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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3 <의식과 본질> 강의 4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8-08-28 14:56
조회
61
18.8.23 <의식과 본질> 강의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중동과 아랍에 대한 이미지와 편견들을 거두어내는 공부를 해야 한다. 단순한 이미지, 서방세계에게 길들여진 시각을 벗어나 그들의 역사적 맥락에서 볼 것. 희화화되거나 미국에 대해 대립각을 세우거나. 하지만 그 안에서 미국과의 관계가 굉장히 복잡하다. 그렇다면 현대사에서 중동은 뭐지? 우리의 표상을 거둬내는 작업을 하려면 역사적인 작업이 필요하다. 정치적 맥락, 역사적 맥락, 경제사적 맥락을 같이 보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
9/11같은 경우 우리나라에서는 담론화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젝이나 유발 하라리 등. 유럽에서는 첨예한 문제. 하지만 동아시아에서는 9/11의 문제가 첨예하지 않다. 우리는 9/11에 대해 별로 알고 있는 게 없다. 그 이후 세계가 어떻게 질문을 던지게 되었나? 그에 대해 공감할 여지도 없다. 다만 막연하고 단편적인 이미지만 가지고 있다. 그 나름의 연결고리를 가져야 우리가 타자의 문화를 배우는 것.
팀별로 나름 시각을 가지고 공부해 볼 것. 그리고 책들을 더 발굴해보기.
책을 가지고 어떻게 다른 책으로 건너뛰는가. 이것이 중요.

(1) 마음과 사유

나카자와 신이치의 이야기를 빌어서 풀어보면.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의 궁극적인 차이는 뭘까. 이 종이 그 이전 인간들과 궁극적으로 다른 건 뭘까. 이전에도 도구를 사용했고 직립도 했다. 유인원과 비슷한 최소의 뇌를 사용했다. 그런데 호모 사피엔스는 다른 종이다. 겉으로는 다를 게 없는데 결정적으로 다른 게 있다. 우리가 어떤 의식의 발생을 설명할 때. 동물은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동물도 생각 내지 마음 같은 것을 가지고 있긴 하다. 그러니까 정보가 들어오면 나름대로 처리를 한다. 이거는 먹어도 된다, 안된다. 위험하다, 아니다. 자기들 나름대로 상이 떠오르고 판단할 것. 감각하고 감각에 대해 판단하는 것까지는 한다. 하지만 동물과 인간이 결정적으로 다른 게 뭘까. 동물은 정보와 정보에 대해 감각해서 판단하는 것, 도출해내는 결론이 정보에 대해 대응한다. 하지만 그 감각 판단 외 잉여적인 생각이 없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존재. 뉴런 다발, 신경 다발에 외부 정보가 들어오면 산출해나오는 게 있는데, 정보에 대해 바로 접속되지 않는다. 어긋난다. 그건 잉여적인 의식이 생겨난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번뇌/망상. 동물은 필요해서 교미를 하는 거지 사랑에 대한 감정을 갖지 않는다. 배고파서 잡아먹는 것이지 내일을 위하겠다는 불안과 축적의 욕망이 없다. 지금 하는 것이 걔의 현존이지 내일은 뭐 할까 하며 지루해하지 않는다. 욕망을 미래에 투사한다든가 과거의 의식으로 인해 괴로워한다든가 현재를 결여로 생각하면서 뭔가를 꿈꾼다든가,자기가 하고 있는 감정에 대해 잉여적인 것을 덧붙인다든가. 이런 걸 동물은 하지 않는다.
잉여적인 의식이 생겨나는 것. 바로 호모 사피엔스의 차별점. 바로 마음. 동물은 그때 판단 내린 것이 전부다. 동물의 세계에는 비유와 상징이 없다. 비유와 상징은 인간이 정보를 있는대로 처리하기만 한다면 거기에 생겨날 수가 없다. 관련없는 것을 붙이는 것이 비유와 상징. 빨간 장미와 사랑을 붙이는 것처럼. A와 B가 같다고 한다면 A와 B는 상관없는데 중간을 유추해서 갖다 붙이는 것. 마음의 메커니즘은 바로 비유와 상징이다.
