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M 숙제방

이방인 서평

작성자
윤순
작성일
2017-10-25 21:04
조회
30
절탁M문학/이방인 서평/2017.10.24./윤순

 

감정이 아닌 감각과 닮은 세계

죽음으로 폭발되는 감정

<이방인>의 첫 장면은 엄마의 죽음 소식을 듣고 장례를 지내기 위해 엄마가 계셨던 요양원으로 가는 뫼르소의 모습을 보여준다. 오십이 다 되가는 내 나이 정도의 대부분 사람들은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겪었을 것이다. 나 또한 스물다섯 살 때 그런 경험이 있었다. 내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나를 키워주셨던 할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연락을 받고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정신없이 1시간을 운전해 할머니의 임종을 보러 엄마 집으로 갔었다. 그런데 막상 집에 도착하고 보니 며칠 전부터 위독하시던 할머니 상태가 달라지진 않아서 다시 회사로 돌아가게 되었다. 회사로 가는 중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고, 다시 차를 돌려 할머니에게로 갔다. 나에게 할머니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이제 없어져버린 세계인데도 차 창밖의 날씨는 화창했고, 사람들은 웃고 있고, 코스모스는 길가에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그 때 난 세계가 아무런 일이 없었던 듯이 돌아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나의 머릿속의 세계가 뒤집혀버렸는데 차 창밖은 그대로라는 것을 말이다. 다시는 할머니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었고, 매장을 하는 산에서 내 주의에 날아가는 나비를 보며 나비가 할머니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며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난 할머니가 언제 돌아가셨는지 그 때 내가 얼마나 슬퍼했는지에 대해 까마득히 잊고 살고 있다. 인간의 감정은 시간에 따라 변하는 것인데, 그 감정이 세상의 전부인 것 같은 시기 또한 분명히 존재했다.

<이방인>에서 뫼르소는 요양원에서 살 던 엄마의 죽음 소식을 받고, 버스를 타고 몇 시간 걸리는 요양원으로 향한다. 갑작스런 소식에 검은 넥타이와 상장을 빌려 다음날은 돌아올 계획으로 서둘러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고 뛰어갔다. 너무 서둘러 에너지를 소진한 탓에 버스를 탄 뫼르소는 가는 동안 거의 내내 잠을 잤다. 흔들리는 버스, 가솔린 냄새, 길과 하늘에 반사되는 햇빛은 뫼르소를 졸음으로 이끌었다. 이 세상에서 엄마의 마지막 모습을 보러 가는 길에 뫼르소는 잠을 푹 잤다. 그런 상황에 어떻게 잠이 올까? 엄마와 함께한 기억들이 자기도 모르게 끝없이 머리에 맴돌거나 엄마와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이 자기를 괴롭혀 머릿속이 시끄러워 잠이 들기 어려울 것 같은데 뫼르소는 엄마에게 가는 내내 잤다. 그는 괴롭거나 슬퍼 보이지 않는다. 그의 모습은 그냥 일상적인 일을 하러 서둘러 가느라 피곤해 보인다. 그는 정말 엄마가 돌아가셨는데 아무렇지 않은 것일까? 나에게는 세계가 뒤집혀질 만한 경험이었는데, 그에게 엄마의 죽음이 아무렇지 않았다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마주했을 때 그와 나는 어떤 차이가 있었던 것일까? 뫼르소는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가?

 

감각을 통해 겪는 세계

소중했던 사람의 죽음을 마주했을 때, 나는 살아있을 때 형편 때문에 미루었던 여행에 대한 후회, 돌아가실 때 옆에 있지 못해 마지막을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 매일 보고 싶어 기다리시는 것을 알면서도 바쁘다고 가끔씩만 집에 가곤 했던 내 행동에 대한 자책과 같은 감정적 부채감과 조금만 더 사시지 왜 벌써 돌아가시는가라는 세계에 대한 원망 때문에 괴로웠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대한 슬픔, 후회, 아쉬움, 자책 등의 감정은 당연히 생겨나는 것이지만, 이는 또한 죽은 사람을 잊지 못하게 만들어 얼마간의 사간이 지나지 않으면 사람들로 하여금 혼란과 공항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하는 원인이 된다. 하지만 이것을 안다고 해서 슬픈 감정이 생기지 않게 할 수는 없다. 왜 이런 감정이 생기는지는 복잡한 문제이다.

