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과 글쓰기

주역과 글쓰기 3학기 5주차 후기

작성자
은정
작성일
2021-09-04 04:47
조회
125
역사의 폭압

역사는 무엇일까?  내가 너무나 당연하게 배웠던 역사, 시간은 하나의 흐름을 가지고 있는 선이다. 시작점을 하나 정해놓고, 사건과 그 사건이 원인과 결과로 맞물려서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는 역사이다. 이런 역사라는 개념 자체가 지극히 서구중심주의적 시간관 서구가 이 시간에 부여한 질서 이거에 기반해 있다. 역사주의자 시각 속에는 역사를 갖지 않는 부족들이 미개한, 흐름 선의 처음에 있고 서양의 역사로 무장한 서양인들은 도달해야 하는 지점이 된다. 엘리아데는 이걸 깨려고 한다. 서양이 부과한 하나의 시간질서 이것으로서의 역사를 마치 인간이 필연적으로 내재하고 그것의 운동속에서 따라서 살아가야 한다는 폭력성을 4장에서 이야기한다. 역사는 인간이 시간에다가 부여한 하나의 질서인 것 뿐이지 그건 우리에게 그렇게 부과된 질서로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에 대해 엘리아데나 인류학자들은 “역사의 도정에 있다는 그 이유 때문에 단지 팽창 일로에 있는 제국의 이웃이라는 그 이유 때문에 고통을 겪거나 죽어가는 수많은 민족들의 그 고통과 죽음은 어떻게 허용되고 정당화 될 수 잇는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마치 역사가 앞으로 나아간다는 전망을 가진 것처럼 생각하고.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악을 필연적이고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여긴다. 서양이 비서양에 가서 사람들을 죽이고 문화를 억압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 이게 문명사회의 발전과정이라는 이유처럼 말이다. 역사주의자들이 역사 발전의 방향성 속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폭압했는가를 질문하는 것이다. 우리는 더 나은 사회를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뭐가 더 낫다는 거지?’라는 질문은 하지 않는다.

이런 역사의 발전을 전제하는 상태에서 어떤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폭압이라든가 폭력이라든가 죽음 같은 것을 필역적으로 불가피한 어떤 것이라고 여기는 폭압. 그 역사의 폭압을 우리는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인류학자들은 우리의 삶 자체가 그런 역사적인 과정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어떤 것을 도입하고서만 그것을 견딜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역사의 시간이 우리를 지배하는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신화나 종교에서 인류학자들은 찾았다. 신화나 종교는 역사적 시간으로 환원이 되지 않는다. 인류학은 올바르고 모두에게 표준이 되는 삶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삶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학문이다. 인류학자들이 발견한 원시부족들에게는 역사도 없고 역사의 단선적인 시간도 없다. 모든 것은 그 한번의 태초라고 말하는 기억- 규정적이지 않는 시간성, 아무것도 규정되지 않는 그 시간으로의 회귀한다. 그게 신화의 공통적인 것으로 본다면 그것이 시간의 재생이다. 역사적 시간을 견뎌낼 수 있는 길을 신화와 종교의 초역사적 시간에서 찾으려고 했다.

우리가 배우는 주역은 때를 이야기한다. 때는 근대적으로 이야기하는 시간은 아니다.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균질하게 흘러가는 시간과 상관이 없다. 때라고 하는 것은 시공간이 형성되는 거대한 시공간 장. 복잡한 에너지, 복잡한 운동들이 형성하고 있는 시공간의 장이 때이다. 64괘의 순서가 발전도, 순한도, 퇴보도 아니다. 주역의 시간은 무시무종- 시작도 끝도 없는 시간이다. 천지비라고 하더라도 천지가 막혀있는데 그 막혀있는 자체가 21세기에 그 막힘이 이루어지는 방식과 중세시대에 막힘이 이루어지는 방식이 같지 않다. 주역의 비괘는 하나의 현실태이다. 어떤 상황을 나타내는 현실인데 그 현실 자체가 아직 일어나지 않는, 이 상황이 앞으로 되어갈 잠재적 상황을 다 내포하고 있다.

근대인이 믿고 있는 역사주의에 대해서 주역만 공부하더라도 근대인의 역사주의가 깨진다. 인간은 어떤 방향성을 향해 가고 있는 진보에 대한 믿음이 있다. 강의를 들으면서 나 역시도 미래에 대해 나아질 것이라는 발전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믿음이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해서도 역사주의적 방식이 아닌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한고 말씀하셨다. 역사라는 것에 갇히지 않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간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가? 엘리아데 식으로 말하자면 초역사적인 신화와 종교가 하나의 출구가 될 것이고, 우리가 배우는 주역도 역사주의를 깨는 공부가 된다.