호모 사피엔스들은 기호의 여백을 갖게 된 것이다. 어떤 기호를 받아들일 때 그건 뭐다, 라고 생각하고 끝내는 게 아니라 그 기호가 다른 뭔가를 파생시킨다. 여성을 보는데 동물적인 성욕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여러가지 감정이 파생된다. 미래에 대한 핑크빛 환상이 만들어진다. 내가 보고 있는 금덩어리를 보면서 뭔가를 할 수 있겠다고 만리장성을 쌓기도 하고. 어떤 기호가 증식될 수 있는 여백이 생겨난다. 이러면서 현생인류, 호모 사피엔스는 드디어 마음이라고 하는 차원을 갖게 되었다. 이 망므의 영역은 비유와 상징이 난무하는 영역이고 기호들이 이상한 방식으로 증식하는 영역이기도 하고 상관 없는 것들이 이어 붙여지는 영역이기도 하고 낯선 것들이 결합해서 이상한 것을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마음은 시공을 넘나든다. 거기에서 예술이 나온다. 예술은 동물에게서 나올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술이란 100% 무용한 영역이니까. 예술은 실용성의 차원에 속하는 영역이 아니다. 그리고 철학. 철한은 의식의 세계를 다루는 게 아니다. 철학은 눈에 보이는 세계가 이건 뭐고 저건 뭐다 이런 건 철학이 아니다. 우리는 왜 이걸 이거라고 생각하지? 왜 우리는 이걸 생각할 때 '나'라는 게 있다고 여기지? 이런 걸 질문하는 게 철학. 동물에게 없는 건 결국 예술과 철학.
철학은 주어진 정보만을 받아들이는 세계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 주어진 정보를 다른 것과 연결시켜 주어져 있는 것에서 주어져 있지 않은 차원까지 도약하는 게 철학인다. 공자의 일이관지. 일이나 도, 공은 주어져 있는 게 아니다. 주어져 있는 경험적인 것으로부터 인간은 벗어날 수 없지만 거기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거기서 초월해 뭔가를 만들어내는 게 철학이다. 그러므로 철학에는 논리가 필요하긴 하지만 필요조건은 아니다. 철학을 위해서는 논리를 뛰어넘는 뭔가가 있어야 한다. 논리실증주의라는 철학조차 논리의 구조를 따지고 있기 때문에 논리만 다짜고짜 파는 게 아니다. 플라톤의 이데아. 이데아는 어디에 있지 않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 그런데 인류 최초의 예술은 동굴에서 발생했다. 라스코 동굴벽화는 굉장히 입구가 좁은 동굴. 그리고 캄캄하다. 그런데 어떻게 그 캄캄한 곳에서 벽화를 그렸을까? 이것도 호모 사피엔스가 했다.그렇다면 예술은 왜 동굴에서 발생했을까? 동굴이라는 것은 신화에서 중요하다. 이니시에이션이 행해진 장소였을 동굴. 우리는 일상적으로 대낮에 있다가 캄캄한 곳에 들어가면 갑자기 까맣게 되는 게 아니다. 우리의 시지각이 안에 있던 것으로 밖을 비추기도 한다. 눈을 질끈 감으면 네모/원형이 나타나는 것처럼. 밝은 데 있다가 갑자기 어두운 데로 가면 안에 저장되어 있는 빛을 조명으로 해서 안에서 밖을 투사하는 형상이 나타난다. 신화에는 이런 게 많다. 그리고 원시미술에서도. 원형은 대체로 동그라미다. 그리고 꼭 소용돌이가 들어간다. 대체로 비슷하다. 그럼 그런 상은 어디 있다가 나오는 걸까?

