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이 아카이브

8.2 소생 강의 내용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8-08-05 22:00
조회
53
-<의식과 본질>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동서양을 다 가로지르면서 그것도 더군다나 이슬람까지 가로지르면서 계속 그 문제를 변주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의식과 본질>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정리를 잘한 책. 좀 더 젊을 때 읽으면 얘기도 많거니와 어렵기도 하고 따져가야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기본적으로 우리가 이슬람 철학을 배우나기보단 사유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생각해 볼 것. 우리가 생각한다고 할 때 뭘 생각하는 걸까. 이즈쓰 도시히코가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생각을 진행한다고 할 떄 근본적인 문제를 의식과 본질이라는 키워드로 일관되게 푼 것.

우리가 현상이라고 부르는 것, 내 앞에 나타난 이 세계는 뭔가? 이런 질문이 들 때.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가 어떤 것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눈이 있따면 미세한 움직임까지 볼 수 있을 것이다. 세계가 계속 변화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 그리고 거꾸로 굉장히 멀리서 보면 모든 것은 멈춰 있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렇다면 뭐가 세계일까? 이런 문제. 이런 것이 문득 궁금해지는 순간들이 있다.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의 문제. 헤라클레이토스는 멈춰 있는 것은 없다고 했다. 반면 파르메니데스는 사실 움직이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했다. 뭐가 옳다고 할 수는 없는 문제다. 내가 그 사유와 접속해서 내가 궁금하다고 생각했던 문제를 풀어내는 데 더 효과적이기 때문.

니체와 같은 텍스트, 즉 잘 안 잡히는 텍스트를 읽으면 그 함축이 흥미롭기도 하다. 그런데 반대쪽에는 간명한 텍스트가 있다. 예를 들어 <논어>. 문제를 간단하고 명료하게 만드는 텍스트.

공부를 한다면 어떤 텍스트를 읽어도 재미있을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도그마화를 경계해야 하는 것. 모르는 게 있어도 재미난 것을 캐치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질문들

의식이란 뭘까? 어떤 공부를 하더라도 계속 인식의 문제가 제기된다. 우리가 의식 속에 떠올리는 문제는 세계인가? 세계와 나는 그 의식 속에서 어떻게 섞여 있는가? 본질이란? 내가 보는 건 그냥 보는 이대로가 다일까? 보는 것 말고 궁극적인 무언가가 있을까? 발생의 차원, 잠재성의 표면 등 그런 차원은 왜 필요한 것일까? 철학은 우리가 지각하고 감각하는 세계에 대해 이건 어떻게 발생하는 거지? 라는 질문이 있어야 한다. 철학이란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어떻게 내 눈에 보이는 것인지, 난 뭘 근거로 말하는 것인지를 문제삼는 것이다. 문득 경험이 우리에게 이런 걸 선사할 때도 있다. 가령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할 때.

내가 어떤 것을 경험한다고 생각하는데 이게 경험한 것인지, 꿈인지 왜 그런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모호할 때. 모든 것이 물질적인데 모든 것이 환상 같은 순간.

시간은 가까이에서 보면 움직이지만 멀리서 보면 정지해 있는 것 같다. 별도 마찬가지다. 별에서 인간을 보면 인간이 뭘 만들어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아주 작은 먼지 입장에서 뭔가를 보노라면 미세한 진동 하나가 폭풍을 만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전혀 다른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들이 있다. 동양과 서양, 기독교와 이슬람.

