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내어 읽는 니체

소니 도덕의 계보 세번째 시간(4.2)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9-03-30 12:04
조회
131
“‘출신이 좋은 사람들’은 스스로를 ‘행복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 그와 같이 그들은 힘이 가득 넘쳐나는, 따라서 필연적으로 능동적인 인간으로, 행복과 행위가 분리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니체, 《도덕의 계보》, 책세상, 369쪽)

우리는 주로 행복을 어떤 상태와 동일시합니다. 모든 것들이 자신에게 우호적으로 작용하는 어떤 상태, 혹은 몇몇 조건이 갖추어진 상태에 대한 표상을 만들어내고 거기에 도달하고자 하죠. 우리에게 행복이란 대개 고통이 제거되고 모든 것이 갖추어진 미래에 대한 환상이나, 좋았던 옛 시절에 대한 회상, 어떤 편안하고 안락한 상태에 대한 기억 같은 것들이 아닌가요? 이러한 행복에 대한 표상은 어느새 현재를 결여로 채우고 비난하고 평가절하하게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모든 이질적이고 낯선 것들은 ‘행복’을 방해하고 위협하는 부정적인 외부 요인으로 간주되죠. 그런데 언제나 행위와 삶은 이러한 낯설고 이질적인 것들과의 마주침을 동반합니다. 때문에 필연적으로 특정한 상태와 동일시된 행복, 표상으로서의 행복은 행위와 삶에 적대적이게 됩니다.

그런데 니체가 말하는 귀족들에게는 행위와 행복의 이러한 분리가 없었다고 합니다. 스스로를 행복하고 고귀한자로 느끼는 이들은 자신들의 고귀한 행위 속에서 행복을 느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우리는 또 곧바로 행위와 행복을 분리시켜서 생각합니다. 행위가 만들어낸 만족스러운 결과 때문이거나 그 행위가 어떤 외부적 척도에 일치하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또다시 분리를 만들어내는 것이죠. 그러나 고귀한 자들에게는 고귀한 행위 그 자체가 곧 행복이었습니다. 고귀한 자로 존재한다는 것과 고귀한 행위를 한다는 것과 스스로를 행복한 자로 느낀다는 것이 동시적이었던 것이죠. 때문에 이들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강함과 고귀함을 두드러지게 할 수 있는 존경할 만한 적을 요구하게 됩니다. 이때 적이라는 말을 좀 더 확장해서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고귀함을 실험하기 위한 것으로서 자신의 안정된 상태를 깨는 이질적이고 낯선 힘들을 필요로 했던 것이죠. 이것이 고귀한 자들이 삶을 긍정하는 방식입니다. 행위와 행복의 일치!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인가요?

“아, 이성, 진지함, 감정의 통제, 숙고라 불리는 이러한 음울한 일 전체, 인간의 이러한 모든 특권과 사치 : 이것을 위해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지불했단 말인가! 모든 ‘좋은 것’의 근저에는 얼마나 많은 피와 전율이 있단 말인가!……”(니체, 《도덕의 계보》, 책세상, 402쪽)

2논문의 초반부에 대해서도 이야기 나눴습니다. 여기서 니체는 ‘양심의 가책’에 대한 계보학적 탐구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이번 주에는 이 문제를 바라보는 니체의 관점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니체의 ‘역사적인’ 관점입니다. 니체가 보기에 ‘죄’, ‘양심’, ‘의무’, ‘의무의 신성함’ 같은 도덕적 개념들은 결코 ‘자연스럽게’ 발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넌 양심도 없냐?’라고 물을 때 우리는 ‘인간이라면 자고로’ 지니고 있어야 할 어떤 보편적이고도 자연스러운 감정에 호소합니다. 그러나 니체가 보기에 그 자체로 주어져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명한 것으로서의 ‘양심 그 자체’란 없고, 특정한 역사적 과정의 산물로서의 기독교적 양심의 가책이 있을 뿐인 것이죠.

양심의 가책의 기원을 논하기 위해서 니체는 공리나 본성 같은 미심쩍은 개념들에 의존하는 대신, ‘기억술의 발명’이라는 문제로부터 논의를 시작합니다. 인간이 양심의 가책을 갖기 위해서는 우선 기억할 수 있고 약속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져야 했다는 것이죠. 그리고 기억하고 약속할 수 있는 이성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인간의 신체를 특정한 방식으로 길들이고 훈련시키는 과정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이 니체의 생각입니다. 인간은 이성을 내장하고 있는 존재가 아니며, 우리가 이성이라고 부르며 찬미하는 것이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에는 상상할 수 없이 많은 ‘피와 전율’이 있었다는 것. 저는 이 대목에서 푸코가 떠올랐습니다. 푸코 또한 신체에 주목합니다. 푸코는 근대적 주체의 탄생을 신체를 길들이고 제조하는 새로운 ‘신체의 정치적 기술론’과의 관계 속에서 서술합니다. 그에 따르면 ‘정신(영혼)’은 “정치적 해부술의 성과이자 도구”이며, 그런 점에서 신체의 감옥입니다.

이번에 읽은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니체가 ‘채무법’을 양심의 가책이라는 도덕적 개념의 발생지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앞으로 양심의 가책에 대한 어떤 위험한 통찰이 이어질지 궁금합니다. 다음 주에는 《도덕의 계보》를 440페이지까지 읽고 만납니다.
전체 5

  • 2019-03-30 15:55
    고귀한 자들에게는 고귀한 행위 자체가 곧 행복..
    나름 열심히 읽는다고 하고 있지만 건화샘께서 쓰시는 후기 보고 다시 공부합니다 ~
    다음주에 못 가게 되어서 너무 죄송합니다
    제가 한번 시작한 일은 대충 하는걸 싫어하는데 어쩔수 없는 일도 생기네요 ㅠ
    책은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사실 이번 분량에 대한 간단한 글이라도 써서 보낼까 했는데 건화샘 후기보고 멈칫했어요 ^^;;;;
    저는 9일 푸짐한 간식과 함께 가겠슴다~

    • 2019-03-30 19:29
      선희샘~ 전화도 주시고 댓글도 남겨주시고, 마음쓰고 계신 게 전해집니다ㅎㅎ 글 써서 보내주세요! crash3426@naver.com 소니 숙제방에 올려주시면 더 좋구요~
      그럼 다다음주에 뵙겠습니다!

  • 2019-04-01 09:34
    인원수가 적어서인지 건화샘보다는 아니겠지만, 저도 세미나에 중요한 일부라고 느낍니다.
    그리고 오전에 공부 기회가 생겨 너무 좋아요.
    계속 오전 시간 공부가 개설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더 열심히 하고 싶습니다^^

    • 2019-04-02 13:54
      선희샘 없으셔서 저희 셋이 수건돌리기 하듯 숨가쁘게 읽었습니다ㅠㅠ 다음 주에 꼭 뵈요~

  • 2019-04-02 18:38
    네에~~~^^
    다음주에 반드시 가겠습니다 경아샘
    다음주에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