(2) 철학

철학도 마찬가지. 인간이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라고 동물적인 차원에서 정보를 판단한다면 철학은 우리 현상세계 너머의 의식이다. 현상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보다 근원적인 의식. 가령 탈레스가 말하는 세계의 근원 물. 이때 물은 경험적인 의식이기도 하고, 세상에 뭔가가 생겨나는 건 뭐지?라는 질문을 담고 있다. 탈레스가 보기에 그 근원은 습기. 그걸 원리라는 차원에서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은 어떤 근원적인 원리를 갖고 있다는 것. 동물은 원리를 찾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다양한 것들을 꿰뚫고 있는 근원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 호모 사피엔스가 가지고 있는 뇌의 능력이다. 그러므로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호모 사피엔스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연속성을 가지게 된 것. 과거에 비추어 미래에 뭘 하면 안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경험을 케이스마다 다 다르게 넘어갔다면 새로운 곳에 도달했을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는 이제 응용이 가능해졌다. 응용은 바로 상상. 원리를 터득하는 과정이다. 그게 이즈쓰 도시히코가 말하는 심층의식.
우리는 여기서는 이런 언어를 사용하고 이런 개념을/ 저기서는 저런 언어를 사용하고 저런 개념을 만들었다. 그 분산된 것을 모아놓고 보니 언어와 개념이 다르면 특히 동양 쪽 인간의 세상의 경험을 구조화 해내는 기본적인 공통점 같은 게 있다는 것 같다. 그럴 수밖에 없다. 호모 사피엔스는 아프리카에 있다가 세 군데로 나뉘어졌다. 인도/북동쪽/서유럽쪽. 사피엔스들이 있던 아프리카에서 나머지가 다 퍼졌다. 구석기시대 벽화를 보면 아프리카인들처럼 생기기도 하다.
지능을 가진 인간이 퍼졌다. 여기 있지 말고 다른 데 가면 다른 것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러나 정착한 곳은 각각 다르다. 그러면 나름대로 자기 일을 하게 된다.
그런데 사회를 이루고 살면 코드가 작동하게 된다. 이 코드는 단순한 논리의 체계다. 바로 A는 A다 라는 것. 사회를 구성하고, 위계를 맺고, 기본적으로 약속을 하는 논리가 작동하는 세계. 그러나 나카자와 신이치는 이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밝힌다. 인간의 마음은 동굴과 연결되어 있고 신화적인 것까지 있다. 인간의 마음이란 두 가지를 갖게 되면서 복잡해졌다. 코드와 논리로 환원되는 게 아니라 거기로 환원되지 않는 비 코드/비 논리가 있다. 가령 문학.
왜 코드만으로 인간세계가 성립되지 않을까. 종교학자와 인류학자가 중신으로 보는 지점. 이 세계는 끊임없이 유동하고 있다. 들뢰즈 식으로 말하면 코드와 논리만으로 있는 세계가 있다고 말하면 우리는 거기에 대해 싸울 수 없다. 그러넫 코드화된 논리의 세계, 기본적인 세계가 언제나 변화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코드화되지 않은 힘들을 통해 가능하다. 비코드/비논리를 무의식이라고 함.

(3) 본질들

이즈쓰 도시키히코가 말하는 '본질들'은 사실 실체적인 의미는 아니다. 우리의 의식이 논리적이고 표층적인 것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저 아래 부분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저 아래 부분을 가지고 표층의식을 만들어내는 구조. 그런 구조가 동양철학에서 아주 독특한 진동이 있다.
무의식이란 쓰레기장이 아니다. 무의식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욕망의 장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기계적인 작동이 끊임없이 이러나는 곳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각기 다른 환경 속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다른 세계와 관계를 맺은 다른 관계를 갖고 있다.
철학, 예술, 종교는 기본적으로심 심층의식과 연관된다.
들뢰즈, 무의식은 그 자체로 저항적이다.
