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인류학 숙제방

동화인류학 1탄_『안티 오이디푸스』와 가족잔혹사_ 동화세미나(3); 아버지가 이상해

작성자
김현정
작성일
2017-10-26 19:14
조회
87
별별털북숭이 & 채봉감별곡

이번 주, 아버지와 관련해서 선정된 민담들을 읽다보니, 새삼 떠올리게 되는 말이 있다. ‘무의식은 인칭을 모른다’는 것이다. 즉, ‘욕망은 주체 안에 있지 않고, 욕망 안에 기계가 있다.’『안티오이디푸스』, p479 아버지와 딸이 갖는 역사적, 사회적 관계의 맥락은 증발하고, 그로부터 연유하는 호칭도 무의미해지고 있다. 단지 생물학적인 남성성과 여성성만 남아있는 듯하다.

특히「별별털북숭이」에서 아버지와 딸의 관계가 그러하다. 황금색 머리털을 가진 아름다운 왕비가 죽자, 왕은 ‘죽은 엄마와 꼭 같이 아름다웠고 머리칼도 황금색’인 공주인 딸에게 ‘격렬한 사랑’을 느낀다. 그리고 신하들이 ‘아버지가 딸과 결혼하는 것은 하늘이 금하는 죄’라고 말려도 딸과의 결혼을 선포한다. 죽은 왕비에 대한 왕의 성적 욕망이 그와 똑같이 닮은 공주인 딸에게 투사된 듯이 보인다. 그런데 왕의 성적 욕망은 ‘황금색 머리털’을 매개로 일어나며, 페티시스틱fetishistic하다. 이는 욕망기계의 ‘흐름들은 부분대상들에 의해 생산되며, 다른 흐름들을 생산하는 또 다른 부분대상들에 의해 부단히 절단되고, 또 다른 부분대상들에 의해 재절단된다.’『안티오이디푸스』, p29 는 구절을 찾아보게 한다. 이렇게 보면, 왕은 애초에 왕비를 사랑했다기 보다는 ‘황금색 머리털’을 욕망했다고 보는 게 맞을 듯하다. 왕의 욕망의 흐름은 ‘황금색 머리털’을 절단, 채취하여 ‘섹스기계’와 연결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왕의 섹스기계는 더 이상 자신의 흐름을 계속하여 다른 부분대상을 재절단, 채취하지 못하고, ‘황금색 머리털’에 고착된 듯하다. 이는 ‘황금색 머리털’에 대한 편집증적인 집착으로 나타나서, 급기야 딸에게까지 성욕을 느끼게 만든다.

이에 ‘딸은 아버지의 결정을 듣고 더더욱 놀랐다.’ 사회적 관습과 통념에 어긋나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으니 당연히 놀랄 수밖에. 그러나 이러한 의식적 차원에서 이해보다는 무의식적 차원에서의 접근이 우리가 원하는 것일 터. 공주도 그러했던 듯하다. 딸과의 결혼도 서슴지 않게 만드는 아버지인 왕의 성적 욕망을 직관적으로 파악하여 그 욕망을 바꿔 보려고 한다. ‘황금머리털’에 대한 아버지의 고착된 성적 욕망을 ‘황금머리털’의 ‘황금’처럼 빛나는 옷으로, ‘머리털’ 같은 모든 짐승의 털가죽 망토로 분해하여 흐르게 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실패하자 도망을 간다. 왜였을까? 공주의 성욕기계는 아버지인 왕에게서 그 부분대상들을 찾아낼 수 없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분명해 보이는 것은 공주의 성욕은 ‘황금머리털’에 끌리는 아버지인 왕에게로 향하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공주의 섹스기계는 털 망토와 검댕칠 사이에 드러난 ‘하얀 손가락’에 끌리는, 숲의 주인인 왕에게 연결되고 있다. 아마도 공주는 ‘황금머리털’에 자극된 위압적이고 거친 ‘야성미’보다는, ‘하얀 손가락’에 자극된 섬세하고 우아한 ‘지성미’에 성적 욕망이 흐르는 인물은 아니었을까?

「채봉감별곡」에서도 아버지와 딸, 부모와 딸의 관계를 지칭하는, 호칭 이면에서 작동하는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여기서는 아버지, 김 진사는 딸인 채봉의 미모를 절단, 채취하여 자신의 권력욕에 연결시키고 있다. 즉, 자신의 과천 현감 벼슬을 위해서 딸을 허 판서의 첩으로 들이려 하는 것이다. 그리고 김 진사의 이런 권력욕은 자신이 살고 있던, 위계화된 사회질서를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이런 위계화된 질서는 가족관계 내에서도 딸의 의사를 무시하는, 부모의 명령과 강요로 고스란히 이어지게 된다. ‘사회적 투자들은 가족적 투자들보다 먼저요, 후자는 전자의 적용 내지 복귀에서만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안티오이디푸스』, p461 이런 위계화된 질서와 권력지향적인 사회적 코드는 김진사로 하여금 이런 생각을 하게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채봉이는 본디 됨됨이가 녹록지 않아 부잣집 첩 아니면 재취 자리로 시집을 보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럴 바엔 애초에 재상집 첩으로 주어 호강이나 시키고 자기는 그 덕에 이를테면 임금님 가시아비 부럽지 않게 벼슬이나 실컷 얻어 하는 것이 상수였다.’ 그리고 처음에는 남편의 결정에 반대하던 어머니 ‘이 씨도 차츰 귀가 솔깃해지더니 영감이 감사, 참판을 하고 자기가 정경부인이 된다는 말에 마음이 누그러’든다. 그리고 욕심에 눈이 어두원진 김참봉은 딸에게 묻는다. ‘아가, 너 재상집 소실이 좋으냐, 어염집 아낙네가 좋으냐?’ 그러나 채봉은 이런 위계화된 사회적 코드와 영토성으로부터 탈주를 감행한다. 이 또한 「별별털북숭이」속의 공주처럼 채봉의 욕망이 ‘장필성’에게로 흐르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리하여 채봉은 스스로 기생이 되기도 하는 우여곡절을 겪는다.

그런데 채봉의 탈주는 공주보다 더욱 과감하다. 공주의 욕망은 아버지 왕을 거부하고, 숲속의 왕을 선택하는데, 이는 권력 내에서 이뤄지는 인물의 교체에 불과하다. 반면, 채봉의 욕망은 허 판서라는 권력자체를 부정하며 이방 필성으로 흐르면서, 코드화된 권력 자체를 아예 분쇄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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