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king Monday

<천개의 고원> 읽기 시즌 1 - 1강(06.03)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9-06-05 20:46
조회
237
1. ‘고원’이란 무엇인가?

‘《천 개의 고원》 읽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규문에 온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채운샘의 《천 개의 고원》 강의를 한 번 들었는데, 그때 너무 흥미진진하게 들었던 기억이 있어서 이번 강의도 내심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철학하는 월요일’ 강의를 통해서는 뭐랄까, 《천 개의 고원》 자체를 꼼꼼히 이해하게 된다기보다는 지금 하고 있는 다른 공부들이나 고민들에 자극과 영감을 받게 되는 것 같아요. 이번 강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원이 뭐지?’ 생각해보니 예전에 《천 개의 고원》을 읽을 때에는 이런 기본적인 질문을 생략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의 정상이 중심이 되는 산이 아니라, 높낮이가 서로 다르고 모양도 제각각인 지층들이 펼쳐져 있는 고원의 이미지를 상상하고 말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고원’에 해당하는 프랑스어 'Plateaux'에는 사실 쟁반, 판, 생피 세포의 가장자리 등 많은 뜻이 있다고 합니다. 그 중 어떤 번역이 절대적으로 옳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들뢰즈-가타리는 이 ‘고원’이라는 개념을 그레고리 베이트슨의 《마음의 생태학》에서 훔쳐왔다고 직접 언급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를 참고한다면, 들뢰즈-가타리가 어떤 관점에서 고원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지를 이해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레고리 베이트슨은 발리의 문화를 연구하며 ‘고원’이라는 말로 그 문화의 독특성을 표현했다고 합니다.
“발리의 음악, 연극, 그리고 다른 예술의 형태는 일반적으로 클라이맥스가 없다는 점이 특징이다. 음악은 일반적으로 음악의 형식적인 구조의 논리에서 도출된 진행을 가지고 있으며, 강도의 변화는 지속 시간과 이 형식적 관계에서 성립하는 진행에 의해 결정된다. 또한 근대 서양 음악의 상승하는 강도와 클라이맥스와 같은 것은 갖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형식적인 진행을 가지고 있다.”(그레고리 베이트슨, 《마음의 생태학》, 216쪽)

그레고리 베이트슨이 발견한 발리 문화의 특징은 ‘클라이맥스’가 없다는 점입니다. 음악과 연극을 비롯한 예술 전반에서와 마찬가지로, 발리 사람들이 서로 관계 맺는 방식에서도 이러한 특징이 드러납니다. 발리의 엄마들은 아이의 음경을 잡아당기거나 자극하는 방식으로 아이와 가벼운 희롱을 나눈 뒤, 아이가 클라이맥스에 도달하며 엄마를 안으려 하면 엄마는 딴청을 하거나 다른 아이와의 접촉을 자랑합니다. 아이가 이런 장난에 의해 길들여지게 되면 “지속적인 강도의 고원이 클라이맥스를 대체”하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분쟁을 처리하는 발리 사람들의 기술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나타나는데, 싸움의 당사자들은 자신들의 싸움을 공식화한 뒤, 감정을 터뜨리거나 섣불리 문제를 해결하려들지 않고 서로의 감정이 사라질 때까지 싸움의 상태를 지속한다고 합니다.

발리의 문화를 특징짓는 것은 ‘클라이맥스’가 아니라 ‘고원’입니다. “한 점에 집중하는 돌출된 쾌락과 폭력이 아니라 긴장된 상태의 지속.”(채운샘 강의안) 생각해보면 지금 우리의 문화는 극도로 클라이맥스 중심적인 것 같습니다. 오르가즘 중심의 성문화, 자극적인 식문화, 사건의 해결과 극적인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영화, 잔잔하게 시작했다가 후렴부에서 절정에 이르고 여운을 남기며 끝나는 음악들 …. 그러고 보니 운동도 마찬가지네요. 우리에게 운동이란 러너스 하이를 느낄 때까지 달리고 근육이 터져라 벤치프레스를 하고 지쳐 쓰러질 때까지 공을 좇아 달리는 등등의 이미지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수요일마다 정수샘께서 가르쳐주시는 ‘오금희’ 같은 잔잔한 운동은 뭐랄까 가려운 데를 긁다가 만 것 같은 뭔가 밋밋한 느낌일 것입니다.

