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king Monday

<천개의 고원> 읽기 시즌 1 - 2강(06.10)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9-06-16 14:45
조회
146
1. 사유의 이미지

철학을 한다는 것, 사유를 한다는 것은 뭘까요? 들뢰즈에 따르면 철학의 과제는 더 올바른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패턴을 바꾸는 것, 다른 사유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새삼 ‘사유의 이미지’라는 말이 재미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사유의 이미지’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관념의 옳고 그름 따위가 아니라 ‘우리는 어떤 사유의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는가’를 질문하게 되기 때문이죠. 들뢰즈가 좋아했던 영화감독 장 뤽 고다르는 “올바른 하나의 이미지가 아니라 단지 하나의 이미지pas une image juste, juste une image”라는 말장난을 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고다르는 영화를 현실에 대한 ‘재현’으로 간주하고, 그것이 현실을 얼마나 정치적·윤리적으로 올바르게 재현하고 있는지를 심판하려는 자들의 도덕적 잣대를 비판했던 것이죠. 그렇게 이미지를 무엇에 대한 재현으로 간주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지가 세계를 어떻게 해석하고 문제화하고 있는지를 볼 수 없게 되고, 이미지의 운동을 놓쳐버리게 됩니다. ‘사유의 이미지’ 또한 언제나 ‘올바른 하나의 이미지가 아니라 단지 하나의 이미지’입니다.

들뢰즈는 앤디 워홀의 팝-아트를 패러디해서 팝-철학을 말했다고 합니다. ‘팝-철학’이라고 말함으로써 들뢰즈는 권력의 앞잡이 역할을 하는 ‘순수 사유의 공무원들’과 그들의 무기인 철학사를 비판합니다. ‘어떻게 감히 헤겔, 칸트, 하이데거를 공부하지 않고 철학에 대해 떠들 수 있느냐’고 말하는 자들. 들뢰즈는 이들이 사유의 모델을 국가로부터 빌려옴으로써 사유의 혁명성을 탄압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진리와 사유에 대한 특권성을 요청하는 철학. 저 너머에 진리를 설정하고 진리에 대한 접근과 해석의 권한을 학자와 전문가가 독점하고 무지한 대중들로 하여금 사유하지 못하도록, 혹은 사유 자체를 혐오하도록 하는 철학. 이들은 사유의 국가적 모델 안에 이성의 법원을 세움으로써 “이미지 없는 사유, 유목 생활, 전쟁 기계, 생성들, 자연을 거스르는 결혼, 포획과 도둑질, 두 계 사이에 있는 것들, 마이너 언어 혹은 언어 안의 말더듬기 등에 속하는 모든 것”을 추방합니다.

철학의 국가적 이미지에 맞서 들뢰즈는 철학 책이 매우 특이한 종류의 추리소설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추리소설로서의 철학. 추리소설은 언제나 답이 주어지지 않은 문제화의 장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탐정이나 형사는 예리한 감각으로 단서들을 모으고 그것들 사이의 관계를 설정합니다. 추리의 핵심은 주의 깊은 관찰을 통해 우리가 쉽게 흘려보내곤 하는 아주 미세한 단서들을 수집하고, 그것들을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조합해내는 과정에 있습니다. 사실 추리소설의 성패 또한 범인이 누구인가가 아니라 범인을 밝혀내는 과정 자체에 달려있죠. 그 과정이 얼마나 우리의 예측과 상식을 흔들어놓느냐가 추리소설이 주는 재미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철학은 마치 추리소설처럼,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현실을 문제화하고 그에 따라 개념들을 다른 방식으로 작동시켜야 합니다.

개념들을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언제나 경험주의자여야 한다고, 들뢰즈는 말했습니다. 물론 경험주의자가 되라는 말이 개념들을 경험에 적용시키라거나 직접 경험한 것에 대해서만 말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들뢰즈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우리가 현실 속에서 무엇을 문제시하느냐에 따라서 개념들이 다른 방식으로 출현하고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철학 책을 읽다보면 자주 겪게 되는 일이기도 하죠. 우리가 우리의 현실에서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문제시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철학 책은 다른 방식으로 출현합니다. 그리고 어떤 철학 책들은 우리의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서 읽어내고 이해하려고 하면 전혀 읽히지 않기도 합니다. 따라서 철학을 하기 위해서는 단서를 찾는 탐정처럼 우리의 현실에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어야 합니다.

팝-철학, 추리소설로서의 철학은 ‘모든 사람들이 ... 임을 알고 있다’와 같은 보편적 형식을 거부합니다. 들뢰즈에 따르면 사유는 이러한 전제 위에서가 아니라 이러한 전제와의 투쟁과 더불어 시작됩니다. 가령 스피노자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자유를 갈망한다’라는 상식적 전제를 부정하며 ‘사람들은 마치 자신의 자유를 갈망하듯 자신의 예속 욕망한다’라고 말함으로써 ‘전제 없는 철학’을 시작했습니다. ‘모든 사람들’ 같은 범주를 버리는 것, ‘전제’와 싸우는 것이 팝-철학의 과제입니다. 자신의 앎에, 다시 말해 전제들에 안정적으로 머물러 있는 것은 전혀 사유가 아닙니다. 사실 바보도 너무나 많은 전제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니, 바보는 아무것도 모르는 자가 아니라 전제 안에서밖에 사유하지 못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들뢰즈는 앎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앎에 대한 혐오로부터 철학이 시작된다고 말했던 것이죠. 글쓰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무지를 메우는 것이 아니라 앎의 극한에 이르는 것.

