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이 아카이브

7.26 소생 강의 내용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8-07-29 00:53
조회
57
(1) 이슬람과 법


-탈주체 철학과 이슬람

이슬람에 대해 공부하면서 주의해야 하는 것은 바로 대상화. 수니파와 시아파가 마치 실체가 있는 것처럼 나누어 그것을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고 뭐가 다르고 뭐가 다르지 않은지 논의하는 것은 킬링타임용 공부.

이슬람이 타력종교라고 할 때, 바로 '주체 없이 어떻게 윤리가 가능?'이라고 질문하지 말고 그동안 배운 탈주체 철학과 연계하는 질문이 필요. 그동안 배운 탈주체 철학에 대해 생각하며 이슬람을 공부해 볼 것.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다른 삶의 태도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를 질문하는 것이 필요.


-종교성

이슬람에도 기독교의 개념이 들어와 있지만 기독교와는 맥락이 다르다. 기독교는 현세를 늘 내세를 준비하는 단계로 설정하지만 이슬람은 내세를 말하면서도 그것을 중요하게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이슬람은 은둔이나 세상을 등지는 태도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가톨릭과 같은 수도원 제도도 없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 밖에 성직자 공동체를 만들지 않는 이슬람. 울라마 역시 속세에서 꾸란을 해석하는 특별한 집단이지 성직자 집단이라고 할 수 없다.


#신은 모든 것을 어떤 숭고한 목적을 위해 창조했다. 그러므로 인간도 현세를 엄숙하게 살아야 한다.

따라서 현세가 현실적으로 악이기 때문에 혐오하고, 세상을 도피하여 홀로 고독한 정적 속에서 해탈을 구하려는 인도적 사고방식, 즉 현세부정적 태도는 이슬람 본래의 입장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다음 장에서 말할 '내면으로 향한 길'을 택한 사람만이 그러한 입장을 취한다.

이슬람은 은둔이나 세상을 등지는 태도를 인간의 올바른 생활 방식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코란>은 수도원 제도에 대해서, 그것은 원래 기독교의 제도이지 이슬람교도의 것은 아니라고 명확히 말한다. (이즈쓰 도시히코, <이슬람>, 134쪽)


가톨릭은 어떻게 자기 삶의 일부를 포기하고 종교적 삶을 살 수 있는가?를 문제삼는다. 카톨릭의 종교성은 자기 포기에 있는 것. 불교의 스님, 가톨릭의 신부, 수녀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에 대한 능동적인 포기가 있는 사람들이다.

반면 개신교의 논리는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포기'가 없기 때문에 종교적이라고 하기 어렵다. 이런 개신교의 논리는 자본주의와 잘 맞는다. 즉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는 태도다. 재산, 결혼, 가족 등 어느 하나 포기하지 않는데 심지어 존경이나 영성까지 갖고 싶어 하는 것은 오히려 탐욕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왜 내가 좋아서 하는 일에 명성까지 따라오기를 바라는가?

카렌 암스트롱에 의하면, 종교의 기본적인 태도는 능동적인 자기 포기에 있다. 그런 점에서 개신교의 사제 제도는 과연 종교성을 담지하고 있는지?