이슬람에서 신과 존재의 관계는 뭘까. 신에게 절대복종이라는 이 의식의 구도는 어떤 힘의지가 내재해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근본적으로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사물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타인이다. 모두가 나라는 것의 실존을 느끼지만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는 볼 수 없다. 내가 말하는 것이 어떤 진동으로 전달되는지 나는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세계는 이미 나와 완벽하게 불호하고 있다. 나는 이야기를 하면서 이야기를 하는 내 이미지를 떠올릴 수는 없다. 남이 나를 받아들이는 것과 내가 나를 의식하는 것은 일치하지 않는 것. 이 세계와 나는 완벽하게 만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 자기만 모른다. 세상은 만천하에서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아는데. 나는 나 자신이 좋은 것과 친절한 것을 알지만 밖에서는 허식, 욕심으로 본다. 내가 구성하는 세계와 사람들이 구성하는 내가 일치하지 않는 것. 우리는 마치 그에 일치하는 것처럼 사고하는데 말이다.

내가 사과를 볼 때 내가 보는 사과는 정말 사과인가? 내 앞에 있는 사과가 사과 자체라고 할 수 있나? 나는 사과를 빨갛고 동그란 것으로 보는데 저기 백미터 떨어진 사람은 내 앞에 놓인 것을 작을 공으로 볼 것이다. 그럼 도대체 내가 사과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런 어긋남에 대한 철학적 질문은 많이 있다.

가령 장자가 말하는 나비와 장주의 꿈. 그리고 몽테뉴가 말하는 '내가 고양이와 놀아주는 것일까, 고양이가 나와 놀아주는 것일까?'와 같은 질문. 나는 내가 의식하듯 세상과 만나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 목소리를 들을 수 없고 우리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볼 수 없다. 내가 생각하는 주체의 상을 통합할 수 없는 것. 그럼 나는 있다고 할 수 있나? 무엇이 나인가?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되묻기 시작하면 내가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철학과 예술이란 내 앞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질문하는 것. 동그라니까 동그랗게 찍고 그리면 되는가? 나는 동그랗다고 감각하지만 그걸 찍어내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사물에 있어서 무엇을 사유해야 하는가?


-'있다'란?

나는 사람들과 함께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리얼과 리얼하지 은 것. 이것은 기술이 발달한 현재 큰 문제다. 뭘 '있다'고 할 수 있는가? 가령 메일함은 있는 것일까? 메일은 있는 것일까? 어떤 공간성도 차지하지 않는 그것이? 연장적 차원이 없고 접속하지 않으면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나?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뭐지? 이런 물음이 산적한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 우리다.

기억에 대한 문제도 있다. 기억은 어디 있는가? 우리는 과거에 어땠다고 말하면서 살지만 과거란 실재하는가? 있으면 어딘가에 있어야 하지 않는가? 그렇지만 없다고 할 수도 없다. 우리는 어제 일을 기억하고 있지 않던가. 없다고 할 수는 없는데 있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을 우리는 뭐라고 할 수 있는가? 있다/없다 라는 말 자체를 흐려버리는 차원이 있다.

이즈쓰 도시히코는 인간의 식의 여러가지 서로 다른 존재양상이 어떻게 본질을 포착하고 있는지를 실재성과 존재성의 문제로 고찰하고자 한다. 그는 키워드를 가지고 정리하는데 좋은 공부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無의 문제를 궁금해 한다면 다종다양한 無에 대한 철학이 세계적으로 있다. 아라비아 숫자 0은 희한한 문제다. 그 자체로 아무것도 아니지만 중요한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0이 없으면 마이너스와 플러스가 있을 수 없다.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데 분명히 작동을 하는 0. <장자>에서 '도의 지도리'라고 말하는 것도, 노자에서 '바큇살의 한가운데'라고 하는 것, 불교의 空. 실체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데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설명해주는 개념들. 無를 동서양에서 어떻게 사유했는지 보고싶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텍스트를 보면 문제의식에서 걸리게 된다.