 

산화비괘

 

공자는 세상에 나아가서 자기 뜻을 펼치고자하는 뜻이 있었다. 공자가 그런 열망을 가지고 점을 쳤는데 산화비괘가 나왔다. 공자가 산화비괘를 받았다는 것은 내가 어디를 가도 근본적으로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하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비는 꾸며주고 밝히는 것. 비는 문식- 꾸밈이다.  세상이 바뀌고 나면 거대한 원칙은 있는데 세력되지 못한 때를 의미한다. 여기서 세련됐다는 것이 문명을 의미한다. 문명은 상징화 메커니즘이다. 국가적 차원에서도 현충일 기념식, 3.1절 기념식이 있는데 이걸 어떻게 하느냐가 다 다르다. 의례의 세련됨이 표현해주는 상징성이 있다. 문식이 주는 소소하지만 분명한 효과가 있다. 우리는 아무리 마음이 있어도 이미지가 가미되지 않으면 받아들이는게 다르다. 바탕 자체로 충분할 수 있지만 대부분은 이게 상징적 기제를 거치지 않으면 그대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인간들은 말이나 이미지로 유추하는데 익숙하다. 직접적으로 마음이 마음으로 통해지는 경우는 잘 없다.

문명의 상징성, 문화의 세련됨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을 이정도로 드러내면 알맞겠구나를 알고 거기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 상태를 알맞게 유지해줘야 사람들의 인간사회에서의 어떤 행태들이- 이건 이렇게 살고, 저건 저렇게 살고 이럴때 저렇게 행동하고 이럴 땐 이걸 선물을 이렇게 주고 등- 인간이 마음을 나누고 관계를 맺는데 있어서 뭐를 유지하는게 가장 좋은가를 알려주는게 문명이다. 따라서 질은 그 문에 의존하고 있는 바가 있다. 하지만 문과 질을 놓고 뭐가 더 핵심이냐고 묻는다면 질이다. 질이 없는데 본바탕을 전할 께 없는데 문만 있는, 전하려고 하는게 아무것도 없는데 꾸미려고 하면 허식이다. 문과 질이 서로 잘 어울려야 비도 그럴 때 우아하다.

비괘는 이 세상을 거대한 방식으로 변혁하고 도모하는 혁괘의 시대와는 다르다. 근본적인 것을 바꾼다기보다는 만들어진 것들을 세련되게 다듬는 때이다. 문화가 사회를 드러내는 방식은 단순한 반영도, 대립되 아니고 아주 복잡한 방식으로 문화라는게 그 사회의 바탕에 대해 말해준다. 비괘에서 봐야할 중요한 것은 단전에 천문을 관찰하여 때가 변화하는 것을 살핀다는 구절이다. 하늘의 별자리를 상징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농사를 어떻게 지어야 하는지를 모른다. 그런 점에서 천문이라는 것은 단순히 수식은 아니다. 하늘의 질서에 부여한 일종의 상징화 작업이다. 인간의 삶에서 그런 것이 이루어져야 어떻게 사는 것이 우아한 삶이구나를 알 수 있다. 모든 것을 상징화 할 수 있어야 그걸 가지고 구체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산천대축괘

 

대축괘는 소축괘와 함께 보면 좋다. 우선 우리는 ‘축’ 하면 축적이 먼저 생각난다. 조금 쌓거나, 많이 쌓거나. 이 괘는 재물과 연관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처음에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나의 생각과는 달리 주역에서 재물과 연관된 것은 대유괘이다. 소축, 대축이냐할 때 축은 축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제지, 지(止)에 가깝다. 대축이든 소축이든 아래의 세 양효를 제지한다. 그걸 제지해서 길들이다이다. 아래 하괘는 건괘라서 기본적으로 운동성이 있어서 위로 올라오려고 한다 소축괘는 육사효가 음효로 하나이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것들을 위에 사효가 높은자리에서 잘 제어해서 잘 조직화(길들임)을 한다. 대축괘는 음효가 두 개(4,5효)이다. 아래에서 운동을 해서 치고 올라오더라도 아래의 양효를 잘 조직화 할 수 있다.

