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king Monday

<천개의 고원> 읽기 시즌1ㅡ7강(07.15) 후기

작성자
배현숙
작성일
2019-07-18 19:22
조회
298
기관없는 신체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당신은 온갖 방법으로 그것을 하나(또는 여러 개)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미리 존재하거나 완전히 만들어진 채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비록 그것이 어떤 점에서는 미리 존재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당신은 온갖 방법으로 그것을 만들어내며, 그것을 만들어내지 않고서는 그것을 욕망할 수도 없다. 그것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수련이며, 하나의 불가피한 실험이다. (『천개의 고원』 / p.287)

들뢰즈/가타리의 개념들은 저에겐 너무도 멀고 높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히말라야 산 같이 느껴지는 것들이어서 그저 까마득하고 멍하기만 했더랬습니다. 뭐랄까, 아직은 내가 그것들을 만날 때가 아닌 것 같은 부정적인 느낌(?) 같은 것이 가로막고 있었지요. 말하자면 ‘들뢰즈’라는 전설적인 이름(?)에 대한 환상만 가지고 대들었다가 딱 마주치고 보니, 도무지 감당이 되지 않는 싸이즈에 질려 한 판 붙어보기도 전에 미리 꼬리 내리고 도망가기 바쁜 그런 심정이었달까요? 그러나 지금 이렇게 과거형의 문장으로 쓰고 있는 걸 보니, 기관없는 신체는 유기체와 함께 늘 작동하고 있는 게 확실하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ㅎㅎㅎ 어쨌거나 갈 길이 구만 리지만 이렇게나마 후기를 쓰는 신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잘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무리를 하시면서도 어떻게든 이 낯설고 생소하기 짝이 없는 개념들과의 거리를 좁혀주려 안간힘을 쓰셨던 샘의 ‘慈悲’ 공덕 덕분일 겁니다.^.^

들뢰즈/가타리가 ‘기관없는 신체(CsO)’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했던 것이 무엇일까요? 또 기관없는 신체라는 생소한 개념이 우리에게 주는 실천적 함의는 무엇일까요? 기관없는 신체에 대한 거듭되는 설명을 듣는 동안에도 ‘유기체로 환원될 수 없는 신체성’이라는 말 앞에서 또 다시 움츠러들었습니다. 대체 ‘유기체로서의 신체를 넘어가는 신체’라는 게 어떤 것인지, 그것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그것이 과연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 거듭거듭 분절되며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지층화되고 있는 이 유기체적 신체로부터 어떤 도주로를 만들어낸다는 것인지... ‘기관없는 신체’라는 막막한 개념을 앞에 둔 채 질문만 무성해졌더랬습니다. 그런데 이번 시간, 그 꽉 막혀있던 질문들에 조금 틈이 보였던 것 같습니다. 좀체 출구를 찾지 못했던 무지막지한 지층으로부터 한 발 도주할 수 있는 실험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기관없는 신체’라는 개념을 사유할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낯선 것 앞에서 유난히 낯을 가리는 오래된 분별의 습관 때문이었을 겁니다. 말하자면 가장 질서정연하게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신체로 착실하게 길들여진 이 유기체적 신체로부터 한 발짝도 벗어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요. ‘유기체는 기관없는 신체에 반하는 개념’이라고 반복하여 ‘들었지만’ 듣지 못했습니다. 지층이란 우리에게 그토록 익숙하고 편한 것이지요. 그러나 기관없는 신체는 뜬금없이 출현하는 게 아니라 그런 지층들에 면해 항상 함께 구성된다는(되고있다는) 사실을 저는 짐작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울증의 신체, 은둔자의 신체들도 하나의 기관없는 신체라는 걸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요. 그러나 그것들은 기관없는 신체이기는 하지만 지층과 딱 달라붙어있는, 한발짝의 도주도 하지 못한 채 변용되지 않은 채 또 다른 지층을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사뭇 다른 양태의 기관없는 신체라는 걸 눈치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만 생각해보니 그건 너무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이분법적 사유에 성실하게 길들여진 이 신체로 기관없는 신체를 사유한다는 것은 두터운 지층을 먼저 뚫고 나올 수 있는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지요.(그러나 그 조차 시간적 선후의 관계가 아닙니다.) 두터운 습관에 길들여진 신체는 ‘변용’을 거부하는 유기체적 신체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들과 함께 기관없는 신체는 항상 구성되고 있다는 사실이지요. 의식을 하든 못하든 우리는 끊임없이 외부와의 관계에서 끊임없이 변용되고 있는 중이니까요. 끊임없이 분절하며 지층화되고 있는 그 배치 속에 기관없는 신체, 즉 규정성을 벗어나고자 하는 힘은 반드시 있기 마련이죠. 이것이 기관없는 신체입니다. (이 지점까지 도착하기가 너무 멀고 힘들었습니다.^^)