-이슬람의 법과 윤리

그렇다면 이슬람의 종교성은 어떤 것일까? 이슬람은 신을 직접 만나는 게 아니라 현세 속에서 어떻게 신의 계울을 잘 지킬 것인가를 문제삼는다. 일상 속에 신을 가지고 와 버린 것. 개신교가 일상의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영성에 대한 추구로서 종교적인 영역을 따로 설정했다면 이슬람은 일상과 종교적인 영역을 합치시켰다고 볼 수 있겠다. 이슬람 종교적 패턴을 일상에 가지고 와서 세계의 스토리를 만든다. 종교는 세계와 나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모든 것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사건들과 나 사이의 유한성 그리고 간극을 어떻게 스토리화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 스토리 속에 내 욕망이 모두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 각각의 스토리가 어떤 욕망을 내포하고 있는가, 이것을 배워야 이슬람과 함께 나라는 인간도 알 수 있게 된다. 이슬람이 현세와 종교영역을 합치시킬 수 있는 것, 은둔 개념이 없는 이유는 이슬람의 모든 선악구분과 윤리가 <꾸란>이라는 성전에 의거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 다섯 가지, 즉 절대선, 상대적 선, 선악무기, 상대적 악, 절대악이 이슬람 법에서 가장 기본적인 윤리적 범주로 삼는 것이다. 이 다섯 가지 윤리적 원리에 입각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단호하게 분류하고 획일적으로 규정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단순한 형태로 생각한 이슬람 법의 구조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슬람 법은 신의 의지를 바탕으로 삼아 인간이 현세에서 살아가는 행동 방법과 인간 생활의 올바른 존재 방식을 남김없이 규정하는 일반적 규범 체계이고, 그것을 잘 따라 사는 것이 곧 신의 섭리에 인간이 참여하는 일이다. 또한 그것은 인간이 신에 대한 신앙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이기도 하니, 그런 의미에서 이슬람 법이 곧 종교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즈쓰 도시히코, <이슬람>, 142쪽)


이슬람의 법은 함리적인 서양의 법과 다르다. 경전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경전의 해석을 바탕으로 해서 인간의 일반적인 규범 체계를 다 정의해 놓기 때문에 인간의 합리성, 자연적 권리 등을 따질 필요가 없다.

이와 비슷한 체계로 유교가 있다. 유학을 종교라고 한다면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인간의 행위양식을 제시하는 등의 예의는 <예기>등의 옛 문헌에서 나온다. 유교는 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오래된 경전들이 인간의 일반적인 생활 규범을 전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인위적인 법과 자연적인 본성을 따로 구분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슬람은 단지 여기서 신의 계시라는 관념이 가미되었다. 신의 계시와 신의 계시를 바탕으로 만든 룰이 이슬람 법인 것. 이슬람 법은 늘 종교적인 것을 어떻게 일상적인 차원에서 논리적으로 만들어 낼 것인가?가 문제된다. 우리는 종교와 법이 분리되어 있고 그것들이 담당하는 영역이 각각 다르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종교와 법이 분리가 안 된다면 우리의 일상은 어떻게 되는 걸까? 우리 행동규범은 어디에 있다고 할 수 있나? 법? 종교?


이슬람 법은 이간 생활의 올바른 존재 방식에 대한 신의 의지를 법적으로 체계화한 것, 계약화한 것, 구체화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슬람 법은 전체적으로 명령과 금지로 이루어진 체계이다. 요컨대 신의 의지란 신의 명령이고, 그 부정이 금지이기 때문이다. 어떤 정해진 범죄 상황을 상정하고 그것에 대한 형벌을 마련하는 일은 결코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무엇을 해라, 무엇을 하지 마라'라는 명령과 금지의 체계이다. (이즈쓰 도시히코, <이슬람>, 143쪽)


그리스 철학에서는 노모스와 퓌지스가 구분된다. 노모스는 사회에서 만들어지는 규범이고 퓌지시는 자연을 일컫는다. 서유럽에서 자연과 법은 대립된다. 자연이란 인간의 감정과 본능이다. 본능을 가지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영역이 퓌지스다. 그러나 노모스는 인간이 형성하고 있는 사회, 인위적인 것, 사회로부터 도출된 코드화된 체계다. 이 둘이 대립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게 그리스 철학이고 서유럽의 법 체계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정서라든가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전통이 어떤 사회가 가지고 있는 법률과 어긋날 때, 이럴 때 우리는 질문하게 된다. 우리의 행위규범은 무엇을 따라야 하는가? 부모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공자는 자식으로서 부모를 고발하면 안된다고 했다. 하지만 법가의 시대에는 다른 대답이 나올 것이다. 안티고네 역시 국법보다는 관습법을 자신의 행위규범으로 삼았다. 이런 법적인 영역을 벗어나는 행위규범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슬람에서의 법과 해석

