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내어 읽는 니체

소니 도덕의 계보 두번째 시간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9-03-22 21:31
조회
115
간신히 세미나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소니’도 이렇게 막을 내리는 건가, 생각하던 찰나 선희샘께서 신청해주시고 마지막 순간에 한역샘께서도 합류해주신 덕분입니다. 서로의 존재가 서로에게 베푸는 덕이라는 게 이런 걸까요ㅋㅋ. 아무튼 이제 멤버가 네 명이 된 만큼, 한 명이라도 빠지면 안 되는 세미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다들 지각, 결석 절대 안 됩니다! 이번 주에는 《도덕의 계보》 서문과 1논문 전반부를 읽고 이야기 나눴습니다. 짧은 분량임에도 이야기할 거리는 많았죠. 자기인식, 계보학, 동정, 민주주의 등 다양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니체의 텍스트에는 항상 우리가 해석해야 할 여백들이 함축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건 아포리즘적인 문체의 탓이기도 하지만, 니체의 사유가 그런 문체로밖에는 표현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도덕의 계보》는 니체의 다른 책들보다 훨씬 더 명료한 문체로 일관된 주제에 관해 서술하고 있는 책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해석을 요하는 여백은 곳곳에 감추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선희샘이 말씀하신 것처럼, 각각의 문단이나 절들은 이해가 되어도 그것들이 어떻게 그다음 문단과 그다음 절으로 이어지는지가 불분명한 것이죠. 사실 서문의 맨 처음 부분부터가 제게는 그랬습니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이방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혼동하지 않을 수 없다. (…) 우리 자신에게 우리는 ‘인식하는 자’가 아닌 것이다……”(니체, 《도덕의 계보》, 서문 中)

저는 한 동안 이 부분이 이해가 안 됐습니다. 니체는 다짜고짜 ‘너는 너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라고 말합니다. 왜 일까요? 도덕의 가치와 기원에 대해 말하는 논문의 서두에서 왜 ‘자기 인식의 불가능성’이라는 문제가 거론되어야 하는 걸까요? 이번에 읽으면서 조금 감을 잡게 된 것은, 이 부분이 니체가 도덕의 문제를 어떤 층위에서 논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구절이라는 것입니다. 니체는 ‘인식하는 나’의 확실성을 부정합니다. 인식 주체(코기토)의 확실성을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았던 이전의 형이상학과 달리, 니체에게는 인식 주체야말로 더 없이 의심스러운 범주였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나 자신’이라고 믿고 있는 것을 의심하는 것, 너무나 확실해서 의심해볼 필요성조차도 느끼지 않는 자명성을 낯설게 보는 것이 니체가 시도하고자 했던 일이 아닐까요? ‘우리가 우리 자신에 이르게 되는 것은 혹시 특정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형성된 가치의 구도를 내면화함으로써가 아닐까?’라는 것이 ‘자기인식의 불가능성’에 대해 말할 때 니체가 던지고 있는 질문이 아닐까요? 그러니까 니체에게 도덕을 비판한다는 것은 자기 확실성과 싸우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니체는 영국의 도덕 심리학자들처럼 자신의 공리를 절대화해서 푸른 하늘을 해매는 것 같은 투명하고도 공허한 가설을 만들어내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이겠죠.

니체는 “싸움을 바라보는 자도 싸움에 가담해야 한다는 것”(《비극의 탄생》 中)이 ‘싸움의 마법’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도덕의 계보》에서 펼쳐지고 있는 니체의 싸움을 읽어내는 일이, 우리에게도 자기 확실성과의 싸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민주주의’, ‘공리주의’, ‘약자에 대한 연민’, ‘이타적인 것으로서의 도덕’ 등등 여전히 우리가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가치들에 대한 니체의 비판을 우리의 현재적인 문제로 가져와서 고민해보면 좋겠죠.

다음주에는 《도덕의 계보》를 405쪽까지(2논문 5절까지) 읽고 만납니다. 간식은 한역샘께서 준비해주시기로 했습니다. 정해진 분량을 천천히 읽고 질문이나 함께 나누고 싶은 주제를 정리해오시면 됩니다. 그럼 다음주에 뵐게요 :)
전체 1

  • 2019-03-23 10:06
    ㅎㅎ 간신히나마 시작할 수 있었다는데 의의를 둡니다. 그래서 많이 읽고 많이 얘기할 수 있어 좋기도 합니다.
    근데 한역샘은 자발적 참여 맞는 거죠, 그럼요 룸메이기 때문만은 아니걸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