들/가가 기관없는 신체를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은 ‘그런 유기체로서 환원될 수 없는 신체성’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즉 조직화되지 않고 끈질기게 잔류하는 힘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들/가는 CsO의 각 유형에 대해 우리가 이렇게 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1) 이것은 어떤 유형인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판단하는 어떤 절차와 수단에 의해서? 2) 어떤 양태인가? 예상과 달리 어떠한 변이, 어떠한 경이로움, 어떠한 불의의 사태에 의해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가?”(292) 이 질문은 제가 느끼기에 개인에게 뿐 아니라 사회체에 대해 던지고 있는 정치적 질문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기관없는 신체를 구성할 것인가의 문제 앞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암적인 CsO나 텅 빈 CsO가 되지 않으면서 우리는 어떻게 CsO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어떻게 유기체이기를 멈출 수 있을까요? 샘은 카렌 암스트롱의 글을 인용하여 붓다의 기관없는 신체가 형성되는 과정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깨어있기’와 ‘알아차리기’. 지난 학기 내내 화두로 삼고자 했으나 번번이 주저앉은 그 말씀들입니다. “그는 생각들이 그의 마음을 통과하는 방식에 주목했고, ...욕망과 노여움의 끊임없는 흐름에 주목했”으며, “자신이 갑작스러운 소리나 기온의 변화에 반응하는 방식”에도 “깨어있게”되었고, “아주 사소한 일에도 마음의 평화가 깨지는 것”을 아는 일을 통하여 기관없는 신체를 구성합니다. 단 한 찰나도 놓치지 않고 ‘깨어있는’ 수행은 “기관없는 신체 위에서 어떤 것들이 지층화되는지, 어떤 강렬함들을 지나가게 할 수 있을지, 어떤 도주선들을 발명할 수 있을지를 숙고하는” 일일 것입니다. (읽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평안해져서 굳이 다시 옮겨 적어보았습니다.) 붓다는 이러한 수행을 통해 모든 힘을 관통하게 하여, 어느 상태에도 머물지 않고 에너지 그 자체가 되는, 기관없는 신체로서의 ‘諸法無常’이라는 깨달음으로 나아갔던 것이지요. 깨어있지 않은 모든 순간마다에서 우리는 반복적으로 감각과 감정, 의식을 지층화하곤 합니다. 그리고 이 지층화의 결과로 분절된 흐름들은 특정한 배치물을 형성하고 우리를 다시 그 지층에 머물게 합니다. 결국 문제는 ‘지층화된 것’으로부터의 탈주이겠지요. 그러나 그렇다 해서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이 지층을 부술 수는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됩니다. 샘은 기관없는 신체는 지층의 반대급부가 아니라 지층과 면하고 있는, 지층화 이전의 차원이라는 점을 꼭 기억해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한참을 멈추어 있었습니다. 그동안 제가 기관없는 신체라는 개념을 사유하지 못했던 이유가 고스란히 들어있었으니까요. 어떻게든 유기체로 조직된 이 ‘몹쓸놈의 신체로부터 벗어나 얼른 ‘기관없는 신체로 탈바꿈해야한다는, 사제와 심판관으로서의 ‘놈-놈’ 구도에 갇힌 채 저는 한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않고) 있었습니다. ‘국군=우리편=좋은놈’↔‘공산당=남의편=나쁜놈’이라는 이 구태의연한 이분법의 구도에 착실하게 길들여져 다양하게 변주되며 내면화되어 있던 탓이지요.(비단 지층이 어찌 이것 뿐이겠습니까만은) 외부와 마주치는 순간마다 이 뿌리깊은 지층은 가장 먼저 튀어나와 여지없이 이분법의 잣대를 들이댑니다. ‘놈-놈’이라는 이분법적 분절이 작동되는 순간, 욕망은 어김없이 차단되고 변용은 끝내 포기되어지곤 했지요. 그런데 샘은 기관없는 신체는 지층화 이전의 차원까지 함께 사유한다고 강조하셨지요. 그래서 들뢰즈도 이렇게 말했나 봅니다.(지층으로부터 도주선을 마련할 때에는) “망치로 마구 치는 방법이 아니라 아주 섬세하게 줄로 갈아가는 방법으로 나아가야 한다.” 지층과의 관계를 세심하게 고려하지 않는 도주 역시 더 크고 단단한 지층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선생님은 끊임없이 규정이 작동하는 지층의 이중 분절, 즉 배타적인 이분법에 귀속시키는 모든 것들을 미세하게 관찰하는 수행과 실험이야말로 예술과 사유의 출발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마다 자신만의 기관없는 신체를 발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셨지요. 샘은 또 수행이란 결국 ‘관계성’에 대한 것이며, 기관없는 신체를 만드는 일은 ‘세계를 다르게 느끼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외부를 지각하는 방식을 다르게 만드는 일!’ 녹취된 강의를 되풀이 들으면서도 유독 이 말씀이 매번 처음처럼 깊이 와닿았습니다. 그것은 ‘지층화되지 않은 새로운 습관을 만드는 일’이라며 샘은 그것을 ‘지층과의 관계를 헐겁게 하는 것’이라고 표현하셨지요.