도대체 사물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플라톤도 이런 문제의식에서 이데아를 사유했다. 눈 앞에 생기는 사물은 계속 변하는데 계속 변하는 것은 사유할 수 있나? 붙잡을 수 없는데? 변하는 것은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 이데아를 도출해냈다. 우리가 머릿속에 갖고 있는 생각들, 개념들은 무엇을 지시하는가? 내 생각은 어떻게 구성된 거지? 사물과 나의 의식, 이걸 가지고 철학을 훑어본 책이 <의식과 본질>

유식불교도 이런 문제를 가지고 사유했고, 세계라는 게 있어서 그것에 대한 의식을 형성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의식이 세계가 있는 것처럼 만들어냈다는 생각, '식'으로 세계를 환원해내는 사유를 도출해냈다. 이런 문제를 경유해야 윤리 또한 나올 수 있다.

윤리의 문제는 '잘해준다'의 문제가 아니다. 윤리의 문제는 나는 무엇이고 쟤는 뭔가, 나는 저 사람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내가 저 사람에 대해 만들어놓은 의식은 과연 저 사람인가? 이런 것들을 질문해야 저 사람과 나의 관계에 대한 사유가 만들어진다. 이것이 지혜. 지혜가 없으면 망념만 남는다. '내가 잘해야', '저 사람만 잘해야' 라고 망념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다르게 사유해야 관계가 열린다. 그래서 정말 잘 살고자 하는 사람은 지혜를 가지고 이 세상과 나를 해석해 낼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푸코

푸코는 어마어마한 석학이며 현상학, 사르트르, 구조주의 등의 세례를 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초기에 인식의 문제를 가지고 책을 썼다. 역사와 접목해서. 이 푸코의 철학 여정에서 다소 뜬금없이 보이는 부분이 말년의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말년의 푸코는 사람들이 보기에 갑자기 뜬금없어 보이는 질문을 던진다. 나는 나 자신의 진실을 말하는 자인가? 이 질문이 푸코를 사로잡았다. 여기에는 많은 질문이 함축되어 있다.

우리는 참/거짓, 옳고 그름 판단체계를 누구나 갖고 있다. 그래서 틀렸어, 옳아, 아름다워 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다. 우리 자신의 옳음, 우리 자신의 진실성은 어떻게 확보되는가? 그걸 지금까지의 서양철학은 교회, 국가 등 나 밖에서 찾았다. 우리에게 어떤 정치적 견해가 생겼을 때 국가, 교회, 역사를 갖고 온다.

우리 또한 우리 옳음의 근거를 외부에서 가져온다. 어떤 책에 있다. 가령 위화는 토론을 할 때 '마오 아니면 루쉰'을 근거로 들면 바로 토론이 끝났다고 했다. 천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해도 무조건 루쉰 선생이 말했다고 하면 게임이 끝났던 것. 이런 것이 진리라면 과연 진리성은 어떻게 증명되는가?

이 문제는 푸코에게 영성이라는 문제로 나타났다. 과학적이고 지적인 푸코가 갑자기 영성이라는 문제를 들고 나왔을 때 사람들은 놀랐다. 이란에 가서 푸코가 본 것은 영성과 혁명이었다. 어떻게 과학적인 합리주의로 무장한 자들의 혁명이 아닌 다른 혁명이 가능한가? 호메이니에게 이란 사람이 열광한 이유는 과학적인 역사법칙을 호메이니가 갖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냥 영적 지도자 호메이니였다. 그리고 호메이니가 원한 혁명은 이슬람 전통을 지키는 혁명이었다.

혁명, 공동체, 갖고을 말할 때 근원적인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혁명을 무엇으로 하는 것일까? 혁명을 정말 과학적으로 무장한 의식으로 한다면 사회주의는 왜 망했을까? 우리가 의식으로 무장해 혁명을 일으키면 뭐가 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가? 뭐가 혁명인가? 우리를 억압하는 것들에 대해 참을 수 없어 그것들에 맞서 좋은 삶을 살고 싶다고 할 때 뭐가 '좋은' 삶이지? 어디서 갖고 와야 하지? 이런 것을 말할 때 우리는 '나는 도대체 무엇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좋음은 어디서 발생하는가?'라고 질문할 수밖에 없다.