“글을 쓰게 되는 것은 오로지 앎이 끝나는 최전방의 지점에 도달할 때다. 글쓰기는 앎과 무지를 가르고 또한 앎과 무지가 서로 꼬리를 물면서 이어지는 그 극단의 지점에서만 시작된다. 글을 쓰고자 결심하게 되는 것은 오직 이런 길을 통해서이다. 단순히 무지를 메우는 데 그친다면, 그것은 글쓰기를 내일로 미루는 것, 오히려 글쓰기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과 같다.”(<차이와 반복> 中)

2. 나무와 리좀

들뢰즈-가타리는 대립적인 두 유형을 끊임없이 제시해서 우리를 헷갈리게 합니다. 영토화-탈영토화부터 시작해서 홈이 패인 것과 매끈한 것, 국가와 전쟁기계, 그램분자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 정신분석과 분열분석 등등. 『천개의 고원』을 앞에서부터 펼치면 제일 처음 만나게 되는 대립쌍은 바로 나무와 리좀입니다. 이렇게 대립적인 두 유형을 접하게 되면, 우리는 쉽게 ‘아, 리좀은 좋은 거고 나무는 나쁜 거구나’하고 결론을 내려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나무와 리좀이 무언가를 지시하거나 측정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현실을 다르게 문제화하도록 하는 개념-연장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우선 나무-뿌리 유형이 있습니다. 이 유형은 ‘뿌리’라는 본질을 전제하는 유형입니다. 아무리 많은 가지를 뻗어도 결국 나무는 뿌리의 근원적 통일성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합니다. 나무-뿌리 유형은 인간의 사고, 공간 등등 물질적이고 비물질적인 모든 것들의 규정하는 위계적인 질서를 가리킵니다. ‘진정한 나’를 상정하고 그것의 온전하거나 온전치 못한 발현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순간들을 평가할 때 우리는 ‘원본’과의 관계 속에서 모든 것들을 규정하는 나무-뿌리 유형의 위계적인 질서를 실현하고 있는 셈입니다. 원본이자 본질인 ‘하나’로부터 그것의 모사물인 ‘둘’로 나아가는 이항논리에 따라 작동하는 것이 나무-뿌리 유형입니다. 나무-뿌리 유형의 대표적인 예로는 노엄 촘스키의 구문론이 있다고 합니다. 촘스키의 구문론의 특징은 문장을 주어절, 서술절, 관용구, 명사구 등등으로 나누고 단어, 음운, 음절, 음소 등등으로 미세하게 분석함으로써 문장과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부분)으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문장을 요소들의 기계적 결합으로 이해하는 것이죠. 이렇게 이해할 때 문장은 그 의미가 달아날 수 없는 전체로서의 통일성에 종속됩니다.