지금 내가 묶여있는 지층들은 어떤 것들일까요? 나는 그것들로부터 어떤 도주선을 어떻게 마련해야 할까요?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이 공부가 기승전 ‘수행’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명령어, 주파수, 공명

두 번째 시간은 ‘신의 심판’을 끝장내기 위한 기초를 다지는 시간이었습니다. 대체 강렬도=0인 CsO의 위에서 강렬함을 지나가지 못하게 분별하고 집착하게 하는 신의 심판이란 어떤 것일까요? 무엇이 기관없는 신체를 겨냥하여 신의 심판을 벌이는 것일까요? 들뢰즈, 가타리는 이 지점에서 ‘언어’에 주목합니다. 어찌 보면 이는 아주 당연한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유 자체가 언어로 이루어지는 것이니까요. 사유를 문제 삼는다는 것은 언어를 문제 삼는 것입니다. 왜 이런 방식으로 사유를 형성하느냐 묻는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우리 세계를 해석하는 언어의 문제라는 말이지요. 이것은 모든 것을 ‘해석’이라는 관점에서부터 출발했던 니체적 관점이기도 합니다. 세상에 해석이 아닌 것은 없습니다. 어떤 사유도 대상을 ‘지시’하고 있진 않습니다. 모든 언어와 모든 관념은 다 세계에 대한 해석이지요. ‘문화의 지층’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이중분절의 한 측면은 표현적인 것이며 이것은 언어와 연관됩니다. ‘禮’라든가 ‘에티켓’이라는 말은 우리의 신체를 분절하기도 하고 생각까지도 분절합니다. 인간다운 것으로 어떤 행위가 규정되는 것과 인간의 행위를 실제로 규제하는 것은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즉 인간다움이란 이러이러한 것이라는 개념을 형성하는 것과 실제로 우리 신체가 그것을 새기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표현의 차원과 내용의 차원입니다. 즉 표현과 내용의 차원은 신체적인 차원과 비신체적인 차원에서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이 두 가지의 문제는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습니다. ‘기표-기의’가 아니라 ‘내용과 표현’의 문제인 것이지요.