이때 영성이란 무엇일까? 마음? 정신? 이때 마음이나 정신은 뭘까? 이런 백지상태에서 하는 질문을 통해 자기와 세계의 관계를 구성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두 가지의 삶이 있다. 하나는 삶, 세계는 그냥 이렇다고 규정성을 계속 믿으면서 규정성 안에서 살아가는 방식이 있고, 우리에게 강요되는 규정성에서 계속 미끄러지며 사는 것. 그리고 미끄러지면서 살겠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런 문제를 피할 수 없다.


-구토

#존재의 심연을 슬쩍 훔쳐보는 구토의 체험을 묘사할 때 사르트르가 그 존재가 나타나기 직전의 상태로서 언어 탈락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척 흥미롭다. 사르트르는 <구토>에서 "조금 전 나는 공원에 있었다"라고 이야를 끄집어낸다.

마로니에의 뿌리는 바로 벤치 아래에서 깊게 대지를 찌르고 있었다. 그것이 뿌리라는 것은 벌써 나의 의식에는 전혀 없었다. 모든 말이 사라졌다. 그것과 동시에 사물의 뜻도, 그것의 사용방법도, 또 그 사물들의 표면에 인간이 그어놓은 약한 표지의 선도...... 등을 웅크리게 하는 느낌에 머리를 떨어뜨리고, 단지 혼자서 나는 완전히 생생한 그대로의 그 시커멓고 울툭불툭한 무서운 덩어리와 마주하고 앉았다. (이즈쓰 도시히코, <의식과 본질>, 39쪽)


본질이 사라진 존재의 심연이 불러 일으키는 구토. 내가 알고 있는 규정성이 모두 무너져 내리는 것. 누군가가 배신을 당하는 순간 같은 때 느껴지는. 내가 '이럴 거야'라고 생각했던 모든 규정성이 무너진 사건을 마주했을 때 어떤 말로도 포착할 수 없게 되고 그 순간을 사르트르는 '구토'라고 표현했다. 가령 아우슈비츠에서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은 보는데도 보이지 않는 경험이다. 볼 수가 없는 경험. 너무 끔찍하기 때문에 언어적인 규정성으로 어떻게 되지 않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사랑하는 존재가 갑자기 죽을 경우 어떤 말로 규정되지 않는 것처럼. 뿐만 아니라 어떤 사물을 바라볼 때도 그런 순간이 온다. 이런 순간을 묘사한 것이 '구토'. 모든 규정성이 탈각된 상태에서 들어오는 물질성.

베르터 헤어조크의 영화나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같은 경우, 너무나 거대한 정서가 확 닥치는 장면에서 그런 느낌이 드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 인간은 존재의 해방을 느끼기 보단 지금까지의 규정성에 얽매여 살았기 때문에 어지럼증부터 느끼게 된다.

무함마드의 계시도 그런 경우 아닐까? 심각한 우울증에 빠져 규정성을 가지고 세계를 볼 수 없게 된 순간 계시가 온다. 규정성이 완전히 사라지고 그 덩어리가 나에게 덩어리 자체의 존재로 다가올 경우 인간은 급격한 어지럼증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현상학적 사례를 말하며 이즈쓰 도시히코는 질문한다. 사물은 도대체 어떤 것인가? 우리는 나무라는 규정성을 가지고 나무를 보는 게 아니란 말인가? 규정성을 가지지 않고서는 사물을 보지 못한다면 그 사물이라고 말하는 본질은 과연 사물에게 있는가? 이런 질문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그래도 사물을 그 사물이라고 규정해주는 무엇인가가 있다/없다.