대축괘는 상괘가 산이다. 산은 높고 단단해서 아래에서 치고 오는 힘을 딱 잡아주고 제어한다. 함부로 날뛰게 하지 못하게 한다. 이 상황에서 조직에 내공이 쌓이고 힘이 축척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개인의 차원에서도 볼 수 있다. 의욕은 앞서는데(건괘) 그 의욕을 잘 길들여서 다듬어 낼 수 있는 힘이 부치는게 소축괘이고 의욕을 잘 제지해서 역량이 쌓일 수 있는게 대축괘이다. 크게 보자면 위에 있는 자들이 저 아래에 있는 새로운 세대들의 역량을 잘 다듬어 줄 것인가에 따라서 개인에게만 길한게 아니라 천하에 길하게 된다. 대축괘는 인프라를 구축하는 때, 사람들이 능력을 현실화 할 수 있게 교육하는 시기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산택손괘

 

주역의 괘는 군자의 입장에서 쓰인 것이다. 하층민의 입장에서 쓰인게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봐야 손익이라는 말이 된다. 익괘는 위에서 덜어서 아래에서 준다는 의미이다. 손괘는 아래에 있는거를 덜어서 위에 준다는 뜻이다. 군자에게 손과 익은 내가 누구에게 주어야 이익이고 누군가에게 받으면 손해이다. 소인에게는 이런 손,익이 군자와 반대이다.

아래를 덜어서 위를 증진시켜야 할 때도 있다. 아래는 건괘에서 하나가 음으로 바뀌었다. 아래에서 덜어낸 것을 위의 곤괘에 하나를 준 괘이다. 점을 쳐서 손괘가 나오면 인간관계에서 뭘 잃어버리거나 그런 뜻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정이천은 손괘를 자기에게 과도한 것을 덜어내고 억제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자기가 모든 것을 쥐고 있으려고 하지 않는 것에서 손의 덕을 유추하는 것이다. 역사적인 것과 연관해보면 백성들이 위에다가 힘을 합쳐줘야 하는 때이기도 하다. 이 괘에서 중요한 것은 손은 유부 원길. 유부라는 것은 무엇이냐면 뭘 덜어내든 덜어주든 손과 익에서 핵심인 것은 이치에 합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게 없는데 누군가에 주는 것은 이치에 합당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내가 가지고 있는게 넘치는데 덜어주지 않는 것은 이치에 합당하지 않다. 줌이 미덕이 되는 것은 이치에 맞을 때이다. 근본적인 이치에 대한 이해 없이 행하는 것은 아주 많은 경우 내가 선한의도를 가지고 하더라도 천하에 해가 되는 경우가 많다. 상대방의 조건과, 나의 조건과 지금의 상대방과 내가 관계하는 맥락을 가지고 도와주는게 좋을까, 도와주지 않는게 좋을까를 판단해야 줄때 주더라도 미덕이 된다.

손괘에서 중요하게 봐야 할 두 효가 구이효와 상구효이다. 구이효는 덜어내지 않는 것이 증진시키는 것이다라고 나온다. 때로는 내가 굳이 뭔가에게 이익을 주지 않더라도 나 하나가 올바름을 지키고 살아가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때가 있다. 나의 덕으로 모든 사람을 감염시키는 존재가 되면 저절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 상구효는 덜어내지 않고서 증진시켜주는 자리이다. 이것을 해석보자면 군자의 뜻은 타인을 증진시켜 주는 것이다. 상구효에서 보면 군자는 뭘 굳이 덜어서 주지 않더라도 군자의 뜻과 마음가짐생각, 내적인 역량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이익을 준다. 부처님처럼 존재가 그냥 다른 자들에게 주는 존재가 증여인 사람이 있다. 이효와 상구효를 보면, 손괘에서 덜어냄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덜어내어 주다'의 의미와 다른 특별한 증여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전체 2

  • 2021-09-04 13:47
    "우리가 배우는 주역도 역사주의를 깨는 공부가 된다." 이 문장이 여운을 남기네요. 발전이 아닌 방식으로 어떻게 미래를 사유할 수 있을까요? 전에 이슬람을 공부할 때, 어떤 울라마(이슬람의 학자)가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나 모두 과학적 앎에 기반을 두고 있다. 영성이 고려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들의 사회는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고 말했던 게 생각나네요. 코로나 팬데믹은 발전과 성장을 목표로 하는 미래가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죠. 세계와 다른 관계를 설정해야 할 때고, 거기서 영성과 비슷한 무엇을 회복하지 않을 수 없을 듯 한데요. 음... 기승전시중(時中)이지만... 점점 복잡해집니다.

  • 2021-09-04 16:37
    어마무시한 후기양에 한번 놀래고~ 잘 정리된 글에 한번 더 놀래고~..손괘에서 샘의 문제의식이 나오나 기대하면서 읽었는데 나오지 않았네요~^^ 주역만 공부하더라도 근대인의 역사주의가 깨진다...조금씩 깨지고 있는거 같습니다. 깨고 싶지않은 것들도 있는데 자꾸 깨라고 하네요.. 주역은 늪입니다.... 그날의 공부가 가물가물하던 시점에 상기시켜주는 후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