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king Monday

<천개의 고원> 읽기 시즌 1 - 6강(7.8)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9-07-11 17:41
조회
173
《아침놀》에서 니체는 과학의 경이로움과 마술의 경이로움을 비교하면서, 마술이 “극히 복잡한 인과 관계가 작용하는 사건에서 극히 단순한 인과 관계만 작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우리를 매료시키려”하는 것과 달리 과학은 “우리가 바보처럼 외관만 보고 모든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건에서 [복잡한 인과 관계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단순한 인과 관계에 대한 믿음을 버리게”(《아침놀》, 23쪽)한다고 말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과학과 마술의 근본적인 차이는, 과학이 진실을 말하고 마술이 거짓을 말한다는 데 있다기보다도, 과학이 가장 단순한 사물들에 작용하는 지극히 복잡한 인과관계를 ‘이해하도록’ 하는 데에 비해 마술은 겉으로 드러난 극히 단순한 인과만을 ‘믿도록’ 한다는 데에 있는 것 같습니다.

강의 중 채운샘이 보여주신, 복잡한 신경회로로 이루어진 인체 이미지도 니체가 말하는 ‘과학의 경이로움’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인간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마술적인’ 수준에 머무를 때, 그러니까 주어진 몇 가지 단순한 인과만을 우리가 믿고 있을 때, 우리는 쉽게 ‘심판하는 자’가 되어버립니다. 타인의 말과 행동이 어떠한 인과에 따라 이루어졌는지를 알고 있다고 ‘믿고’ 그의 ‘의도’나 ‘본성’에 대해 간단히 선악미추의 잣대를 들이대게 되죠. 그런데 인간의 신체가 이토록 복잡한 회로를 내장하고 있으며, 인간 행동의 작동원리에는 도덕적인 ‘의도’나 주체의 자유로운 ‘의지’ 같은 것으로 환원할 수 없는 복잡하고도 필연적인 인과의 연쇄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진정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타인이나 우리 자신을 몇 가지 기준으로 손쉽게 심판하고 규정해버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몸이 이토록 복잡한 인과의 연쇄 속에 있음을 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몇 가지 기준들과 규정들에 대한 ‘믿음’을 철회하고, 우선 인간이란 무엇이며 다른 것들과 어떠한 영향을 어떠한 방식으로 주고받으며 존재하는지를 배우고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요?

‘기관 없는 신체’라는 개념에 내재한 문제의식은 대략 이런 것이라고 합니다. 신의 (사실은 인간의) 심판으로부터 신체를 해방시키는 것. 왠지 모르겠지만 ‘기관 없는 신체’라고 하면 뭔가 무시무시한 형상이 먼저 떠오릅니다. 눈도 없고, 코도 없고, 입도 없는 형체를 잘 알아볼 수 없는 덩어리 같은 것이 떠오릅니다(그러고 보면 우리가 무서워하는 것은 주로 알아볼 수 있는 형상을 결여한 것들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또 《안티 오이디푸스》에서는 들뢰즈-가타리가 이 개념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막연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복잡한 개념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그런데 이번 강의를 들으면서, 기관 없는 신체가 그렇게 마냥 이상한(?) 개념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관 없는 신체는, 사실 ‘기관’보다는 ‘유기체’에 대립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기체란 무엇인가요? 그것은 그 안에서 각각의 기관들과 부분들이 각자가 부여받은 기능을 유기적으로 수행하는 통일된 전체로서의 신체입니다. 그 안에서 부분들은 ‘목적’을 부여받은 ‘기관’으로 출현합니다. ‘보기 위한 눈’, ‘듣기 위한 귀’, ‘먹기 위한 입’ …….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목적에 따라 부여된 기능을 벗어나 입으로 그림을 그리고 손으로 걷는 것은 ‘비정상’으로 규정되고 교정이나 치료의 대상으로 인식되죠.

“신체는 신체이고 그것은 단독적이어서 기관이 필요 없다 신체는 결코 유기체가 아니다 유기체는 신체의 적이다... 입도 없고 혀도 없고 이빨도 없고 기관지도 없고 배도 없고 항문도 없고 나는 나 그대로인 인간을 다시 구축하리라”(앙토냉 아르토)

프랑스의 극작가이자 배우인 앙토냉 아르토(Antonin Artaud, 1896-1948)는 신체에 가해지는 신의 심판(유기체적 기관화)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6번째 고원에 적혀 있는 ‘1947년 11월 28일’은 아르토가 <신의 심판을 위하여>라는 제목의 라디오 방송용 원고를 집필한 날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천사-인간-동물-식물-풀-지옥’으로 이어지는 존재의 피라미드를 구축했다고 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그것들을 존재하도록 한 신의 의도로 소급해서 이해하는 사유. ‘신’을 의식적으로 믿지 않더라도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서 어떤 규범과 정상성, 목적, 본질 같은 것들을 부여하려들 때 우리는 신의 심판을 다시 불러들이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아르토는 이러한 관점에서 유럽의 문명을 ‘신의 심판을 기다리는 문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럽의 문화인이란 “체계로 교육받은 사람, 체계로, 형식으로, 기호로, 표시로서만 생각하는 사람”이며 “우리의 행위를 우리의 생각과 일치시키는 대신에 우리의 행위로부터 우리의 생각을 분리시키는 능력을 통해 부조리로까지 스스로를 성장시킨 한 마리 괴물”이라는 것입니다.