이 질문은 신에 대해 말하면 더 복잡해진다. 이슬람 뿐만 아니라 종교가 있든 없든 신이라는 존재는 어떻게 봐야 하는가? 신을 믿지 않아도, 눈에 보이는 존재가 전부라고 우리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가령 동양에서 귀신은 음양의 작용이다. 그 작용이 덩어리로 나타난 것. 그걸 보는 사람은 그의 음양 기운이 특이하게 작동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 그렇다면 귀신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있는 것. 누군가는 신이라고 말하고 과학자들은 에너지라고 말할 것이다. 에너지란 포착될 때가 있지만 그 자체로 우리에게 감각되는 것은 아니므로. 동양철학에서는 도라고 말할 것이다. 도는 있는가 없는가?


-무슬림의 세계인식

무슬림은 뭘 느끼는 것일까? 뭘 느껴서 다섯 번 절할까? 그런데 이슬람에서는 그렇게 기도하고 절하는 게 권력문제가 아니다.일반 사람들은 그냥 사원에 가서 절한다. 그럼 이때 무슬림들은 뭘 느끼는 것일까? 뭘 느끼길래 스스로를 알라의 노예라고 할까? 그럼 우리는 세계에 대해 의식을 어떻게 구성하는 것일까? 이런 관념에서 타자의 문화를 다시 규정해 볼 수 있다. 무슬림은 세계를 어떻게 보는 거지? 이걸 이해해야 그들의 공간, 세계에 대해 질문할 수 있게 되는 것.

타자를 만나는 것은 나를 만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럼 무엇 때문에 저것을 이상하다고 느끼는 것일까? 나의 의식이 전제하고 있는 것과 그들이 전제하는 것은 같을까? 이렇게 질문할 때 나는 나 자신에 대해 낯설게 느낀다. 타자에 대해 말할 때 나에 대한 다른 관점을 갖게 되는 것이다.


-세계의 구성

탈레스는 세계를 물이라고 했다. 그건 아마 탈레스가 물가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물을 보다가 물안개, 비 등 물이 물로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물로 세계가 구성되어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럼 그가 보는 세계를 틀렸다고 할 수 있나?

버스에서 게임하고 있는 사람은 그 게임 속이 절대적인 세계다. 내리는 벨을 눌렀는데도 끝까지 화면 액정에서 눈을 떼지 않는 것. 그럼 그는 게임을 한다는 의식을 갖고 거기 있는 것일까? 게임을 할 때 우리에게는 온갖 마음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별 거 아닌 것에도 마음이 들어가게 된다. 게임의 현실이란 무슨 현실이까? 게임이 인간의 감각을 어떻게 바꾸는 것일까?


-언어와 의미

#X가 일정한 이름을 얻음으로써 일정한 사물로 고정되고 응고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그 사물로서 다른 일체로부터 식별시키고 다른 일체와 모순율적으로, 즉 'X는 X 아닌 것이 아니다'라는 형식으로 대립시키려는 무엇이 없으면 안 된다. 즉 X의 본질 인지 내지는 본질 이해가 있어야 한다.

우리의 일상세계란 말하자면 이 일차적이고 원초적인 본질 인지의 과정을 생략하거나 무시하고 처음부터 이미 완성된 사물로서 간주된 존재자가 만들어내는 의미 분절적인 존재지평이다. 우리는 이러한 존재지평에 나타나는 세상에서 주체로 존재하고, 우리를 둘러싼 그 사물을 객체로서 의식한다. (<의식과 본질> 41쪽)


의미분절이란 우리가 언어를 가지고 A는 A라고 분절적으로 세계를 의식하는 것이다. 일상 속에서는 그래야 한다. 그것을 들뢰즈는 코드화라고 했다. 물질적인 차원도 마찬가지다. 모든 물질은 결합하려면 서로의 코드에 의지해야 한다. 의미분절. 물질적 차원에서, 의미론적 차원에서 한 번씩. 그리고 나는 인식주체. 내가 인식하는 것은 인식대상이다.