에술, 철학, 종교는 모두 잉여다. 이때 잉여란 의식이 넘쳐흐른다는 것. 종교는 가끔 국가와 결탁하지만 완전히 포섭된 건 아니다. 철학도 마찬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낸 그 세 가지가 철저하게 무용하다. 철학의 본질은 무용함. 어쨌든 가치화되지 않은 것은 넘쳐나는 무의식이 있다는 것을 가리키기도 하다.
왜 어떤 것들은 의식으로 떠오르는데 왜 어떤 것은 떠오르지 않은 채로 존재하는가?
예술은 척도화 할 수 없다. 자본주의가 상품으로 만들어서 척도화 한 것이지만 결국 안 되었다. 인간의 의식은 경험세계에 국한되지 않는 더 깊은 차원에 넘쳐흐르는 의식으롲 존재한다. 그럼 다 다른 것인가. 그 무의식적 차원에 대해 어떻게 오는 것일까.
<의식과 본질>을 읽고 우리가 동양의 사고라고 하는 게 그렇게 서양과 다를까? 거꾸로 볼 필요가 있다.
근대 이후로 우리는 동양과 서양은 다르다고 보아 왔었다.

도대체 이런 걸 왜 만드는 거야? 왜 이런 걸 사유했을까? 밥 먹고 사람 만나는 것만 인간이 생각하나? 우리를 발달시킨 것은 아주 의외로 저 무용한 것들이다.사피엔스가 우월한 지배할 수 있었던 것.
겨울 다음에 봄이 온다는 것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다르다. 왜 유가에서는 일이관지? 왜 불교는 번뇌를 벗어나라고 할까?
너는 너고 나는 나라고 하면 법에 의해 살아가면 된다. 그런데 사유의 접속이 있다. 인간은 두 개의 구조를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곰은 나라고 하는 자들의 사냥의 윤리는 다르다. 이 두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는 지성을 유동적 지상이라고 한다.
책을 읽는다는 막 하나를 뚫는 것. 철학을 하는 것은 무의식적인 측면을 뚫는 것이다. 거기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 살아가는 대로 살아가게 된다. 무의식의 혁명. 이건 몽유병 환자와 다르다. 무의식의 혁명이란 철학을 하는 것이다. 예술과 철학과 종교는 그 무용함으로 저항적이다.
비코드의 영역이 흘러들 때 코드화된 영역이 흔들리는 것이다. 우리의 코드가 늘 멈춰 있는 것 같지만 코드 자체가 의심되고 무의식의 힘을 흘러 넘치게 하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사람들과 나누는 일상어는 심층에 가닿는 것은 아니다.
분명 종교적인 영역이란 성경도 불경도 말이 안 되는 게 많다. 거기서는 말이 안되어야 한다. 종교란 원래 그런 것. 그런 종교의 영역이 현실과 만날 때, 금지와 명령의 영역과 종교가 만날 때. 이슬람은 종교를 그대로 가지고 온 게 아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 불교는 승가공도에의 규율을 나타내는 것은 경전에 준해서 다른 규율을 갖는다. 불교는 그러나 국가나 사회와 맞닿아 있지는 않다. 그런데 이슬람이 독특한 점은 이슬람은 종교가 가장 현실세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기독교도 얼마간은 그렇다. 부르주아의 종교인 동시에 부르주아의 생활을 규정하는 원리로 작동한 프로테스탄티즘. 기독교가 생활윤리가 되는 방식과 이슬람의 그것은 비슷한 점이 있긴 하다. 유교도? 하지만 유교는 현실논리에 가깝다.
무슬림에게 영성이란 뭘까. 우리는 종교와 일상이 나뉘어 있다. 그런데 이슬람은 독특하게도 일상의 윤리와 종교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럼 거기서 어떤 질문을 던져볼 수 있을까? 무슬림의 삶을 규정하는 방식이 독특한 게 있다. 그런 관점에서 질문을 던져도 된다.