그런데 <이방인>의 주인공인 엄마의 죽음을 마주한 뫼르소에게서는 이러한 감정을 찾기 어렵다. 뫼르소의 감정 없음은 이런 감정을 느끼는 주변인들에게 이상하게 보이기도 하고, 비난할 대상이 되기도 하고, 그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실제로 뫼르소에게는 엄마의 죽음에 대해 내가 겪는 감정적 동요는 전혀 없었다. 그는 단지 장례과정에서의 실제적으로 벌어지는 시각적이고, 후각적이고, 촉각적이고, 생리적으로 일어나는 현상들을 알아차릴 뿐이다.

 

푸르고 흰 하늘과 갈라진 아스팔트의 끈적거리는 검은색, 걸친 상복들의 흐릿한 검은색, 니스 칠한 영구차의 검은색 등 단조롭기만 한 색깔들 가운데서 나는 정신이 좀 어리둥절해졌다. 햇빛, 가죽 냄새, 영구차의 말똥 냄새, 니스 칠 냄새, 향냄새, 잠을 자지 못한 하룻밤의 피로, 그러한 모든 것이 나의 눈과 머리를 어지럽게 만드는 것이었다.(p23)

 

하늘, 도로, 차, 사람들, 햇빛, 냄새, 피곤 때문에 뫼르소는 어리둥절하고 어지럽다. 그의 생각 어디에서도 엄마에 대한 그리움 또는 엄마와 함께 지내지 못한 자신에 대한 자책이나 엄마가 돌아가신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슬픔은 찾아 볼 수 없다. 감정은 감각으로 느껴지는 실재하는 현상을 놓치게 한다. 하지만 뫼르소는 자신이 감각으로 느끼는 것들에 대한 세밀한 관찰을 엄마의 죽음을 마주하면서도 하고 있다. 그는 이 와중에도 자신의 감각과 욕구에 집중하고 있다. 이러한 뫼르소의 태도는 감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절대 이해할 수 없고, 비난하고 싶은 부분이 된다. 절절한 애도의 감정에 빠져서 세계를 겪는 사람에게는 보고 느낄 수 없는 세계가 뫼르소의 감각에 의해 다른 한 편에서 포착된다. 세계를 감각으로 겪는 뫼르소의 이와 같은 특징은 그의 삶에 방향키로 작용한다.

뫼르소는 정욕을 느끼지만 사랑하지는 않는 마리와의 결혼에 대해 그녀가 원하면 해도 되고 안해도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이웃인 레몽에 대해 좋지 않은 소문을 들었음에도 뫼르소는 자신이 직접 레몽을 만났을 때 특별히 나쁘지 않고 꺼릴 것이 없기 때문에 레몽의 이야기와 부탁을 들어주고 친구가 된다. 뫼르소는 자신의 감각으로 직접 겪는 것 이외에 관습, 소문, 이념, 감정 등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을 빌미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관습, 소문, 이념, 감정으로 관계를 하려는 사람들에게 할 말이 없고, 그들을 불편해 한다. 그는 그들과도 자신이 하는 방식인 감각으로 느껴지는 직접적인 관계만을 하려하고 그들에 의해 설득되지 않고 그들과 분리된 이방인으로 남는다. 그러나 과연 뫼르소가 세계와 분리된 이방인이 된 것일까? 뫼르소 이외의 나와 같은 사람들이 세계와 분리되어 이방인으로 살고 있는 것일까?

 

인간의 감정으로 규정된 세계

뫼르소는 친구인 레몽과 원한이 있는 아랍인을 총으로 죽인다. 뫼르소가 아랍인을 살해한 이유는 레몽을 위해서도 자신을 위해서도 아니고 타는 듯 뜨거운 햇살 때문이라고 한다. 살인으로 재판을 받게 된 뫼르소에게 예심판사는 모두 5발의 총알을 연속해서 발사했는지 한 발을 쏘고 몇 초 후에 다시 네 발을 쏘았는지에 대해 심각하게 질문한다. 뫼르소가 거기에 대해서 아무 대답을 하지 않자 판사는 몹시 흥분한다. 판사는 뫼르소가 사이를 두고 총을 발사한 것에 대한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유를 알고 싶은데 뫼르소가 대답을 하지 않자 되풀이해 같은 것을 묻는다. 모호한 그 이유를 꼭 알아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는 판사에게 뫼르소는 ‘그가 고집을 부리는 것은 잘못이고, 그 마지막 문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나는 그에게 말할까 했다.’(p79) 하지만 판사는 뫼르소의 말을 막으며 십자가를 흔들며 하느님을 믿느냐고 뫼르소에게 물으며 훈계를 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는 뫼르소의 대답에 판사는 ‘그럴 수는 없다고 하며 누구나, 비록 하느님을 외면하는 사람일지라도, 하느님을 믿는 법이라고 말했다. 그것이야말로 그의 신념이었고, 만약 그것을 조금이라도 의심해야 한다면 그의 삶은 무의미해지고 말리라는 것이었다.’(p79) 뫼르소가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고 왜 판사의 삶이 무의미해지는가? 여기에 타인에게 자신의 신념이 지켜지지 않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판사의 세계가 있다. 판사에게 세계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돌아가야 한다. 판사와 같은 사람은 그렇지 못하면 잘못된 세계라고 판단하고 교정하려 한다.