들/가는 네 번째 고원 <1923년 11월 20일 – 언어학의 기본 전제들>에서 바로 이 ‘기표-기의작용체계’를 문제 삼아 반증합니다. 이 고원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명령어’이지요. 이 때 이 명령어라는 말은 ‘명령하는 말’이 아닙니다. ‘명령(order)’은 명령이라는 뜻 외에 질서, 체계라는 뜻이 있습니다. 따라서 ‘명령어’라는 말은 ‘일정한 질서를 지닌 말’, ‘일정한 체계 속에서 작동하는 말’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비분절적인 ‘웅얼웅얼’하는 말은 특별한 어떤 상황이 아니라면 명령어가 될 수 없겠지요.

1923년 11월 20일은 독일에서 일어났던 초인플레이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통화체제가 작동하기 시작한 날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경제학자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는 그 해 10월 새 통화인 렌텐마르크의 발행을 위한 법률을 공포하는 상황을 이렇게 기술했다고 합니다. ..1923년 11월 20일 옛 라이히스마르크는 더 이상 돈이 아니라고 ‘선포’되었고, 새로이 렌텐마르크가 도입되어 일차 저당에 의해 제국의 땅과 모든 물리적 자산에 대해 보증되었다고 ‘선포’되었다. 그리고 ‘상황’의 도움으로 새로운 통화체제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들뢰즈는 이런 상황을 가리켜 당시 독일의 초인플레이션은 화폐체를 비롯한 여러 몸체들을 변용시켰다고 말합니다. 즉 신체적 차원-‘돈다발’이라는 측면에서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변화는 신체적 차원(화폐체라는 물질적 차원)에서 뿐 아니라, 언어적 차원(옛 라이히스마르크는 더 이상 돈이 아니라고 ‘선포’되었다)에서도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드디어 화폐체제가 다르게 작동되었다는 말이지요. 즉 발화의 언어적 차원이 실제 작동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언어외적인 것이 함께 작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들뢰즈는 일련의 ‘상황’이 하나의 기호적 변형(‘선포’)을 가능하게 했던 사례를 들어 ‘언어가 어떻게 하나의 의미를 갖게 되느냐’에 대한 이야기를 펼칩니다. 말하자면 들/가가 네 번 째 고원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은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물’, 즉 “배치물들은 끊임없이 변주되며, 끊임없이 변형들에 내맡겨진다.”(160)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들/가가 비판하는 언어학의 전제들은 어떤 것들일까요?

1) 언어는 정보전달과 의사소통에 관련되어 있으리라.    2) 어떤 ‘외부적’요소에도 호소하지 않는 랑그라는 추상기계가 있으리라.  3) 랑그를 등질적 체계로 정의하도록 하는 상수나 보편자가 존재하리라.  4) 언어는 다수어나 표준어라는 조건 하에서만 과학적으로 연구될 수 있으리라.

네 번 째 고원은 이 네 가지 전제들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들뢰즈가 문제로 삼는 것은 실제로 발화한 차원인 ‘파롤’이 아니라, ‘문자화된 추상적 언어’인 ‘랑그’입니다. 주류 언어학에서 연구대상으로 삼은 것은 바로 이 ‘랑그’였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다른 목소리로 다른 맥락에서 다르게 발화하더라도 ‘절대 변치 않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주류 언어학은 이러한 ‘보편언어’의 존재를 주장하며 위에 제시한 네 가지를 언어학의 전제로 삼습니다. 들뢰즈는 당연히 랑그라는 추상적 차원을 허구라고 비판하지요. 들뢰즈는 언어를 그것이 사용되는 맥락과 동일한 평면에서 사유합니다. 따라서 정신분석이나 구조주의자들이 주장했던 ‘언어를 통해 무의식의 구조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을 문제 삼고, '무의식은 언어로 ‘표상’될 수 없다. 왜냐하면 무의식은 언제나 분절작용을 넘쳐 흐르는 ‘생산적 무의식’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언어로 무의식을 붙드는 순간 무의식의 작동을 놓칠 수밖에 없으며, 그 순간 암묵적으로 언어의 중립성을 전제하게 되기 때문에, 무의식을 ‘해석’하는 언어는 무시무시한 심판으로 지층화합니다.