이즈쓰 도시히코는 범동양이라고 묶어 말할 수 있는 대륙의 유사한 진동이 보인다, 그걸 뚫고 내려가면 인간의 다양한 경험세계를 하나로 관통하는 원리들에 대한 탐구가 있다. 이슬람 철학에서도 시아파, 수피즘이 특히 그렇다. 그럼 그냥 신비주의인가?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냥 신비주의라고 퉁쳐버리는 저 영역이 인간의 의식과 어떤 연관을 맺는가를 고찰해야 종교와 일상, 무의식과 의식, 철학과 우리의 일상어. 시적언어와 일상어. 시적언어는 일상어와 어떻게 다른가? 그게 아니라는 것을 말라르메와 하이쿠로 했다.
진어는 언어의 분절성을 넘어가는 언어. 소리로 채우는 것. 티벳에서도. 소리는 이 세계를 진동으로 채우는 것. 이슬람에서 노래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 그때 사람들이 주문으로 외우는 소리는 분절적인 언어를 흗어놓는 언어라는 점에서 시적 언어와 맞닿아 있다.
<의식과 본질>을 굳이 읽는 이유는 사상을 인간이 만드는 데 공진화. 우리는 단지 여기서 단군부터 쭉 밀고 나가고 일본과 다르다, 이런 식으로 볼 게 아니라 공진화라는 게 있다. 다양한 경험세계를 하나로 꿰는 근원적인 것에 대한 통찰이 인간에게 있다. 그게 안되면 인간은 그냥 똑같이 살아갈 수밖에 없다. 스피노자는 왜 5부에서 신에 대한 사랑을 말했는가. 신비주의라고 해도 이해되긴 한다. 하지만 동양철학을 알고 나면 그건 절대 신비주의가 아니다. 하나에 대한 통찰. 근원적인 것에 대한 통찰이 없으면 우리는 우리의 경험적인 세계에 갇힐 수밖에 없다. 그럼 우리는 경험하지 않은 건 모르나? 그렇지 않다.
이슬람 호메이니 같은 현자들을 왜 대중은 존경했을까? 간디를 왜 존경했을까? 비노바 바베가 수행의 차원에서 인생을 통찰하는 게 없었다면 그저 정치인이었을 것. 그들은 힌두교도. 카발라도 마찬가지. 숄렘. 카프카의 주요 연구자. 카프카도 카발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얘기가 있다. 카프카의 소설을 보면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지점이 많다. 카프카는 관료를 했지만 그의 소설은 논리로 환원되지 않는다. 인간이 동물이 되거나 가자마자 도착하거나. 세피로트를 스피노자 연구자들이 스피노자 철학과 세피로트를 연관시키기도 한다. (마크롱).

(4) 사유능력의 개발

니체의 힘의지, 영원회귀가 보이나? 보이지 않지만 현상적인 차원을 꿰뚫는 것이 있다. 그걸 니체는 영감 체험을 통해 보았다. 우리는 논리적인 체 하면서 논리로 환원할 수 없는 것을 배척하고 비과학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과학이든 철학이든 모두 비코드적 영역을 생각해야 한다.
유전자의 자리바꿈이라는 중요한 것을 연구한 사람이 있다. (바버라 매클린톡) 사람들은 그걸 다 관찰과 실험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은 옥수수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가면 옥수수가 알려준다고 말한다. 양자역학. 하이젠베르크는 플라톤의 애독자. 실험이 잘 안 되면 플라톤을 읽은 사람. 과학을 실험과 관찰로 한다는 건 19세기에 머물러 있다. 영적교류라는 이 차원. 푸코가 말하길 근대인이 잃어버린 차원이라고 하는 것.
인도나 이슬람 사람들을 보면 독특한 지점이 있다. 눈이 다르게 생겼다는 면이 있다. 거기다 수행을 하는 사람들도 기본적으로 눈이 맑다. 그럼 수행을 하는 종교적 삶이란 뭘까. 그 종교적 삶이라는 게 인간이 두 영역을 넘나들면서 의식을 구성한다고 할 때 종교적인 삶, 영성이 일상화된 사람들에게 저 두 영역이 관여하는 방식과/ 우리에게 두 영역이 관여하는 방식은 다를 것. 뿐만 아니라 철학.