‘기관 없는 신체를 구성하라!’라고 아르토와 들뢰즈-가타리는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의 신체는 언제나 기관 없는 신체를 향해 열려 있습니다. ‘목적을 부여받은 기관’으로 환원되지 않은 채로 이질적인 것들과 미리 규정되지 않은 방식의 관계를 생성해나가는 것이 바로 신체이고 자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에게 익숙한 규범을 보편화하여 ‘정상’, ‘비정상’을 가르고, 비정상의 신체에 ‘결여’라는 딱지를 붙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이 이러한 유기체적 규범에 고착되어 있는 와중에도 신체는 그러한 ‘심판’을 회피하고 그로부터 달아나는 중에 있습니다. 예전에 들었던 올리버 색스의 일화가 생각나네요. 올리버 색스는 주민들이 모두 색맹인 섬에 간 적이 있다고 합니다. 거기서 색스는 겉이 파란 바나나를 보고는, 주민들이 색맹이라 바나나의 익은 정도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고 멋대로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바나나는 껍질만 초록색일 뿐 속은 적절히 익어 있었습니다. 색맹 섬의 주민들은 기관화된 눈에만 의존하지 않고 온갖 감각들을 총동원 해 바나나의 익은 정도를 측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색맹’이 의미하는 것은 색깔을 구분하는 기능의 ‘결여’가 아니라 감각의 다른 배치입니다. 이처럼 자연 안의 모든 것들은 미리 규정되지 않은 방식의 변이와 상호-되기를 거듭한다는 점에서 언제나 기관 없는 신체와 고른판을 향해 있습니다. 들뢰즈 가타리가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기관 없는 신체에 관한 책이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에티카》에서 스피노자는, 끊임없이 변용하고 변용되는 과정 자체를 자연 안의 모든 것들이 존재하는 방식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기관 없는 신체를 만든다는 것은, 특정한 목적이나 기능으로부터 끊임없이 달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들뢰즈와 푸코는 ‘욕망’과 ‘쾌락’이라는 개념을 둘러싸고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고 하는데요, 이때 들뢰즈가 ‘쾌락’이라는 말의 뉘앙스에 대해 제기한 문제가 기관 없는 신체를 구성하는 문제와 관련됩니다. 들뢰즈는 ‘쾌락’이라는 말이 욕망의 목적으로 부과되는 것처럼 느껴져서 그러한 표현이 참기 힘들다고 말했습니다. 들뢰즈가 말하는 욕망은 어떤 결핍도 내포하지 않고 이질적인 배치와 일체를 이루며, “강렬도, 문턱, 구배, 흐름에 의해서만 정의되는 내재성의 장 혹은 ‘기관 없는 신체’의 구성을” 의미합니다. ‘무엇’으로 환원되지 않는 중단 없는 흐름이 들뢰즈가 생각하는 욕망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쾌락’은 마치 중단 없는 흐름으로서의 욕망이 환원되어 버리고 마는 목적지 같은 뉘앙스를 풍긴다는 것입니다.

기관 없는 신체를 구성한다는 것은, ‘무엇’을 욕망하거나 욕망하지 않는 문제가 아니라, 욕망 자체가 중단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어떤 표상이나 목적, 대상으로 환원되지 않고 끊임없이 이질적인 것들과 관계를 맺으며 과정을 계속하는 것. 그 과정 자체가 기관 없는 신체의 구성입니다. 그래서, 신의 심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목적과 규범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기관 없는 신체를 구성하기 위해, 욕망의 혁명성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는 일종의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때의 수행이란 욕망의 중단이나 억압이 아니라 중단 없는 욕망의 과정 자체를 의미합니다. 때문에 이러한 의미의 수행은 단순히 몸을 단련하는 것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어떠한 배치 속에서 유기체화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과정을 수반합니다. 혁명이란 중단 없는 생명, 중단 없는 욕망, 중단 없는 만남, 중단 없는 공부(!?)입니다.
전체 2

  • 2019-07-12 20:21
    '무한한 욕망'이라는 말은 익숙해도 '중단 없는 욕망'은 굉장히 생소했습니다.
    충족, 쾌락에 포섭되지 않는 새로운 감각의 판을 계속 만든다는 것이 곧 '수양'이겠지요.

  • 2019-07-13 20:00
    기관없는 신체란 목적과 의미로부터 도주하는 신체로군요. 생명의 중단없음, 무한히 변용되고 변용하는 양태의 세계. 스피노자 시간에 공부했던 것처럼 온 우주와 함께인 나를 떠올리면서, 기관없는 신체의 '열림'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