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과 글쓰기

10/17 수업 후기

작성자
황리
작성일
2021-10-21 23:44
조회
178
주역이 우주의 변화와 운행 원리를 담고 있는, 해서 위대하기도 하지만 참 어려운 책이라는 것! 누구나 선뜻 동의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이 말을 두고 저희 조에서는 제법 많은 얘기들을 나누었습니다. 분명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런 거창한 표현은 ‘우주의 변화와 운행’이라는 걸 지금 여기 우리의 삶, 마음과 동떨어진 추상적인 무언가로 만들어버리기 쉽다는 것, 나아가 주역의 말들을 마치 받들어 모셔야 할 성스러운 경전 같은 것으로 여기게 함으로써 그것이 우리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싱싱하게 작동하지 못하도록 만들어버리는 면이 있다는 것, 그러니 이런 말들에 쉽게 압도되거나 함부로 쓰는 걸 경계할 필요가 있다는 거였지요. 주역이 어렵다는 것 또한, 책의 내용 자체의 어려움보다 먼저 우리의 일상 속에서 삶의 미세한 기호나 징후들을 읽어내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일의 어려움의 관점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는 것까지도요. 이번 시간까지 3학기에 걸쳐 64괘 한 바퀴를 돌았는데, 저로선 어떻게 접근해 글을 써야 할지 여전히 손에 잡히는 게 없다는 느낌입니다. 채운 샘 말씀대로, 대체 양과 건은 뭐고 음과 곤은 또 뭔지 아는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은 멘붕 속에서 그저 맘에 들어왔던 괘들 서너 개, 에피소드 몇 개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어 참 한심 난감하기 그지없더라고요. 동학 샘들의 소감은 어떠셨는지 진심 궁금합니다요(^^).

重地坤은, 아시다시피 땅의 도와 성질을 상징하는 괘로 대지를 굳건히 주행하는 암말의 덕성을 바탕으로 세상 만물을 품아 안아 기르고 완성시키는 힘이 이 세계에 내재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유순한 강건함으로 만물을 남김없이 포용하여 화육의 공을 이루는 이같은 곤괘의 모습에서 이질적인 것들과 접속, 공생할 수 있는 역량을 읽어낼 수 있겠다는 얘기가 저희 조에서 나왔는데, 역시 새길만 했었고요. 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순음으로 이루어진 이 곤괘는, 역시 순양으로 이루어진 건괘와 더불어 논의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지요. 이 두 괘를 제외한 62개의 괘는 현실로 드러난 특정 상황이나 때를 보여주는 것이지만, 이 둘은 이 무수한 변양들을 만들어내고 전체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근원적인 실재이자 원리로 작용하는 괘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또한 이 둘은 대립되는 두 힘이기는 하지만, 배타적이거나 위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긴밀하게 얽혀 상호 감응과 보완의 방식으로만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乾이 진취적으로 시작하고 여는 힘이라면 坤은 이에 부응해 능동적으로 따르고 마무리하는 힘이라는 것, 달리 말해 전자가 발산, 창조의 에너지라면 후자는 수렴, 응축하는 에너지라는 것인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이 둘이 서로를 조건으로 해서만 발휘될 수 있다는 걸 잊어선 안 된다는 점을 토론 내내 강조했던 것 같습니다. 효사에 대해선 많은 얘길 못했는데, 딴 건 몰라도 坤 괘의 주효라 할 수 있는 육이효의 直方大 不習 無不利정말 최고의 윤리적 경지를 보여주는 효사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채운 샘께서는, 중지곤 괘는 땅 위에서 발붙이고 생을 영위해야 하는 우리의 물질적 조건 및 현실적 지평과의 관련 속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하셨네요. 개별적인 신체를 지닌 존재로써 다른 신체들과 만나고 접촉하는 가운데 일정한 규정과 분별의 체계를 형성하고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존재 조건을 이 곤 괘가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 면에서, 초육효의 효사 ‘履霜堅氷至’는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면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같은 신체성의 차원에 갇히거나 단순히 가시적인 질서의 체계를 이해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고, 그걸 가능하게 하는 이면의 발생적 차원, 다시 말해 비가시적인 세계에 도달하고자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道, 易, 차이(자체의 세계), 신(스피노자) 등으로 일컬어지는, 그 무규정의 차원으로 들어가지 않고는 세계는 물론이고 우리 존재를 올바르게 이해할 도리가 없어 늘 일희일비하며 정념에 속박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보이지 않는 차원은 결코 이미지로는 접근할 수 없고 오로지 개념적 언어를 이용한 ‘사유’를 통해서만 뚫고 갈 수 있다는 것, 해서 생각밖에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지속적으로 질문을 던져가며 공부하는 가운데 사유의 힘을 키우지 않으면 자기 구원의 길은 없는 거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다행히도 모든 음적인 것들은 양적인 것을 따르는 힘을 내포하고 있고, 또한 능동성 없는 수동성은 없는 것처첨, 물질적이고 현실적인 관계와 조건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그 규정성의 세계를 넘어갈 수 있는 힘이 우리 안에 내장돼 있다고 합니다. 낯선 질문을 던지게 하고, 습관적 사고의 회로를 오작동낼 수 있게 하는 힘과 가능성이 바로 무겁기 짝이 없는 우리의 몸 속에 있다는 것이지요. 어떻게 이 양적 에너지를 살려서 익숙한 지평에만 머물지 않고 그 속에 구멍과 여백을 만들어낼 것인가를 고민하고 연마하는 것, 이게 바로 공부의 길일 것입니다.