이슬람에서는 명령과 금지가 모두 신의 말씀과 연관된다. 그런데 이건 과연 어떤 문제일까? 가령 '이교도를 죽여라'라는 명령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설령 신의 말씀이라고 해도 법으로 젹용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신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이해하기에는 너무 큰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해석이 필요하다. 같은 구절이라도 해석이 어마하게 갈리는 것이다. 차라리 사제들 몇명이서 성경을 해석하고 그 성경이 성직자 그룹을 매개한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이때 종교와 세속은 분리되어 있고 인간의 행위양식을 하나하나 규정하는 해석이 아니라 종교적 영역에서의 해석으로 남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의 말씀으로 복잡한 행위양식을 처리한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이슬람에서는 사물의 본성이 선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이성이 선악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신의 의지로 선악이 결정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남의 물건을 훔친다는 행위 자체가 본성적으로, 혹은 이성적으로 나쁜 일이기 때문에 나쁜 것이 아니다. 신이 그것을 나쁘다고 결정했기 때문에 나쁜 것이다. 이처럼 모든 일에 대해 선, 악, 중성과 같은 그 이론적 성격은 신이 세계를 다스리는 의지에 따라 결정되었다. 그 전체가 법이라는 형태로, 즉 명령, 금지의 체계로서 바깥으로부터 인간에게 부과된다.

그러므로 법이론적 견지에서 보면 이슬람은 자연법 이론과 정반대 입장을 취한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 그 모든 것이 신의 의지에 달려 있다면 인간이 올바르게 행동하고 올바르게 살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보다 우선 신의 의지를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해서 신의 의지를 알아야 할 것인가? 말할 필요도 없이 <코란>을 통해서 알아야 한다. <코란>은 신의 의지를 직접적으로 인간의 언어로 옮겨서 표명한 유일하고 절대적인 자료이기 때문이다. (이즈쓰 도시히코, <이슬람>, 146~147쪽)


이슬람에서 인간의 행위는 신이 결정한 문제다. 이는 인간의 행위에 대한 책임이 본인에게 있다고 하는 우리의 감각과는 전혀 다르다. 사르트르는 역사를 끌고 가는 것은 지식인들의 어깨에 있다고 했다. 이런 세뇌를 듣고 산 세대라면 참여적인 지식이 되어야 하며, 사회 불의에 눈감고 참여하지 않으면 부끄러운 지식인이게 된다. 이러한 자기검열이 역사가 되고 행위양식이 되는 것이 사르트르의 역사관이다. 하지만 이후 구조주의에서는 역사에 올바름이란 없고 그 가치체계는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천명했다. 그때 지식인들은 비로소 해방감을 얻었다고 한다. 반드시 옳은 것, 꼭 인간이 따라야 하는 것은 본래 주어지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역사의 책임이라는 무게를 던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신의 뜻대로 산다는 것은 오히려 가벼운 것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신의 뜻이 진짜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인간이 결국 이 모든 스토리를 만들어냈고, 그 세계가 만들어지는 역사적 맥락이 있다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세계에서는 내가 결정하는 것에 따라 다음이 결정되었다. 하지만 꾸란과 법에 따라 윤리를 구성하는 이슬람은 전혀 다른 삶일 것이다. 이는 국가나 외부적 초월적 가치에 종속되지 않고 어떻게 우리의 가치를 만들까 하는 질문과 연관된다. 상이하지만 새롭게 주체의 문제를 건드리는 것이 이슬람의 법과 꾸란에 대한 감각인 것.