그래서 들뢰즈는 모든 언어는 언어적인 차원과 함께 끊임없이 상호 교차하고 개입하고, 절단하는 신체적인 차원, 즉 비언어적인 차원을 함께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들뢰즈가 말하는 ‘언표행위의 집합적 배치’입니다. 발화된 것이 아닌 언어는 없습니다. 모든 언어는 발화된다는 행위와 함께 쓰입니다. 씌어진다는 것은 현실화된다는 것이지요. 즉 언표라는 행위 속에는 언표된 것의 구체적인 상황까지 다 들어있다는 말입니다. 언표행위의 집합적 배치라는 말은 모든 언표행위가 이미 집단적 배치의 산물이라는 뜻입니다. 즉 사적 발화란 없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내가, 나만의 언어로, 나만의 생각을, 나 혼자 만들어낸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혼자 생각하는 것조차 집단적 배치의 산물입니다.

따라서 언어는 전달의 형식을 취하든, 소통의 형식을 취하든, 행위를 강제합니다. 언어란 중립적으로 뭔가를 지시하는 게 아니라 작용하는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들뢰즈는 ‘언어-기능’이라고 말합니다. 언어는 그 자체가 하나의 ‘기능(function)’이라는 말입니다. 기능하지 않는 언어는 없습니다. 기능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우리의 신체적, 비신체적 차원에 개입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명령’이지요. 들뢰즈는 언어의 본질은 ‘명령’이라고 말합니다. '언어는 명령한다! 그것이 명령법의 형식을 띠지 않을 때도, 가장 중립적 형태를 띨 때에도, 모든 언어는 명령어다!' 이 때 ‘명령어’란 ‘명령하는 말’이 아닙니다. 어떤 언어를 체계와 질서 속에 넣어버린다는 말이지요. 쇼핑호스트의 언어에 우리가 주파수를 맞추는 순간 진동이 일어나 행위를 일으키게 되는 것. 이 때 쇼핑호스트의 언어는 체계와 질서 속에서 쇼퍼들의 행위를 강제합니다. 라디오를 듣는다는 것도 채널을 돌려가며 주파수를 맞추다가 주파수가 맞으면 공명을 일으켜 언어를 어떤 질서 속에 넣고 그것을 우리가 소리로 듣는 일입니다. 이것이 명령어의 의미입니다. 들뢰즈는 명령어의 배치물을 구성하는 두 가지 요소가 주파수와 공명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다는 것은 그 사람과 주파수를 맞추는 일입니다. 언어가 행위를 추동한다고 하는 것은 주파수를 맞추어 진동을 일으킨다는 말입니다. 그럴 때 언어는 단순히 언어적 차원으로 끝나지 않고 행위를 강제합니다. 이렇게 언어는 신체적인 것과 늘 연동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언어는 정보전달이나 의사소통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정보의 소통이 아니라 명령의 전달입니다.

