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카프카

11.23 공지~

작성자
손지은
작성일
2017-11-16 20:03
조회
75

- 이번주 읽은 작품들

<카프카 작품 속에 나타난 희망과 부조리>, 시지프 신화, 까뮈

<카프카의 소묘>, 프리즘, 아도르노

<프란츠 카프카에 대한 재평가>, 이해의 에세이, 한나 아렌트

<법 앞에서>, 문학의 행위, 자크 데리다

<조수들>, 세속화 예찬, 조르주 아감벤

<오드라텍의 세계>행간, 조르주 아감벤




# 부조리

까뮈는 카프카의 작품 속에 부조리성과 위대함이 깃들어있다고 평했습니다. ‘부조리성’이 무언지 정확히 언급하진 않지만 카프카의 작품들을 통해 추측해볼 수 있을거 같아요. <변신>에서 잠자는, 육체는 벌레인데 정신은 출근 준비를 하려고 합니다. 육체가 경험하는 것과 의식이 구성되는 것이 달라서 조화롭지 않지요. 까뮈는 아마도 이 현대 세계가 그런 부조리함을 경험하게 한다고 본거 같아요. 세계는 비합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삶이란 이해할 수 없는 것과 직면하는 것, 까뮈는 이를 직시한 사람을 두고‘실존주의자’라고 부릅니다.

대부분의 실존주의자들은 자신이 당면한 비극에 집중해서 절망한다고 해요. 카프카가 특이한 점은 이 부조리 속에서도 희망을 본다는 점이래요. 비탈길에서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굴려 올리는 행위가 무한히 반복되는 것처럼(시지프스), 부조리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면 삶은 의미나 이유가 이유가 없습니다. 어쩌면 질서 전체가 부조리하지요. “신을 이해하게 됐다”는 건, 이 세계 전체가 부조리함을 깨닫고 그것을 껴안는 일입니다. 그것은 지금 이 조건 자체를, 삶 전체를 긍정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그들은 자신을 잡아 삼키는 신을 얼싸안는다. 희망은 바로 굴종을 통해서 스며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존재의 부조리성은 그들로 하여금 초자연적 현실을 더욱 확신케 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승의 삶의 길이 신에게 가닿는다면 그때는 해결책이 있는 셈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 속에 나타난 희망과 부조리>, <시지프 신화>, 까뮈, 206쪽)

놀라운 점은 카프카가 그 반복 속에서 신을 발견했다는 점입니다. 카프카의 작품 속 인물들은 문지기가 막는데도 계속 법 안쪽을 서성이고, 성으로 갈 수 없는데도 계속 시도합니다. 안되는걸 하면서도 멈추지 않는건 자유의 또 다른 이미지를 보여줍니다. 이렇게 까뮈는 카프카의 작품을 반복의 구도로 해석하고, 거기서 희망이라는 키워드를 뽑아내지요.


# 상징과 비유

까뮈는 카프카를 ‘상징’으로 해석하고, 아도르노는 카프카를 ‘비유’로 해석한다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짚어보는 시간을 가졌어요. 상징과 비유는 둘 다 언어의 지시적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상징’은 (외판원이랄지 비정규직 등과 같이) 문화적 체계를 가지고 있는, 그 문화권 안에서만 이해되는 것을 말합니다. 한편 ‘비유’는 원래 쓰는 맥락과는 다르게 사용하는 것을 말하지요. 아도르노가 카프카를 ‘비유’라고 본 것은 친구이자 스승인 벤야민에게서 빌려온 말이예요. ‘열쇠가 사라진 비유문학’이란 표현은, 카프카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뭔가를 지시하는 것처럼 쓴거같은데, 작품 안에서 그게 무엇을 지시하는지 찾을 수 없는, 열쇠 없음을 말합니다. 그런면에서 카프카의 언어는 해석의 지평을 갖고 있지 않지요. 카프카를 초현실주의에 빗대어 표현한 것은 현실에서 사용하는 맥락과 다른 사용으로 언어를 구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 카프카와 프로이트

아도르노, 아감벤, 데리다 등 몇몇의 철학자들이 왜 카프카와 프로이트를 연결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요, 아도르노의 이야기에서 힌트를 얻어 토론해보았습니다. 아도르노는 카프카의 예술이 “단지 현실의 쓰레기로부터 제조해냄으로써 오랜 규칙을 위반한다.”고 말합니다. 정신분석 또한 쓰레기를 가지고 연구하지요. 의미의 쓰레기, 의식의 잉여, 무의식을 붙잡아서 정신분석으로 연결한다고도 할 수 있지요. 카프카는 그걸 가지고 예술을 하고요. 다만 카프카에게 그것은 억압된 것이 아니라 현실을 재구성하기 위한 재료일 따름입니다. 현실의 재구성, 이걸 ‘재활용’이라고 표현하니 꽤 명쾌하지요. 카프카에겐 실로 바깥이 없고, 주어진 세계가 전부입니다. 그 속에서 있는 걸 새로이 구성하는, 재활용하는 일이 전부이지요. 그래서 카프카에겐 신비적인 요소가 없어요 ㅎㅎ