이슬람이라는 타자를 받아들일 때 그 타자들의 사고가 어떻다고 평가하는 것은 나와 아무런 연결이 되지 않는다. 극단이더라도 그 극단을 내가 받아들여야 새로운 가치와 접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슬림의 삶이 꾸란에 입각해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무엇에 의지하여 살고 있는가? 신의 의지는 운명 같은 것인가? 아니라면 신의 의지는 무엇이라고 볼 수 있나?


-하디스와 생활윤리


#무함마드에게 누군가가 무엇을 질문하고, 그것에 대해 그가 대답한다. 이것이 보통의 형태이자 가장 간단명료한 경우이다. 그런데 질문이 아니라 예언자의 눈앞에서 무엇인가 사건이 일어나고, 그것에 대해서 그가 의견을 말한 경우도 있다. 또는 말 대신에 몸짓이나 눈짓으로 자신의 반응을 드러내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누군가가 뭉서을 질문해도 예언자가 침묵하고 대답하지 않은 경우, 혹은 눈앞에서 무엇인가 일어났는데도 그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경우, 그것을 <하디스>는 주의 깊게 기록했다. 그러나 <하디스>의 기록자는 보통 자신의 의견은 전혀 기록하지 않기 때문에 예언자의 침묵 또는 무반응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해석이 문제가 되었다. (이즈쓰 도시히코, <이슬람>, 149쪽)


하디스는 무함마드의 언행을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무함마드는 신이 아니다. 이슬람에서는 굳이 그를 신격화 하지 않는다. 애초에 무함마드는 계시를 받은 예언자다. 그런데 그의 이슬람에서는 그의 언행을 경전처럼 만들었다. 우리는 공자의 언행을 법으로 삼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은 무함마드의 언행을 법으로 삼았다.


-동서 교류지에서의 이슬람

이슬람은 인간이 유한하다는 것에 대한 절대적인 인정이 있다. 이런 점은 동양과 비슷하다. 인간 중심으로 세계를 보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서양과도 비슷한 점이 있는데 바로 신이라는 초월자를 상정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신은 너무나 절대적이라 동일화 될 수 없고 인간은 다만 납작 엎드릴 뿐이다. 동서양이 왔다갔다 하는 그 어디쯤에서 탄생한 종교 답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슬람의 발상지를 답사하고 왜 이슬람과 같은 종교가 나올 수밖에 없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종교와 정치

이슬람의 학문은 계속되는 해석학이다. 이슬람의 경전을, <꾸란>을 어떻게 당면한 현대에 맞게 해석할 것인가? 이것이 늘 문제가 된다. <꾸란>은 절대적(무오류성)이기에 부정되지 않고 다만 해석될 뿐이다. 그리고 그 해석은 계속해서 달라진다.

불교도 물론 다 해석이 다르다. 하지만 그 해석이 전쟁을 불사할 정도로 중시되지는 않는다. 다만 해석에 따른 행위규범이 달라지는 것일 뿐이다.

불경과 달리 꾸란은 절대적인 하나이기 때문에 무수히 많은 해석이 가능하고 또 꾸란을 해석하지 않고 사람들은 정치 세력을 형성할 수 없다. 정치와 종교가 함께 가는 이슬람 사회. 가령 호메이니는 종교 지도자였기 때문에 정치적 지도자일 수 있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상당히 낯선 모습이고 또 푸코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왜냐하면 혁명이라고 한다면 보통 정치 강령과 함께 하며 종교색은 배제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는 이란에서 혁명이란 늘 정치와 종교가 함께 가며 현대에도 중요한 문제다.

우리는 철학, 종교, 정치가 구분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철학은 학문, 정치는 공동체, 종교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영역을 일컫는다. 그런데 이 분리는 정말 합리적인 것일까? 우리가 합리적이라고 하는 것은 보통 서구 근대의 합리성을 답습하는 것에 가깝다. 그래서 종교와 학문과 정치가 통합되어 있는 이슬람을 보면 낯설고 또 그것들을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 하지만 이 세 가지를 우리는 정말 구분할 수 있을까? 이는 우리에게도, 서구의 생활방식이 자리잡기 시작한 이슬람 세계에서도 중요한 문제다.