이 의미분절적인 존재지평에서 나를 주체로, 내 밖을 객체로 의식하는 것이 일상생활이다. 그때 의식은 항상 무엇에 대한 의식이다. 대상에 대해 성립하는 의식인 것.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일상 속에서 그것에 길들여져 있가보니까 언어나 본질 탈락이 일어나면, 다시 말해 어떻게 해도 분절할 수 없는 존재를 만나면 괴물(타자)라고 부른다. 그런데 우리는 왜 괴물이라고 할까? 이름붙일 수 없는 사물이니까. 아무리 위험해도 우리는 이름을 붙이고 나면 위험을 느끼지 않는다. 우리가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할 때는 규정될 수 없는 무언가를 만났을 때다.

공포영화가 클리셰를 사용하는 것은 무섭지 않다. 우리가 아는 팔이 잘렸을 뿐이고 머리가 잘렸을 뿐이다. 진짜 공포영화는 공포감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가령 히치콕의 새는 새가 인간을 공격하는 장면이 아니라 '셀 수 없이 많은 새'를 보여준다. 셀 수 없느 것에 대한 공포. 규정성에 들어오지 않을 때 우리는 공포를 느낀다. 일상세계는 규정성에 갇혀 있는 세계다. 그런데 그 일상을 규정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침입할 때 인간은 공포를 느낀다.

그럼 뭘 구분해야 하는가? 표층의식이란 분절적 세계다. 표층의식은 언제나 세계를 분절화 한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 속에서 분절할 수 없는 세계가 갑자기 들어온다. 세계 자체가 분절되지 않는 것임을 알려주는 경험. 분절될 수 없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인간은 느낀다. 그럼 그것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동양에서는 도와 기로. 서야에서는 신으로. 그런 차원은 항상 철학 속에 들어와 있다.


-전체와 개체

동양철학에서는 규정성을 벗어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혼돈, 사사무애, 이사무애(보편성과 개체성 사이에는 장애가 없다). 보편적인 법칙성과 구체적인 개체성은 그 자체로 하나다. 화엄의 핵심사상은 사사무애(이사무애)다. 궁극적인 단계로, 개체와 개체 사이에 장애가 없는 단계다. 스피노자는 신과 개체 사이에, 신과 양태 사이에 심연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는 신 안에 있고 신은 양태를 통해 자기를 표현한다. 신과 양태는 똑같지 않다. 하지만 둘은 다른 지평에 있지도 않다. 이걸 다른 말로 존재의 일의성(univocity)이라고 한다.

전체는 부분들을 전부 더한 것인가? 그렇다고 한다면 기계론적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분리되어 있는 하나하나의 총합이 전체면 항상 전체는 부분을 다 포괄하고 있는 밖에 있는 지평이 된다. 이때 부분은 전체가 아니다. '개인이 모두 모이면 국가다'라는 말처럼 기계론적 생각.

스피노자적 세계관에서 양태의 합은 신이 아니다. 계속해서 생산하고 생산되는 관계라는 역동성이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양태는 계속 무엇인가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들의 변화와 동시에 전체 역시 변화한다. 전체는 단지 부분을 아우르고 있는 더 큰 것이 아니다.

이사무애. 연기조건 속에서 모든 것이 얽혀 있는 것이 理. 그 조건으로부터 장애 없이 존재하는 개체성이 事. 양태는 신의 역능 안에서 끊임없이 생산하고 생산된다. 둘 사이에는 존재론적인 단절이 없다. 신과 양태를 일의적으로 보게 되면 사사무애. 개체와 개체 사이에도 경계가 없어진다.

개체로 나타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그 근원적인 차원이 있다. 규정되기 이전의 차원의 존재. 이슬람에서도 그런 것이 있다. 절대 일자. 분화도되기 이전의 뭔가.

인도의 경우. 인도는 불교가 아니라 이슬람의 나라다. 이슬람과 힌두교는 비슷한 세계관을 공유한다. 브라만, 우주 자체, 모든 개체는 그 브라만 안에 있다는 생각.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브라만 안에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내가 나라고 생각한다(아트만, 자아). 모든 철학에는 나와 세계의 관계가 있다. 내가 나라고 하는 것은 이 세계와 어떤 연관을 맺는가? 모든 아트만은 이 브라만 안에 있다.