다음으로는 어린뿌리(수염뿌리) 유형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의 근원적 본질로서의 본뿌리에 곁뿌리라는 다양체가 접목된 체계입니다. 기승전결이 완벽하게 짜여 있고 고정된 시점으로 전개되어가는 소설이 나무-뿌리적인 소설이라면, 윌리엄 버로우즈나 제임스 조이스 같은 작가들의 소설이 어린뿌리 유형에 속한다고 합니다. 사실 윌리엄 버로우즈나 제임스 조이스를 읽어보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윌리엄 버로우즈 같은 경우에는 소설을 쓴 다음 소설이 인쇄된 페이지를 여러 조각으로 잘라서 다시 이어붙이는 방식으로 작품을 완성하는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cut up). 이런 경우에 소설은 ‘하나’로 환원되는 본뿌리를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소설은 중심도 기승전결도 없이 이리저리 분기하게 되겠죠. 그러나 들뢰즈-가타리가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이 경우에도 뿌리의 통일성은 보존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름답고 조화로운 코스모스로서의 세계가 아닐지언정, 책은 여전히 카오스모스로서의 세계에 대한 이미지로 남습니다. 그리고 버로우즈의 작업은 하나의 의미체계를 해체하지만 여전히 작가의 조작에 의존하게 되는 체계라는 점에서, ‘작가주의’라는 통일성을 다시 소환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인 것’과 ‘여럿인 것’은 근본적으로는 대립적이지 않다는 점입니다. 하나의 본뿌리나 무수한 실뿌리나 ‘뿌리’로서 줄기와 가지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죠. 이와 달리 ‘리좀’은 줄기와 뿌리가 구분되지 않는 경우를 가리킵니다. 고구마를 떠올리시면 간단할 것 같습니다. 고구마는 ‘중심’이랄 것도, ‘뿌리’라고 할 것도 따로 없이 계속해서 횡으로 뻗어나가죠. 리좀에서 핵심적인 것은 ‘위’로 향하는 운동에 대한 거부입니다. 정체성, 초월성, 주체성, 본질성 등과 같은 외삽된 중심들을 거부하는 것. ‘고원’ 개념과 마찬가지로 여기에는 ‘초월성’에 대한 들뢰즈-가타리의 투쟁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리좀은 중심이나 일자와 관계 맺지 않고 끊임없이 옆으로 옆으로 연결접속 하면서 증식해가는 체계입니다. 잡초처럼 끊임없이, 위계없이 증식해나가는 체계. 저는 어떤 중심적인 형상이나 모티프를 설정하지 않고 끊임없이 확장해나가는 이슬람의 아라베스크 양식이 떠올랐습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6가지로 리좀의 원리를 설명했습니다. 우선 ① 연결접속의 원리와 ② 다질성의 원리가 있습니다. 리좀은 어떤 지점에서든 다른 지점과 연결접속합니다. “리좀은 기호계적 사슬, 권력 기구, 예술이나 학문이나 사회투쟁과 관계된 사건들에 끊임없이 연결접속”합니다. 따라서 가령 리좀으로서의 언어는 언제나 온갖 것들 사이의 연결접속이 이루어지는 복잡한 기호계 속에서 생성되는 중에 있습니다. 다음으로 ③ 다양체의 원리가 있습니다. 리좀은 다양체입니다. 지난 수업 시간에 보여주신 파울 클레의 그림에서 서로 다른 색깔이 칠해진 정사각형들은 초월성도 중심도 없는 판 위에 배열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부분들의 배치에 따라서 부분과 전체의 ‘본성’이 동시에 변이합니다. 어떤 중심도 없이 자리바꿈에 따라 끊임없이 생산되는 우주. 이것이 리좀적, 다양체적 우주입니다. 다음은 ④ 단절의 원리입니다. “이것은 구조들을 분리시키는 절단, 하나의 구조를 가로지르며 너무 많은 의미를 만들어내는 절단에 대항한다. 하나의 리좀은 어떤 곳에서든 끊어지거나 깨질 수 있으며, 자신의 특정한 선들에 따라 혹은 다른 새로운 선들을 따라 복구된다.”(24) 단절의 원리는 이분법적 절단에 저항합니다. 언제나 나무에는 리좀이, 리좀에는 나무가 내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완벽해보이는 시스템이나 질서에도 도주로는 발생합니다. 마지막으로 ⑤ 지도제작의 원리와 ⑥ 전사의 원리가 있습니다. 나무적 유형은 언제나 모사/표절의 논리, 재생산reproduction의 원리에 따라 작동하는 데에 반해 리좀적 유형은 지도를 그립니다. 지도란 무엇인가요? 지도는 대상을 모사하는 대신에 특정한 관점에 의해 요청되는 유용성에 따라 기능합니다. 감정의 지도, 감각의 지도, 삶의 지도. 지도에는 모사해야 할 원본이 없습니다. 실천을 통해 구성해나가야 하는 것이 지도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문제는 나무/리좀이라는 이분법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개념쌍을 빌려옴으로써 현실을 다른 방식으로 문제화하는 일입니다. 언제나 리좀에는 나무가, 나무에는 리좀이 내재해 있으며 매번의 실천들과 무관하게 정태적으로 주어져 있는 유형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선 신중하게 관찰해야 합니다. 우리가 속한 조직, 우리의 삶의 양식, 사유의 방식은 어떤 유형인가? 혹시 우리가 믿고 있던 다름과 다양함 속에 다시 환원하는 총체성이나 중심이 개입하고 있지는 않은가?를 질문해야 합니다. 가령 한 손으로 탈영토화하고 다른 한 손으로 공리화하는 체계인 자본주의는 다양함을 끊임없이 발생시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언제나 다양체적 형식 안에 이항논리와 중심을 만들어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인가 여럿인가?’가 아니라 ‘중심을 만들어내는 다양인가, 중심을 거부하는 다양인가?’를 질문해야 합니다. 또한 ‘학교’라는 나무적 조직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학교는 우리의 신체를 규율하고 유용하고 획일적인 개체로 생산해내는 나무적 조직입니다. 그러나 어떤 국면에서는 동아리를 만들고 지하조직을 형성하는 등 리좀적 운동을 발생시키기도 하죠. 물론 그러한 동아리나 지하조직 안에 또다시 권력에 대한 사랑과 위계에 대한 애착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따라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신중하라’고 말합니다. 리좀이라고 믿었던 곳에서 다시 나무가 자라나고 있지 않은지, 또 나무로 가득하다고 생각한 곳에서 리좀을 발생시킬 수 있는 잠재성이 내포되어 있지 않은지를 신중히 살피라는 것.
전체 1

  • 2019-06-17 14:06
    개념이 작동하는 방식과 내가 개념을 작동시키는 방식. 이것이 문제로다!
    하나인 것과 여럿인 것이 대립하지 않는다. 중심도 뿌리도 없는 고구마! 고구마를 '신중히' 다루겠습니다. ^^;; 후기를 알뜰히 올려주어서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