#현대 아랍 세계의 대표적 논객 라시드 리다는 일찍이 "이슬람 르네상스는 오로지 이즈티하디의 문을 여는 일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즈티하드의 문을 다시 개방한다고 해도, 이슬람교도 누구나가 마음대로 성전을 해석해도 괜찮은 상태로 만들자는 것은 아니다. 원래 이즈티하드는 학술어적으로 <코란>과 <하디스>에 정통한 학식 있는 사람이나 뛰어난 학자, 즉 최고의 울라마에게만 허용되는 일을 의미했다. 그러한 자격자들이 각각 성전에 대한 새로운 법적 해석을 제시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삼아 이슬람 세계가 직면한 현대적 문제에 새롭고도 완전히 이슬람적인 해석을 찾아낼 가능성, 이것이 라시드 리다나 그와 의견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이즈티하드의 문을 닫지 않았던 시아파 이슬람을 제외하면, 아랍 세계에서는 여전히 이즈티하드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옛날 그대로인 이슬람 법으로는 아무리 해도 현대 세계에서 살아갈 수 없다고 믿는 사람들은 이슬람 법을 깨끗이 버리고-수니파적으로 생각하면 이슬람 공동체를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서구주의자가 되어 서양의 근대법에 따라 살아간다. 익엇은 현대 이슬람이 안고 있는 커다란 문제 가운데 하나로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현대의, 적어도 수니파(다수파)에 속한 사람들이 당면한 과제이다. (이즈쓰 도시히코, <이슬람>, 159쪽)



(2) 내면으로의 길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것만이 전부일까?'

수니파는 제도와 법률로서 꾸란을 해석하기 때문에 철학적으로 다룰 것은 별로 없다. 법학의 체계로 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반면 시아파는 드러난 현상이 전부일까? 라고 질문하는 종파다. 모든 것을 해석된 것에 그대로 맞출 수 있다고 한다면 인간은 생각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게 정말 전부일까? 라고 생각한다면 '꽃이 피었네, 알라의 뜻이여' 라고 말하더라도 온갖 해석의 여지가 생겨난다. 가령 이 구절에 대해 이렇게 질문하는 것이다. '알라의 뜻은 꽃 중 어디에 깃들어 있는가? 잎인가? 색인가?' 이것이 드러난 현상에 대해서 질분하는 시아파의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현상 이면, 인간의 내면, 세계의 내면에 대해서 질문하기.

시아파의 철학에 굳이 내면이라는 말을 붙이며 궁극적으로 시아파와 수니파가 다른 것이냐고 한다면 문제는 있다. 어쩄든 두 파 모두 꾸란을 해석하고 신의 계시의 의미를 파악하려고 하기 때문에. 하지만 '정말 그게 전부일까?'라고 묻는 시아파는 확실히 신의 말씀을 어떻게 우리의 계율로 가져올 것인가?를 질문하는 수니파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가령 '도가 있다'라고 할 때 납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우리가 '어떻게 도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는가?'를 질문하는 사람이 있다. 도는 분명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를 아는 것은 아니다. '도는 똥에도 있다'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도 온갖 질문을 할 수 있다. 도가 미물에도 있다는 뜻인가, 도는 더러움도 가리지 않는다는 뜻인가 등등. 그 말 자체를 해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현상이 있다면 그 현상의 깊은 곳에는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다른 무엇이 있는가?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다. 인간이 선을 행한다면, 그런 선을 행하게 하는 힘은 뭐지? 상상초월의 재난 앞에서 단순히 우리는 '자연의 법칙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이 가능하게 하는 힘은 무엇인지 질문하게 되지 않을까?