우리는 보통 법정에서 판결난 결과는 법이 기준이 되니까 객관적이고 공정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뫼르소의 재판은 객관적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변호사, 검사, 판사, 배심원 그리고 구경꾼들의 감정의 쏠림으로 법정의 분위기가 변하고, 결과가 예측되고, 필요에 따라 해당자들(검사나 변호사)은 재판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도록 논증을 이끈다. 감정이 재판 결과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았는가를 묻는 질문에 재판을 지켜 본 사람들은 그렇다고 대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뫼르소의 실제 살인죄에 대한 경중에 상관없이 예심 판사에게는 뫼르소가 자신의 죄에 대해 하느님을 향한 뉘우침이 반드시 필요하다. 판사의 종교에 대한 믿음으로 규정된 세계에서 뫼르소의 살인이 감각적 행동일 뿐이라는 것이 허용될 수 없다.

그런데 판사가 만드는 대로 실제로 세계가 그렇게 존재할 수 있을까? 그런 세계는 판사가 규정하는 세상일 뿐이다. 판사가 규정하는 세계에 타인은 그대로 복종해야 하는가? 판사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살고 있고 그에게 전 세계는 그렇게만 존재해야 한다. 하지만 뫼르소가 아니더라도 하느님을 믿지 않는 타인들은 무수히 많이 있고, 그런 타인을 용납하지 못하는 판사는 같은 세계에 살기위해 타인을 협박하기도 하고 회유하기도 하며 자신의 세계에 속하도록 한다. 뫼르소는 판사의 세계에 들어가기를 거부했다. 신념뿐 아니라 감정, 관습, 예의로 규정지어진 세계에 뫼르소는 들어갈 마음이 없다. 그는 사형을 구형받는 처지로 내몰리고 있으면서도 그들에게 아무런 할 말이 없다. 결국 뫼르소는 사형을 받고, 항소를 포기하고, 사형 집행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뫼르소, 감정으로 규정된 세계에서 완전히 벗어나다

기쁨과 분노는 그동안 뫼르소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던 감정이다. 뫼르소는 감각으로 세계와 직접 마주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은 뫼르소와는 다르게 감정을 통해 세계를 인식한다. 이들은 자기와 다른 뫼르소를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뫼르소의 행동을 비난하거나 이상하게 여긴다. 감정적 관계 맺음에 공감하는 세계에 뫼르소가 위치한다. 감각 대 감정의 구도에서 감정 우위의 세계에서 말이다. 자신이 어떻게 하는 것에 상관없이 돌아오는 것은 감정적 비판, 호감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이제 사형수가 된 뫼르소는 공간도 자신이 선택할 수 없다. 주어진 감방, 재판정이라는 공간에서 감정적(법적) 관계만을 강요당한다. 사형이 결정 나고 나서 사형을 기다리는 뫼르소에게 사제는 여러 번 찾아오지만 뫼르소는 사제와의 면담을 매번 거절한다. 마지막 사제의 방문에 뫼르소는 면담에 응하게 되고,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사제와 만난다. 재판 내내 꼭 필요한 자기를 변호해야 하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던 뫼르소가 꺼렸던 사제와의 마지막 면담에서 그동안 마음에 두고 있었던 말을 쏟아 낸다.

나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려놓고 그는 말했다. “나는 당신 편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마음의 눈이 멀어서 그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당신을 위해서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그때, 왜 그랬는지는 몰라도, 내 속에서 그 무엇인가가 툭 터져 버리고 말았다. 나는 목이 터지도록 고함치기 시작했고 그에게 욕설을 퍼부으면서 기도를 하지 말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사제복 깃을 움켜잡았다. 기쁨과 분노가 뒤섞인 채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끼며 그에게 마음속을 송두리째 쏟아 버렸다.(p133)