힌두교는 그 아트만이 브라만이라는 것을 깨달으라고 하는 종교다. 이 자아라는 것 자체가 전체 브라만의 한 호흡이라는 것을 깨달으라는 것. 내가 우주와 연관되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이점은 이슬람과도 통한다. 이슬람 역시 절대적 일원론을 말하므로. 하지만 불교는 다르다. 불교는 절대자든 상대자든 있지 않다고 말한다.

주희는 '달은 천개의 강에 도장을 찍는다'라고 했다. 리는 하나이지만 그것은 나누어진다는 말. 나뉘어져서 각자 개체가 되는 원리를 '월인천강'이라고 말한 것. 천개의 강 없이 달은 따로 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 이치 하나가 구체적인 것에 다 나뉘어져서 작용중이다.


-분절과 무분절

#"표층의식에 거하는 사람은 절대 무분절의 존재를 어째서 구토 식으로밖에 받아들이지 못하는가"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무분절의 존재를 어디까지나 ~의 의식의 지향 대상으로서, 게다가 그것이 직접적으로 드러난 그대로의 모습으로 직접 잡으려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표층의식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일이다.

물론 표층의식에도 도망갈 길은 있다. 다른 일체의 보통 대상처럼 무분절의 존재를 개념화시켜 하나의 대상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무분절의 존재는 공의 개념, 무의 개념, 일자의 개념이라는 식으로 무해한 것이 되어 '~의 의식'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무해하게 되는 대신, 완전히 표층의식 가운데 거두어들여 죽은 물건이 되어버린다. 결국 존재의 심층의식이 참모습을 완전히 잃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그렇다고 존재의 무분절의 참모습을 있는 그대로 본원적인 모습으로 표층의식에 받아들이려 하면 원래 '~의 의식'인 것이 ~를 잃어버려 허공에 떠돌며 자기 파괴의 위험에 처하게 된다. 구토란 의식론적으로는 그러한 것이다. (<의식과 본질> 43쪽)


분절을 세상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것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면, 절대무분절의 존재를 만나 구토를 일으킨다. 자기 규정성을 세계라고 믿어버리는 것이 극우. 그러면 그 무분별의 존재를 또 자기 방식으로 규정하게 된다. 그럼 공도 무도 일자도 '있게' 된다. 다 규정할 수 있는 것처럼 만들어버리는 게 극우의 방식인 것이다. 가령 '도가 있다'라고 말하면 오히려 도는 모든 곳에서 작동할 수 없게 된다. 도는 모든 곳에서 작동하고 있지만 우리가 뭐라고 할 수 없는 초월적인 것이라고 해도 도는 관념이 되어버린다. 어떻게 실제적인 현실과 구분되지 않는 차원에서 전체를 구분할 것인가? 나와 너의 관계를 어떻게 가져갈 것인가가 여전히 문제로 남는다.

그럼 어떻게 분절적인 우리 의식과 분절되지 않는 세계를 담론화 할 것인가. 동양은 심층의식이 내재해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무분별의 존재에 직면해도 낭패를 보지 않을만큼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도, 연기와 같은 사고가 일찍이 있었던 것이다. 분절되지 않는 존재에 대한 개념규정이 있었기 때문에 심층의식이 항상 표층의식에 대해 열려 있었다. 내재론적 사고. 그런데 서양은 플라톤 이래로 이런 표층의식과 심층의식이 분리되어 있었다. 영원불변한 것과 변화하는 현상의 대립이 오랫동안 구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의 신은 플라톤주의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영원불변하는 존재를 신으로 만들고 이데아에는 없는 인격성까지 붙여 넣은 것. 초기 기독교의 신은 인격화되지 않았다. '빛'으로 여겨졌었고 교조적인 분위기도 없었다. 빛을 영원하고 불변하는 존재로 봤지만 그걸 인격적으로 보지 않았다. 그래서 주로 계시를 받는 이는 눈이 멀었다.

