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철학

일상의 철학 4회차 후기

작성자
정은하
작성일
2018-03-22 22:56
조회
127

지지난 시간에는 <죽음앞의 인간> 5,6장을 읽었습니다.


5장의 내용이 방대한대다가, 무덤형태와 묘비명, 무덤장식 등과 같은 세세한 이야기가 워낙 상세히 나열되어있어서,


사실 아직까지도 내용이 잘 정리가 되지않고, 아리에스가 정확히 뭘 이야기 하고 싶어하는 것인지  잘 파악되지 않은게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대략적으로 정리해 본다면, 중세 초기에서 후기로 가면서 무덤 형태과 묘비명, 장식관련해서 일련의 점진적인 변화가 일어났고 이러한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죽음과 관련된감수성의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무덤과 관련한 가장 큰 세가지 변화가 무덤과 시신이 안치된 장소가 점차 엄격하게 일치하게 되었고, 비문이나 초상을 통해 고인이 생전에 지니고 있었던 개인성을 정의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해졌으며, 종말론적 불멸성만을 강조하던 기존의 문화에  현세에서의 추모를  결합시키면서 그 개인에 대한 기억을 영속화해야 하는 욕구가 강해졌다는 것입니다.


현대인에게는 무덤과 시신이 안치된 장소가 일치해야 된다는 사실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고인에 대한 추모 문화 역시 너무나 익숙한 것이지만, 중세 전반기까지만 해도 분묘의 익명성 그리고 매장 장소에 대한 무관심이 일반적인 태도였고 도리어 분묘의영구임대개념이 굉장히 생소한 개념 이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중세 중반에서 후반으로 가면서 무덤은 점차 가시적인 형태를 띠었고, 이러한 가시성을 드러내기 위해 묘비명의 문체 역시 침묵에서 간결한 수다로, 나아가서 불필요하게 장황하기도 한 전기적인 수사체로 변화 하였고, 내용 또한 간결한 개인 신상기록에서  개인 삶에 대한 역사 ,더 나아가 가족적인 유대감을 표현하는 것으로 변화 되었습니다.


아리에스는 이러한 무덤의 변화가 그 시대의 새로운 사회적 욕구가 반영된 결과였다고 이야기 합니다.  하나는 죽음에서 개인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새로운 욕구가 강해졌고, 또 하나는 이전에 경시되었던 가족관계가 점차 중요시 되면서 가족간의 유대감이라는 정서가 크게 강조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 때부터야  죽은 어린아이에 대한 애도문화도 새로 들어왔다고 합니다.)


바로 개인이라는 개념과 가족이라는 개념이 탄생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서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고 발견하려는 욕구가 바로 무덤들이 익명성에서 벗어나 추모적인 기념물로 변화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5장의 제목이 <횡와상, 기도상, 영혼>인데 진작 이것을 언급한 부분이 제일 정리가 되지 않습니다. ^^; 일단 이 기념물의 형태들이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아서 읽는데 어려움이 있고, 비슷비슷한 이야기 인것 같은데 그것의 차이가 무엇인지 잘 차별화 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한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자가 이 두 기념물을 중대하게 다루는 이유가 바로 이 주제 때문인 것 같습니다.  바로  횡와상과 기도상이 보여주는 죽음에 관한 세계관인데,  바로 죽음은 저 세상으로 떠나는 행위이지만 영원히 가버리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오랜기간의 수면 또는 휴식에 들기 위한것 뿐이라는 생각 그것입니다. 이것은 온전한 삶도 사후의 삶도 아닌 단지 삶과 유사한 수면상태를 가리키고 있는데, 바로 삶과 죽음 사이에중간자적이고 중립적인 상태가 있다라는 믿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아리에스는 이러한중립적인 상태에 대한 끈질긴 믿음이 교회 측의 반감에도 불구하고 그 명맥이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에, 중세에는인간 존재의 이원성에 대한 거부, 죽음과 삶의 대립에 대한 거부, 내세어서의 인간적 삶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천상의 존재들의 영광과 동일시하려는 데 대한 거부와 같은  심층적이고 집요한 거부의 움직임이 촉발되었다는 점을 중요시 여기는 듯 싶습니다.  인간 존재를영혼과 육신의 대립으로 보는 이원론적 사고방식 근대인의  죽음관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는  이후의 장에 더 상세히 나올것으로 예상합니다.


6장은 전환이라는 제목이 보여주었듯이,  죽어가는 자의 적극적 개입이 당연시 되었던  죽음의 순간에 관한 관점에  변화가 생기면서 우리가 죽음에 대해 가지는 관계에 전반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점을 이야기 합니다. 바로 죽음의 순간에 대해 평가절하하려는 태도가 점차 분명해지면서, 죽음에 관한 묵상은 더 이상 죽어가는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산 자에게 더 나은 삶을 살게 하기 위한 삶의 기술로 전환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죽음은 임종 순간이나 그것이 임박했을 때가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에 늘 생각해야 하는 대상이 된것입니다.


하지만 죽음이 삶 전반의 문제로 들어오면서 점차 죽음은 삶과 멀어지고 점차 무관심의 대상이 되었는데, 아리에스는 이러한 현상을근대인들이 죽음의 순간에 대한 거리감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이 거리감의  문제점이 삶에서 죽음의 문제가 점차 희석되는 것과 비례하여 삶에서 사물과 인간 존재에 대한 애착의 강도도 같이 약해진다는 데에 있습니다. 아마 아리에스가 이 책을 쓰면서 가장 크게 생각했던 문제의식이 이것이 아닌가 싶은데, <야생화된 죽음>의 장을 읽으면서 이 문제의식이 점차 분명히 드러날 것 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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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23 00:10
    횡와상(휴식)과 기도상(구원)을 통해 중세 사람들이 죽음을 자연스럽고도 편안하게 받아들였다는 점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죽음에 대해 과도하게 의미부여하지도, 지나치게 무관심해하지도 않았지요. 고독사에 대한 두려움이 팽패한 요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