다음으로 지난 시간에 읽고 토론했던 세 개의 괘를 간단히 짚고 넘어가지요. 먼저, ‘땅에 가려 안 보이는 높음’을 말하는 地山謙. 이 괘에서 말하는 겸손이나 양보는 단순히 자기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뽐내지 않을 수 있는 덕, 다시 말해 자기 존재를 드러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뛰어난 역량을 지니고 있음에도 누군가 알아주길 바라거나 보상의 심리 체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내적 상태와 관련된다고 합니다. 이게 가능하려면 높고 낮음에 대한 분별적 감정이나 자의식에 휘둘림 없이, 존재 그 자체가 지복일 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이 괘에서 말하는 ‘군자의 아름다운 마무리(君子有終)’ 또한 이런 태도에서 비롯된다는 걸 놓쳐선 안되겠지요. 세계가 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 또한 자연이 발휘하는 이같은 謙의 역량 덕분일 거고요.  다음으로 조직 운용의 도에 대해 말하는 地水師. 이 괘는 군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통해 흐트러진 조직, 군대를 이끄는 유능한 리더의 역량을 부각시키고 있는 괘로, 혼란스러운 상황에 처할수록 기본적인 규율과 원칙을 붙들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물러날 때는 물러날 수 있는 유연함을 지녀야 한다는 걸 강조하고 있었지요. 마지막으로 회복과 진급의 괘라 할 수 있는 地風升. 나무가 땅을 뚫고 올라가는 형상을 가진 이 괘는, 패인 곳은 채워가며거쳐야 할 모든 단계들을 차근차근 밟아나가지 않으면 결코 단단한 성취를 이룰 수 없다고 하는 이 우주의 진리를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처음엔 밋밋하게 다가왔던 괘였는데, 지난 시간에 곤지님께서 쓰신 과제를 보고 호감도가 급상승했더랍니다. 관심 있으신 분은 일독을 권합니다! 글쓰기 관련 토의 내용은 반장님께서 올리셨으니, 전 여기서 줄이고 수업 시간이 뵙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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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0-23 14:34
    황리샘과는 지금까지 공부하며 얘기도 못나눠보고 아쉬움이 많이 있습니다. 샘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점도 많을거 같은데...사심을 담아 4학기에는 함께 조편성이 되었으면 하는 기대를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