학교에서 배우는 말은 모든 이원적 토대와 더불어 기호계에 좌표를 부과합니다. 이것은 검은 색이고 이것은 흰 색이며, 이것은 정상이고 이것은 비정상이라고 알려줌으로써 이 말은 이 때 사용해야 하며, 이 말은 쓰면 안 된다는 등으로 우리가 머물러야 하는 기호계의 좌표를 만들어줍니다. 결국 문법이란 ‘권력의 표지’입니다. 이렇게 말해야 너는 명령을 받고 그 명령을 전달할 수 있으리라는. “언어는 믿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복종하거나 복종시키기 위해 있다”(148)고 들뢰즈는 말합니다. 모두가 공통적으로 전제하는 ‘객관적 언어’는 없습니다. 방송의 언어, 정부의 발표, 공문, 신문기사까지. 관료어는 모든 것을 문서화하여 명령하지 않지만, 그 문서들은 이미 우리를 관리하며 우리에게 무엇을 준수해야 하는지를 ‘명령’하고 있습니다. 말의 근본 형식은 판단의 언표나 느낌의 표현이 아니라 명령이라고 들뢰즈는 말합니다. 언어는 삶이 아니며, 삶에 명령을 내린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언어를 가지고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그 언어는 우리를 어떤 특정한 삶의 방식으로 가게 하거나 가게하지 않기도 합니다. 그래서 들뢰즈는 “모든 명령어에는 ‘작은 선고’가 있다.”고 말합니다. 결국 말은 세상을 지시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며, 언어적인(비신체적인) 것은 신체적인 것을 ‘지시’하는 게 아니라 신체의 상태를 변환하거나 유지하는 식으로 그것에 개입한다는 것이지요. 샘은 언표와 행위는 동일적 관계가 아니라, 언표에는 이미 행위가 함축되어 있고, 행위에는 언어적 관계가 함축되어 있는 ‘내재적 관계 혹은 잉여의 관계’라고 설명하셨습니다.  말이란 집단적 배치 속에서 임시로 ‘假設된 것’이지요. 불교 수업 시간에 유식을 배우며 말은 '허망분별(虛妄分別)'임을 누누이 확인했더랬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을 버려야 하는 것일까요? 절대 그럴 순 없습니다. 지층을 완전히 부수어버릴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그것은 부정할 것이 아니라 변주하고 비틀어야 한다고 샘은 말하십니다. ‘말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것, 비틀고 변주한다는 말이 얼른 다가오진 않지만, 어쨌거나 말의 본질주의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서도 부단한 ‘수련’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언어에 대한 수업을 들으며 참 마음이 놓였던 문장이 하나 있었습니다. ‘내 목소리 안에 다른 목소리들이 산다’는 바로 이 문장입니다. 남의 말이 섞이지 않은 내 말은 없다는 겁니다. 얼마나 경쾌하고 가벼웠던지, 오늘 이 글을 겁 없이 쓸 수 있었던 것도 이 문장의 덕이 컸습니다. 나의 말은 이미 타자의 말이며, 나는 나의 말이 아니라 이미 남의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들뢰즈가 말한 ‘간접화법’의 정의입니다. 샘은 모든 말의 본질이 ‘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말은 어디선가 주워들은 소문일 뿐이며, 생각 자체는 횡설수설일 뿐이다! 이렇게 멋진 말의 뒤에 결정적인 한 마디 말씀을 화룡점정으로 찍으셨습니다. 그러니, ‘자신이 쓴 글에 자의식을 갖지 마라!’ 참으로 고맙고 고마우신 선물 같은 말씀을 기억하며 횡설수설 졸가리없이 주어다 붙인 ‘남의 말’을 이만 마칠까합니다.
전체 3

  • 2019-07-19 15:27
    그 언어가 지시하는 그대로 명령하기 때문에 명령어가 아니라 오히려, 특정한 상황과 함께 체제와 질서 속으로 넣어버리는 방식으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모든 말은 명령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미 해석을 경유해 인식되고 있는 언어들이기에 언제나 '말의 그물'에 걸리지 않고 주도면밀하게 해석을 요리조리 해보는 '수련'이 역시 중요하겠군요!!
    '참으로 고맙고 고마우신 선물 같은' 후기 잘 읽었습니다~~

  • 2019-07-21 16:55
    현숙샘~ 조근조근 이야기해주시는 듯한 후기~ 잘 읽었습니다ㅎㅎ
    “언어는 믿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복종하거나 복종시키기 위해 있다”, ‘내 목소리 안에 다른 목소리들이 산다’라는 말들이 남네요.
    감사해요~ 다음 시즌에도 종종 부탁드릴게요!

  • 2019-07-22 10:37
    이렇게 쫀쫀하게 후기를 쓰셔놓고 횡설수설이라니요.
    지층을 신중하게 살펴야한다, 말을 비틀고 변주해야한다는 들뢰즈의
    말을 놓치지 않고 있다가 제 일상에서 한번 써먹어보고 싶습니다.

    .아무리 후지게 공통과제를 써도 지적받고 다른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때
    공부를 그만둬야하나라는 생각을 자주 하거든요.
    그래서 저도 '글에 자의식을 갖지 말라'는 그 말이 고맙게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