 낮은 곳에 빛을 비춘다는 것. 반(反)휴머니즘적으로 볼 때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가시성의 전도를 의미합니다. ‘계몽’의 아름다운 이데올로기 뒤에는 ‘규율’이 있었던 것이죠. 대표적인 공리주의자 중 하나인 제러미 벤담이 판옵티콘을 제안했다는 사실 또한 공리주의의 반자유주의적 역설을 폭로합니다. 계몽주의의 시기에 ‘낮은 곳’으로 향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규율의 시선이었던 것입니다.

판옵티콘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해석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어딜 가도 CCTV가 있고,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은 인터넷과 연동되어 정보화되고 있습니다. 빅데이터는 곧 우리 자신보다 우리에 대해 더 잘 알게 될지도 모릅니다. 헬스케어 산업이 빅데이터와 연동되면 우리의 ‘생명’이 미세한 부분까지 정보화될지도 모르죠. 어쩌면 우리는 판옵티콘이 궁극적으로 실현된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지금의 권력관계는 판옵티콘의 이미지로는 온전히 포착되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함께 읽은 논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지금은 ‘관계의 상호성’과 ‘시선의 편재성’이 더욱 강화되어 있습니다. 인터넷은 판옵티콘보다 훨씬 interactive한 기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방적인 보여짐과 보여지고 있다는 사실의 내면화를 통해 작동하는 판옵티콘과 달리, 인터넷은 기본적으로 비대칭성의 역전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사파티스타’와 ‘아랍의 봄’ 등이 그러한 예가 될 수 있겠죠.

4부로 넘어가면서 제가 새삼 갖게 된 질문은 ‘왜 감옥일까?’였습니다. ‘왜 푸코는 감옥을 중심에 두고 규율권력을 분석했을까?’ 그러나 채운샘의 설명을 듣고 제 질문이 전도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푸코는 ‘규율권력’을 먼저 추상화한 다음에 그것을 보여주기 위한 효과적 수단으로 ‘감옥’을 채택한 것이 아닙니다. 푸코 자신이 밝히고 있는 것처럼 푸코는 ‘현재’에서 출발했던 것이죠. 푸코가 활동했던 시기는 지식이 현실과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였다고 합니다. 푸코는 연구의 소재를 찾았다기보다는 자신을 둘러싼 현실로부터 자신의 연구로 내몰린 것이죠. 저는 ‘푸코는 왜 감옥을 연구했을까?’가 아니라 ‘무엇이 푸코를 감옥에 대한 연구로 내몰았는가?’를 물었어야 했던 것 같네요.

우리 또한 공부가 무력해지지 않으려면 항상 우리의 구체적인 현실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채운샘은 공부가 일상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공부가 일상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공부를 하며 일상을 보낸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겠죠. 저는 이 말씀을 공부와 더불어 일상을 겪어내야 한다는 말로 이해했습니다. 누구나 구체적인 현실을 가지고 있죠. 그러한 현실이 공부의 자극으로 작용하고 또 공부를 통해 현실을 다르게 보는 힘을 갖게 될 때, 공부가 일상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음주에는 《감시와 처벌》을 끝까지 읽고, 평소처럼 요약 글을 써오시면 됩니다(질문을 가져오라는 채운샘의 당부가 있었습니다). 간식은 미영샘과 호정샘이 맡아주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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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1-12 21:45
    무력한 공부 ㅎㅎ;; 슬슬 떠나고 싶네요. ㅋㅋㅋ 저는 푸코 형님이라 부르고 싶은데, 이 분 참 매력적이신 것 같아요. 올해는 플라톤부터 스피노자, 니체에 이어서 푸코를 만나고 있는데, 마지막이어서 그런가 아니면 그만큼 매력적인 건가, 푸코 형님이 참 좋네요. 에세이 주제도 주셨고, 이번에는 푸코 형님에 대한 애정을 글로 잘 표현해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