클라이맥스를 추구하는 것은 유럽문화의, 따라서 그 영향을 받은 근대 문명의 특성입니다. 정점과 목표와 극단을 향해 치닫는 문화. 클라이맥스에 대한 중독과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서의 권태와 무기력이 지배적인 문화. 들뢰즈-가타리에 따르면 초월성은 유럽(근대)의 질병입니다. “표현과 행위를 지닌 가치 자체에 따라 내재적 판에서 평가하는 대신에 외부의 목적이나 초월적 목적에 관련시키는” 것이 서양의 유감스러운 특질이라는 것이죠. 고원은 그러한 초월성과 싸우는 개념입니다. “자기 자신 위에서 진동하고, 정점이나 외부 목적을 지향하지 않으면서 자기 자신을 전개하는, 강렬함들이 연속되는 지역”으로서의 고원. 그러니까 고원이란, 정점이나 목적에 의해 평가되는 고유한 강렬함이 지속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발리인들의 분쟁에서 싸움이 극단적인 충돌이나 고소 고발 등으로 치닫거나 섣부른 화해와 해결로 귀결되는 대신에 긴장감을 유지하며 지속되는 것과 같은 이미지인 것이죠.

그러니까, 들뢰즈-가타리는 정말로 글쓰기를 통해 ‘천 개의 고원’을 만들어내고자 했던 게 아닐까요? 어떤 결론이나 전체를 향해 나아가는 위계화된 책이 아니라, 독자로 하여금 각각의 챕터(=고원)에 내재한 고유한 강렬함과 접속하도록 하는 책. 정말로, 《천 개의 고원》은 그런 책인 것 같습니다. 68혁명의 자장 속에서 씌어진 《안티 오이디푸스》는 비판이라는 목표에 어느 정도 초점이 맞춰져 있는 책입니다. 욕망을 가족이라는 협소한 영토에 붙들어두려는 정신분석에 맞선 투쟁. 《천 개의 고원》은 정신분석에 대한 비판이라는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진 들뢰즈-가타리가 구성해내는 아주 구체적인 개념들, 분석들, 강렬함들로 이루어진 책입니다. 채운샘은 'composition'과 'construction'의 차이에 대해 말씀해주셨는데, 전자가 음악처럼 부분과 전체가 동시적으로 생성되는 유형의 생산을 나타낸다면 후자는 건축에서처럼 부분을 쌓아올림으로써 부분들의 총체로서의 전체가 완성되는 종류의 생산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천 개의 고원》은 'composition'의 방식으로 만들어진 책입니다. 때문에 어떤 고원에서 읽기를 시작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며, 각각의 고원을 깊이 파고들면 그 안에서 전체를 읽어낼 수 있는 책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고원’이라는 말에는, 선험적인 전체성에 복종하거나 초월적인 목적을 전제하지 않고 외부를 향해 열린 채로 고유한 리듬과 느낌들을 구성해나가는 과정으로서 글쓰기와 책과 존재를 바라보는 관점이 함축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살아간다는 것, 어쩌면 고귀하게 살아간다는 것도 정상을 향해 산을 오르거나 도달할 목적지를 향해 트랙을 질주하는 것이 아니라, 고유한 강도를 전개하는 고원들을 매번 만들어가는 과정이 아닐까요? 아무튼, 채운샘께서는 《천 개의 고원》이 ‘고원’들로 이루어진 책인 만큼, 전체를 읽기가 부담스러우시다면 한 고원을 정해서 한 번 파 보시라고 권하셨습니다.

2. ‘개념’이란 무엇인가?

“철학이란 개념들을 형성하고, 창안하고, 만드는 기술”이라고 들뢰즈-가타리는 말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천 개의 고원》은 철학에 대한 저자들 자신의 정의에 매우 부합하는 철학 책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천 개의 고원》은 요상한 개념들이 난립하는, 개념들의 책입니다. 지층, 리토르넬로, 기관 없는 신체, 다양체, 되기, 얼굴성, 미시정치 등등 상상과 예측을 불허하는 종잡을 수 없는 개념들이 난장을 이루죠. 그런데 더 당황스러운 것은, 이들이 이러한 개념들을 어떤 유구한 철학적 전통을 참조하면서 만들어내고 있지도 않을뿐더러, 친절하게 그 개념을 설명하고 있지도 않다는 점입니다. 들뢰즈-가타리는 그저 각각의 개념들을 작동시키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기에는 들뢰즈-가타리가 개념을, 그리고 철학을 이해하는 독특한 관점이 작동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개념’이란 무엇일까요? 개념은 무언가를 설명하거나 무언가를 지시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철학책을 읽는 동안 아주 직접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바이기도 합니다. 가령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을 때,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무언가를 지시하는 명사로 간주하는 순간, 우리는 《에티카》를 1도 이해할 수 없게 되어버립니다. 신에 대한 우리의 상식을 버리고, 스피노자가 ‘신’을 어떻게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맥락화 하고 있는지를 세심하게 살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스피노자의 ‘신’ 개념을 통해, 자연을 존재를 전체와 부분을 삶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문제화할 수 있는 렌즈를 갖게 됩니다.