# 밀폐적 주체, 사물화된 존재, 무역사성

들뢰즈는 카프카를 내재성의 철학자로 평가합니다. 그걸 아도르노는 ‘밀폐된 주체’라고 표현한 듯해요. 밀폐되어 있다는건 바깥이 없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을거 같아요. 아도르노는 이 밀폐된 주체가 ‘존재한다고 할 수 없는 주체’라고 해요. 왜냐하면 ‘강압적 계기들로 인해 분해되고 자신과의 동일성을 상실한’ 주체이기 때문에.

오드라데크를 떠올려보면 이 세계의 어떤 것과도 관계맺을 수 없는 물건같은 모습입니다. 사물화된 존재인 오드라데크에게는 시간이 흐르지 않아요. 시간이 흐른다는건 외적 대상에 반응해서 바뀌고, 반응치가 누적되어가는 과정인데, 카프카 작품 속 존재들은 시작이 어디고 종점이 어디인지를 추적할 수가 없지요. 이야기 속에서 어떤 주체는 어떤 계기를 통해 성장하는게 아니라, 아무런 궤적도 그리지 않고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고 말지요. 그것을 ‘인간을 통과해 인간 아닌 것으로 탈주하는’ 과정으로 해석하기도 하고요.


# 관료제

카프카의 작품은 정말 아리송하지요. 그럼에도 왜 사람들은 카프카의 작품에 드문 드문 공감하는걸까요? 카프카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비현실성과 현대성이라는 인상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니샘은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셨어요. “현상으로서의 세계를 묘사하는 데 대한 그의 관심의 부족과 외면적인 상황에 대한 완전한 무시가 결합되어 그 기능에 가장 큰 관심을 가졌기 때문(<프란츠 카프카에 대한 재평가>, 한나아렌트, 157쪽)”이라고요. 아렌트가 보기에 카프카의 주요 주제는 ‘조직의 구성, 조직의 기능’입니다. 조직은 다른 말로 하면 운명이고, 역사이자, 신의 의지, 필연성 전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렌트에게 <심판>과 <성>은 관료제에 대한 고발로 보입니다. 한나 아렌트는 카프카를 ‘관료제’로 풀며 이렇게 말합니다. 카프카는 어디에도 허락을 묻지 않고 인간의 권리를 구축하고자 한다고요. 실로 카프카의 세계에서 구축은 완료를 모릅니다. 파괴와 구축이 동시적으로 진행되는 운동! 아렌트가 본 카프카는 참으로 씩씩하네요 :)


# 규범(언어)의 허구성

데리다는 카프카의 <법 앞에서>를 놓고 이렇게 물어요. <법 앞에서>라는 제목이 있고, '카프카'라는 저자가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이걸 제목이라 생각하고, 카프카를 저자라고 생각하는가. 여기에는 이야기 일반이 지닌 어떤 규약이 있지요. 이 둘이 연결되는건 암묵적 약속에 의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법>은 하나의 말입니다. 금지의 말. 이것은 할 수 있고, 저건 할 수 없어- 라고 하는 건 진리가 아니라 ‘언어적 진리’일 뿐이지요. 데리다는 카프카의 이야기 구조를 통해, 내용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는걸 보여줍니다. 법의 권위란 아주 허구적인 틀에서 만들어진 것임을 증명하지요.

<법 앞에서> 시골의사를 막아서는 것은 법이 아니라, 법의 졸개의 졸개의 졸개의 졸개입니다. 시골사람은 그를 통해 왜 법이 필요한지 그 역사도 알 수 없고, “이건 너만을 위한 문”이라고 할 때 그게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보편인지 자신에게만 해당하는 개별인지 알 수 없습니다. 개인은 법에 참여할 수 없고, 질서 자체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지요. 헌데 그 허구적 장치 속에서 법을 직접적으로 보지 못하는 것은 시골사람 뿐만이 아닙니다. 문지기 역시도 법과 간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을 뿐이지요. <법 앞에서> 첫문장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법 앞에 문지기가 서있다." 우리는 늘 법이라는 허구를 바라보고 법 앞에 서있는 존재들입니다. 헌데 그 법이란 그저 약속의 그물일 뿐입니다. 시골사람도, 문지기도 <법> 앞에, 법에 우선하여 존재하지요.