예정된 죽음을 앞두고 있는 뫼르소에게 죽음에 조차도 자신들이 규정한 믿음을 강요하려는 사제에게 감각으로만 관계하려던 뫼르소는 드디어 분노를 터뜨린다. 뫼르소가 말해도 통하지 않을 것 같던 그들의 세계에 뫼르소는 그들과 같은 방법인 분노와 함께 그동안 자신의 마음에 쌓여 있던 자신이 가진 세계에 대해 모든 말들을 마지막에 만난 사제에게 내뱉는다. 그는 그들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에는 아무런 차이도 찾을 수 없다고. 그리고 사제의 옷깃을 잡고 고함을 치던 뫼르소가 혼자 남게 되었을 때 바로 잠이 들었다. 깨어났을 때에 뫼르소는 자신이 매 순간 감각으로 겪으며 변화하는 것과 같이 세계도 어떠한 인간의 감정으로도 규정될 수 없고 매 순간 그냥 변하는 것임을 밤 냄새, 흙냄새, 소금 냄새로 자신의 관자놀이가 시원하게 되면서 평화로워 지며 깨닫고 확신한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 주고 희망을 가시게 해주었다는 듯,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그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외로움을 덜 느낄 수 있도록,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처형되는 날 많은 구경꾼이 모여들어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p136)

 

감정으로 규정된 세계의 질서에 맞는 뫼르소의 커다란 분노의 발산은 자신이 감각으로 겪은 세계를 부정하는 그들의 세계 속에 살면서 생겼던 고뇌를 해소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세계에서 살아가기를 멈추는 순간 그에게는 어떠한 희망도 필요 없게 된다. 그가 잠에서 깨어나서 본 세계는 감정으로 규정될 수 없다는 것을 무심히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뫼르소는 바로 자신이 살아왔던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방식 즉, 감각으로 직접 겪을 때만 가장 가까이 그 모습이 드러나는 세계를 더욱 확신하게 된다. 자신이 세계의 법칙에 맞닿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엄마의 죽음을 무심하게 받아들이고, 사랑하지는 않지만 정욕을 느끼는 여자와 결혼을 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나쁜 소문이 무성한 이웃을 자신의 친구로 삼고, 살인을 하고 사형을 구형 받았지만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 뫼르소. 세계는 마치 뫼르소가 타인과 나누었던 관계처럼 인간의 어떠한 규정에도 포섭되지 않고 무심하게 존재한다. 인간이 어떻게 살던지 간에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는 자신의 법칙에 따라 돌아가거나 흐르고 있다. 뫼르소는 그런 세상의 법칙에 자기 자신이 가장 닮았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지금 행복을 느낀다. 이제 감정으로 규정된 세계의 사람들이 아무리 많이 증오의 함성을 지르며 자신의 죽음을 구경해도 자신이 세계의 법칙과 닮아 있다는 확신은 더욱 강해져서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예정된 죽음에서 구경꾼들의 증오의 함성이 크면 클수록 그가 세계와 닮았다는 확신을 증명하는 것과 같다.

한 인간이 죽을 때 인간 사이에서는 삶에 대한 탐구가 가장 크게 일어난다.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탐구가 일어난다. 뫼르소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지만 이것을 깨닫는 순간 세계와 가장 가까이 닮은 자신의 현재를 기뻐할 수 있고 행복하다고 느낀다. 뫼르소는 그 이외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이방인이겠지만, 자신이 닮았다고 생각하는 세계에서는 가장 적합한 사람일 것이다.

나는 뫼르소와 같은 세계를 갖지 못했다. 나를 중심으로 하는 나의 감정으로 규정된 세계에서 소중한 사람의 죽음 또는 나 자신의 죽음은 나의 세계를 깨지게 하는 것이 된다. 이런 사람이 깨지지 않게 하려 발버둥 친다는 것이 ‘소중한 사람이 죽으면 안 되고 내가 죽으면 안 되고 라든지 죽거든 천당이나 천국으로 가게 해 주세요’라고 빌고 바라는 것이다. 아직까지 나는 감정으로 규정된 세계에서 살고 있다. 뫼르소와 달리 세계를 규정하며 세계가 내가 규정한 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두려워하고 원망하는 감정 속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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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0-27 14:30
    마지막 장면의 '증오의 함성'을 뫼르소가 느끼는 생의 환희와 대립하는 것으로, 그러면서도 생의 의지를 더 확인시켜주는 것으로 보셨습니다. 그렇다면 뫼르소는 시종일관 감각적 차원의 세계에만 집중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뫼르소는 갑자기 '죽음'의 문턱을 만나 깨달음을 얻었다고만은 볼 수 없는, 생각의 여러가지 전개 단계를 밟기도 합니다. 다음의 두 개의 질문도 덧붙여 봅니다.

    (1) 작품 속에 나오는 죽음의 의미가 다 같은가? 각각의 '죽음'이 갖는 역할과 의미의 차이는 무엇인가?

    (2) 마지막 장면의 핵심이 '뫼르소가 죽음을 앞두고 있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