개념은 재현하지 않고 작동합니다. 개념은 그 개념을 출현시킨 관점, 문제계, 배치, 계열 등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의 신 개념과 기독교의 신 개념은 각각이 신을 요청하는, 같은 의미이지만 삶을 문제화하는 전혀 다른 방식을 전제합니다. 스피노자의 신 개념 역시 그가 자기 삶과 시대를 문제화하는 방식을 떠나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들뢰즈-가타리에 따르면 “개념은 반드시 그것을 가능태로 갖고 있는 자, 그 개념의 힘과 권한을 소유하는 자로서의 철학자에게 되돌려지도록 창조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개념은 우리가 감각하고 인식하고 행위하는 그 모든 방식들 속에서 작동합니다. 그러므로 개념을 창조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어떤 관념이나 대상에 이름을 붙여주는 따위의 일이 아닙니다. 개념을 창조한다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의 삶을 다르게 문제화하기를 시도하는 것이며, 다르게 문제화함으로써 새로운 길을, 도주선을, 가능세계를 드러나게 하는 일입니다.

개념을 창조하는 것이 삶을 다르게 문제화하는 것이라면, 어떤 철학자의 개념을 이해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의 의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공부를 하는 것은 들뢰즈-가타리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철학을 하고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라는 채운샘 말씀이 기억에 남네요. 그러니까 개념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개념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철학자의 개념을 작동시켜야 합니다. 철학자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그래서 본질적으로 철학은, ‘소통에 관한 모든 학문들’과 싸운다고 들뢰즈는 말합니다. 개념은 결코 정보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니체를 읽는다는 것은 그 소화하기 힘듦과 어려움을 겪어내는 일 자체라는, 얼마 전에 읽은 책의 구절이 떠오르네요. 라틴어 'Conceptio'는 원래 ‘임신’을 뜻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개념이란 ‘잉태된 것’입니다. 철학하고 사유한다는 것은, 개념을 창조하고 작동시킨다는 것은, 니체가 자주 비유하듯 이질적인 무언가를 자기 안에 품는 일입니다. 우리의 익숙한 관점에 균열을 가하는 낯선 것의 침입을 기꺼이 견디는 일,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깨부수고 변이시키는 일. 손바닥에 놓인 스마트폰을 통해 모든 종류의 지식에 손쉽게 접속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이 철학의 종언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다르게 문제화하는 개념-렌즈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철학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습니다.

강의 마지막에 굉장히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랑시에르는 ‘역사를 구성하는 파롤로부터 배제된 존재인 평민들’이 어떻게 배움을 통해 스스로를 해방해가는지를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스스로를 해방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 배제되어 있던 교육 서비스의 수혜를 통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더 이상 다른 이들의 언어로 생각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제도가 전유하려는 앎들과의 싸움을 통해서 스스로를 해방합니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다시 명명함으로써 자기 안에서 ‘지성의 징후’를 발견하는 것. 이것이 랑시에르가 생각한 해방입니다. 따라서 해방에는 배움이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이때의 배움이란 특정한 앎들을 소유하는 과정이 아니라 “그들이 사회질서 내에 속해 있고 그 사회질서를 만드는 이는 바로 그들 자신이라는 것을 의식”해나가는 과정입니다.

첨부파일은 (채운샘께서 강의 중에 읽어보라고 권하셨던) 《천 개의 고원》의 서론이자 첫 번째 고원인 〈리좀〉 스캔본입니다. 책을 갖고 계시지 않은 분들을 위해 올립니다~
전체 1

  • 2019-06-06 18:25
    개념에 대해 질문을 해놓고 멍하니 있을 때가 많았는데, 개념을 뭔가를 설명하거나 지시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거 같아요. 개념을 작동시킨다는 것은 이질적인 것을 자기 안에 품는 것인데.. 무척 불편한 일이겠죠..
    그런데 개념의 의미만 찾으며 쉬운 길을 찾는 것에 문제를 느끼는 지금, 제게 필요한 것은 개념을 작동시키는 일인 것 같아요.
    '우리의 익숙한 관점에 균열을 가하는 낯선 것의 침입을 기꺼이 견디는 일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깨부수고 변이시키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