인간은 드러난 것만을 보지만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드러남을 가능하게 하는 차원에 대한 생각이 존재한다. 들뢰즈의 잠재성, 본질주의자의 본질, 깊이. 계시로 내려진 알라의 '뜻'.

(이즈쓰 도시히코의 <의식의 본질>을 읽으면 이에 대해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다. 이슬람, 서양, 동양 많은 철학에서 나름대로 이즈쓰 도시히코가 인간이 사유하는 비슷한 방식을 이끌어내려고 하는데 그 중 하나가 '겉으로 드러난 의식이 있는데 우리는 그 의식의 심층과도 연관을 맺는다'라는 것. 본질, 무의식 등등. 이름 붙이는 것은 다 다르지만 그런 차원을 인간은 사유한다)


-예언자란 누구인가


#이슬람적 맥락에서 우라파는 종교를 영성적, 정신적 내면성에서 체득하려 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들의 눈으로 보면 울라마들이 만들어 낸 공동체적 종교, 율법적, 샤리아적 종교는 내면 정신을 결여한, 또는 내면 정신을 무시한 외면적 종교이며 외면주의의 산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내면적 종교, 내면화된 종교를 우선으로 하는 우라파는 울라마의 샤리아 지상주의, 즉 종교로서의 이슬람을 그대로 샤리아와 동일시하고 법이 곧 종교라고 생각하는 울라마의 율법적 정신에 반발하여 격렬한 대립을 하게 된다. 그것이 얼마나 격렬하고 끔찍한 것이었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목숨이 그 때문에 사라졌고 이슬람 문화를 붉게 물들였다. 괴로움으로 가득 찬 이슬람 문화의 음울한 측면이다. (이즈쓰 도시히코, <이슬람> 167쪽)


샤리아 지상주의는 종교로서의 이슬람과 법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종교와 법의 일치. 이렇게 생각하면 사실 단순하다. 하지만 인간은 계시나 영감 체험을 하면서 단순히 정해진 것을 따르지 못한다. 이것은 자기 안에 있는 끊임없는 타자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예언자라는 존재는 다른 사람들이 못 듣는 소리를 듣는 존재다. 못 보는 힘을 보는 존재. 그래서 들뢰즈는 예언자에 대해 '불평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그들은 '왜 나만 들은 거야!'라고 끊임없이 불평한다.

남들한테 안 보이는 것이 보이고 들리는 것은 유난히 살아가는 일에 근심 걱정이 많은 사람들이다. 그냥 살아지지 않는 사람들. 도무지 남들 사는대로 살아지지 않는 사람들 눈에는 다른 것이 보이고 들린다.

전승에 따르면 문왕은 <주역>을 감옥에 갇혀 썼다고 한다. 고난을 당한 사람이 쓴 책이 <주역>인 것이다. 사실 고난을 '당한' 것이 아니라 고난을 '자초'했다고 하는 것이 옳다. 남들과 동일하게 살지 않는 삶을 살았다는 것, 그것이 고난으로 드러난다.

고난(passion)은 많은 어감을 지닌 단어다. 고난, 열정, 겪음으로 번역되는 이 단어. 고난이란 일단 삶에 대한 열정을 가져야 한다. 자신이 안온할 수가 없는 태도가 바로 고난인 것.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기저기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보이는 것이 바로 passion이다. 남들과는 다른 에너지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니체가 말하는 천재는 이런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천재는 신이 내린 천부적 재능을 소유한 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 남다른 에너지로 세상을 마주한 자다. 그런 자는 가치를 전복하는 위험한 자이기 떄문에 세상이 가만히 놔두지 않으며, 또 그들 자신이 세상에 발생하는 새로운 힘을 본다.

문왕이 썼다는 <주역>은 사실 자연현상을 관찰하고 그것을 군자의 삶에 적용시킨 것이다. 즉 남들 눈에는 똑같은 자연현상이 군자의 삶으로 보였던 것. 이건 계시나 다름없는 현상이다. 그러니까 예언자는 세상에 대한 열정이 있는 사람이지 단순한 나르시스트가 아니다.