우리 근대인의 삶에서 잃어버린 영역. 근대인은 더 이상 일이관지 하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유한한 삶을 산다. 그 유한한 삶을 영원한 삶으로 만드는 것은 통찰력. 공부를 하는 유일한 이유.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에 국한되지 않고 그것을 통찰하는 사유능력의 개발. 그리고 그 개발은 우리 삶과 떨어질 수 없다. 어떤 철학을 공부하든 이 생각을 하고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이 철학적으로 제기한 문제가 표층의식을 가로지르고 있는 심층의식의 문제다. 표층의식이 어떻게 심층의식과 관계하고 있는가.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유동적 지식을 통해 코드를 오작동/탈각시키거나 다른 코드를 갖고 올 수 있는 여지를 만들까?
생각과 글에 대해서도 코드에 사로잡혀 있기 떄문. 생각을 한다는 건 자기의 코드들을 요동칠 수 있는 깊은 곳까지 가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어휘 하나가 다르게 나온다. 내가 보는 현상에 대해 넋을 놓고 봐야 한다. 그게 안되기 떄문에 철학적으로 질문이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개념적으로도 연관을 시켜야 하는데 따로노는 것. 그게 감각과 판단하는 동물과 다르지 않다. 유인원과 0.1% 인간이 다른 게 사유능력.
책을 어떻게 읽고, 공부를 어떻게 하고, 어떤 저자가 문제를 가지고 풀어내는 방식을 배울 것.
보편성. 붓다의 보편적 깨달음으로서의 공, 세피로트와 같은 것은 국가화되고 사회화된 코드를 확 넘어가는 보편성. 그런 걸 갖는 사람들을 깨달았다고 한다. 우리가 성인이 될지 안될지는 모르지만 비슷한 단계까지 간다. 샤먼도 그렇고 주역도 그렇고 이 다양한 세계를 어떻게 꿰뚫을 것인가?
라이프니츠. 0과 1. 주역의 세계. 음과 양의 세계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본 19세기. 주역에 여섯 효가 있다면 전체 여섯개의 효가 보여주는 것은 어떤 상황. 그것이 바로 時. 어떤 상황. 그 여섯개의 각각의 효는 그 상황 속에서 이들이 고유하게 갖고 있는 작동 방식. 그럼 이것이 어떤 시공간인지 설명하는 동시에(다른 말로 하면 배치), 그 배치 안에서 각각의 자리, 구체적인 각각의 지위에서 가져야 하는 행동양식. 64괘 안에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다고 보는 것. 그걸 추상화 하면 음과 양.
주역을 양자역학을 연구하는 사람은 추상적인 기호가 만들어내는 복잡한 세계. 복잡한 것들이 있어서 복잡한 것을 만드는 게 아니다. 0과 1의 관계성. 가령 괘가 나오면 그것을 뒤집은 것도, 반대의 것도 봐야 한다. 있을 수 있는 배치의 아주 다양함 속에서 우리가 어떤 식으로 살아야 할지 본다. 그리고 이것들은 모두 자연에서 왔다.
이 복잡한 자연의 현상을 어떻게 추상화 할 수 있는가?
우리는 더 발전했다고 생각하지만 고대의 유동하는 의식을 가지고 고도의 추상적인 단계까지 이른 것이 주역. 신비주의라고 말하고 말 것이 아니다.
이즈쓰 도시히코가 세피로트에 대해서도 설명할 때.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본다. 사회 이론도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그 문제다. 전체라는 게 우리가 살고 있는 배치라면 그 배치 속에서 어떤 개체의 운동을 설명할 것인가. 과학도 그것을 하나로 꿰뚫는 게 아니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사유를 어떻게 원리적 차원의 것을 얘기하는 것. 이런 식의 사상의 전개가 있었구나. 그걸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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