기독교의 시각적인 존재/이슬람의 청각적 존재인 신. 이 차이는 무엇일까? 왜 기독교에서는 신을 만나는 것을 '눈 멀다'라고 표현하는 것일까? 나는 세계에 대해 눈을 감아버리고 오로지 믿어야 한다는 기독교의 이미지.

동양에서는 구토 같은 것이 나올 수가 없다. 우리는 잘 몰라도 道가 있다고 생각한다. 도가 있고 기가 있다고 말하면 대충 무슨 소린지 알고 받아들인다. 분절적이지 않은 세계가 항존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서양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그 세계를 다시 규정하는 게 현대철학이다. 드러난 것들과 관계하는 드러나지 않는 차원의 문제를 사유하기. 하지만 동양은 이미 그것이 도라는 개념으로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소세키가 아무리 실존적인 방식으로 글을 써도 <구토>를 쓸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이 상실되었을 때 인간이 느끼는 두려움이 동양에는 없기 때문에.


-메타의식

#무대상적, 비지향적 의식, 결국 '무'의식이다. 동양사상에는 어디에서나 이런 의식 아닌 의식, 메타 의식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을 체험적 사실로 인정한다. 이것이 동양철학 일반의 근본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다. (<의식과 본질> 45쪽)


본질이 없는 세계. 이것은 심층적 차원의 세계라는 것이다. 본질이란 규정적인 것이지만 동양에서는 규정적인 세계와 그렇지 않은 세계가 존재의 지평 속에서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분절적인 차원과 분절적이지 않은 차원이 공존하는 세계.


#본질의 부정, 그것을 불교용어로는 무자성(無自性)이라 한다. '자성이 없다'는 의미다. 문맥에 따라서는 무아라고도 한다. 자성이란 어떤 것을 그것으로서 결정체로 유지하는 부동불변의 실재적인 핵심을 의미한다. 인식적으로는 우리가 경험적인 세계에서 어떤 것을 그것으로서 '~의 의식'의 대상으로 삼는 지향성의 기반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의 자성, 즉 본질이 원래는 없다는 것으로서 그 실재성을 부정하는 것은 중관사상으로 말하자면 앞서 서술한 '결국 어떠한 차별도 없음', 즉 공을 배경으로 모든 존재자가 연기에 의해 성립하는 것, 서로 관계되어 상대적으로만 그 존재자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연기를 서로 의지하고 관계하는 것과 같은 뜻으로 해석해서 그것이 바로 나가르주나가 제창했던 공의 참뜻이라고 주장하는 통설에 대해서는 이론이 없을 수야 없겠지만 어차피 본질의 실재성을 부정한다는 것 자체는 변하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는 간단한 통설을 좇는다. (<의식과 본질> 50쪽)


자성이란 자기동일성이다. 본질은 뭔가가 '있다'는 것이다. A는 늘 A가 되게끔 하는 본질을 현대철학에서는 부정한다. 현대철학과 동양철학이 만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의미 분절된 세계에 대한 믿음을 깨는 것이 현대 서양철학인 것. 동양에는 애초에 이런 것이 없다. 스펙트럼은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시와 본질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에도시대 국학자. 일본적인 것, 일본적인 것의 본질을 연구하던 사람이다. 하이쿠, 노, 가부키 등. 일본의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예술에 대한 국학이 발달하던 시대를 살던 사람.

시는 뭘 쓰는가? 시는 팩트를 쓰는 것도 아니지만 시가 팩트가 아닌 것도 아니다. 하이쿠, 있는 그대로의 세계인데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묘사하는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말한다고 하지만 사실 있는 그대로의 세계라는 것이 따로 있는지는 따져봐야 할 문제.

우리가 사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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