무함마드는 메카에서 자신이 돈만 벌겠다고 하면 계시를 받을 일이 없었을 것이다. 전체 흐름에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고 감당할 수 없는 힘이 자신을 덮쳐왔을 것. 그리고 자신이 해체되는 느낌이 계시와 영감의 순간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예언자들의 시대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오는 것이 사제들의 시대다. 예언자들의 시대에 나오는 말은 금지와 명령이 아니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이 본 것을 얘기할 뿐이었을 것. 세상에 댛나 열정과 근심. 그런 사람들은 누군가가 해석해 놓은 것들에 만족하지 못하는 자들이었다. 해석이 마음에 안 들거나 해석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자가 바로 불평많은 사람, 예언자.


-수니파의 도주선 시아파

시아파는 울라마의 율법적 정신이 나이브하다고 생각하는 반면 수니파는 시아파의 태도가 하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리고 꾸란에 대한 해석이 공동체를 좌우하므로 이 해석 문제는 그냥 넘어갈 수 있는 게 아니었을 것이다.

울라마는 종교와 법을 일치시키는 반면 우라파는 자기 스스로 예언자가 겪은 그 신비를 겪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계시의 해석이 견고한 사회 체제를 유지하는 제도로 환원되는 것에 반발한다. 시아파는 이슬람에 대한 일종의 도주선이라고 할 수 있는데, 법과 종교가 정교한 율법체제를 만드는 것에서 억압을 느끼고 그것을 피해 달아나는 힘인 것이다. 현상에 드러난 것만이 아니라 그 현상에 깊이 내재되어 있는 체험을 중시하는 것.

왜 성리학자들, 12세기 주희와 그의 스승들은 노장을 공부하거나 불교를 공부했을까? 아마 그들은 <논어>를 읽는 것만으로는 충족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경전을 법으로 삼는다면 경전이 족쇄가 되고, 그러면 그럴 수록 다른 길을 모색하려는 인간의 욕망이 작동하는 것. 율법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율법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가 구속되어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시아파에서 더 극단으로 나아간 것이 바로 수피즘. 여기서 수피즘은 '너'는 '나'라는 것을 느낄 떄 우리는 존재의 견고함이 해체되고 다른 차원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때의 앎은 외부적인 대상을 나와 분리해놓고 하나씩 알아가는 일이 아니다. 인간은 그런 차원에서 완전히 만족하지 못한다. 자기가 해체되는 경험, 내가 없다는 것을 느끼는 경험을 통해 충족감을 느끼게 되는 것.


-시아파 보충

>시아파는 태생적으로 비극적/운명적이라고 한다. 이것은 아마 이란 서사시를 보면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문제일 것. 기원에서부터 무함마드 사망 이래 현세가 잘 굴러가고 있지 않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시아파는 자신들이 충만함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한다.

이는 쇼펜하우어의 생각과 비슷하다. 그는 개체로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 슬프고 비극적인 경험이라고 여겼다. 왜냐하면 개체성으로는 세계의 본질을 체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현세를 살아가며 결여를 느낄 수밖에 없다. 이 비극성을 넘어가기 위해서 종교와 예술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의 감각과 우리의 현존으로 판단하고 옳고 그르다고 하는 것을 멈추게 하는 무아의 체험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은 예술이므로.

 >신은 모두 계시로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데 우리는 그 신의 계씨를 못 찾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바로 시아파다. 우리는 눈 먼 사람들이고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신의 뜻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 하키카(감춰진 본질), 진리, 실태, 실상, 리얼리티, 초월주의. 그런데 이 초월적인 진리 내지 리얼리티를 어떻게 내가 깨달을 것인가? 이렇게 질문한다는 점에서 시아파는 주체주의라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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