# 이중구속

데리다는 <법 앞에서>를 ‘이중구속’으로 해석합니다. 이중구속이란, 두 개의 명령이 서로 모순되서, 그걸 실행할 수도 없고 무시할 수도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가령 “집에 들어오면 죽을줄 알아”라는 말은 ‘집에 들어와’란 명령과 ‘죽이겠다’는 명령이 동시에 작동합니다. <법 앞에서>도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들은 법에 들어올 수 있어”라는 말과 “그런데 지금 너는 안돼”라는 말을 동시에 함으로써 아무런 결정도 하지 못하게 만들지요. 카프카는 이런 모순 속에서 법 근처를 탐색하며 자율적인(?) 관계를 만들어내지요.


# 조수들

아감벤이 카프카의 ‘조수들’을 다룬 것은 참말 흥미로웠어요. 그에 덧붙여 지금까지 한 쌍으로 움직였던 카프카의 조수들을 떠올리고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지요. <성>에 나오는 조수들만이 아니라, <유형지에서>의 죄수와 간수, <시골의사>의 두 마리 말, <독신자>의 두 개의 공 등.. 쌍으로 움직이는 조수들이 있습니다. 조수들은 방향이랄게 없고, 목적으로 수렴되지 않는 다른 동기들, 다른 욕망들로 움직이지요. 아감벤의 말처럼 ‘우리 자신에게도 고백하지 않은 욕망’, 하지만 우리를 늘 따라다니는 욕망처럼요. 조수들에 대해서도 더 연구해보면 재밌겠지요.


# 오드라덱

아감벤의 또 다른 글은 ‘오드라덱’에 대한 것입니다. 카프카의 작품을 전혀 언급하지 않은채로 이렇게 카프카를 잘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 놀랐습니다.(아감벤의 문체란!) 아감벤에 따르면 오드라덱은 주물과 유사합니다. 오드라덱의 중요한 특징은 기원과 목적이 없는 것이지요. 목적을 가지지 않는 존재는 왜 중요할까요? 세상은 다 목적을 중심으로 돌아가니까. 헌데 우리는 어떤 목적이나 사용가치만을 위해 물건을 갖고 있지는 않지요. 도구적 기능이 아닌, 아무런 쓸모 없이도 좋은 것이 있지요. 가령 장난감 같은것. 그것은 예술가의 역할과 많이 겹칩니다. 예술가는 사용가치와 무관한, 교환가치 혹은 ‘가치의 가치’ 자체에 주목합니다. 예술가는 상품가치에 대한 반대항으로 그 질서를 깨뜨리는 곳에서 끝나지 않아요. 예술가 스스로 상품이면서 상품이 아닌 때까지 밀어붙여서 소유와 무소유, 목적과 무목적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곳에까지 이릅니다. 스스로 제작자이면서 동시에 장난감과 다름없는 비인간적인 곳까지 가지요.

카프카는 어떤 문제의식으로 비인간을 출현시키는걸까요. 어떤 물건이 제 목적이 아닌 다른 기능을 할 때, 장인과 예술가의 구분이 없어집니다. 예술은 이제 원래의 (쓸데없는) 기능을 가지고 시장을 공격합니다. 상품의 맨얼굴을 보여주면서 시장질서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지요. 원래 아무 사용가치가 없었고, 하나의 목적에만 봉사하는게 아니었다는걸 보여줍니다. 예술가 스스로 자기를 상품으로 만듦으로써, 상품가치가 아닌 교환가치로 시장에서 존재할 수 있도록 시장을 교란시키는 거지요. 그런 점에서 ‘교환가치’란 맥락을 바꿔 쓰는 것이라 할 수 있어요. 아감벤이 이와 연결해서 설명하는 것은 ‘댄디’입니다. 댄디는 세상을 초월한 듯, 관조적으로 돌아다니는 존재들입니다. 시장의 논리로 설명 안되는 존재들이지요. 비인간의 형상이란 이런 사물화를 말하고, 예술의 목적은 그것을 구현하는 것이라 합니다.


카프카를 사랑한 철학자들.. 어려웠지만 보지 못했던 시각으로 카프카를 만날 수 있어 흥미진진한 시간이었어요~~! 이번주 후기는 지니샘~ 다음주 간식은 제가 준비할게요.

다음주에는 에세이 초고를 준비해옵니다. 추운데 감기 조심하시구요, 다음주에 만나요~~ ^^
전체 1

  • 2017-11-18 17:44
    이번 주에 읽었던 모든 글이 어려웠지만, 저 위대한 지성들이 카프카를 사랑했던 이유는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 주어진 세계에 대한 카프카의 치열한 사랑! 부조리함과 모순을 껴안고, 어떻게 해서든 자유와 구원을 찾으려는 카프카식의 투쟁! 여기에 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죠. 이번에 충분히 이해할 수 없었던 대목들은 카프카를 더 열심히 읽으면서 다시 풀어보기로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