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이 아카이브

8.16 <의식과 본질> 강의 3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8-08-22 19:47
조회
64
(1) 마음

철학이 없으면 어떤 것도 주파할 수 없다. 위대한 예술가는 어떤 분야든. 현상적인 것을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술은 현상을 보여주는 게 아니다. 현상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 현상들을 관통하는 어떤 질서 혹은 현상적인 것들을 꿰는 원리, 서로 흩어져 있는 것 같은 현상들이 어떻게 함께 작동하는가 그 전체 상을 보여준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찍고 그린 것 같지만. 반 고흐는 나무를 그렸지만 나무를 보여주는 게 아니다. 남녀 둘이 이야기하는 영상을 찍은 영화라도 훌륭한 영화는 그것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우리가 보이는 세계가 그대로 번역될 수 있다는 생각 하에서 찍는 게 표상. 표상에도 상이 들어감. 상이 이미지. 그림이라는 뜻. 표는 독어로는 앞에 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어떤 보이는 현상을 고스란히 그림으로 찍어주는 것. 이런 걸 표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예술가들은 나무를 그릴 때도 그대로 나무를 보여주는 게 아니다. 그럼 자기 주관을 보여주나? 그것도 아니다. 가장 유치한 예술의 끝에 이 두 가지가 있다. 현상이나 자기 문제의식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 그것은 주체에 귀속되거나 대상세계에 귀속되는 가장 유치한 예술.
그럼 뭘 보여주는가? 철학자들이 예술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사유의 원천으로 삼은 것은 그걸 개념화 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항상 뭘 하든. 역사를 하든 수학 과학 이런 것도 마찬가지고 이게 왜 철학의 문제냐면 우리는 뭘 마주한 상태에서 생각을 하든 느낌을 갖는다. 뭔가를 마주한 상태에서 생각이 발생한다는 건, 너와 내가 마주한다는 게 뭔지에 대해 물어야 한다. 왜 어제와 오늘 느끼는 게 다를까? 네가 너고 내가 나라면 어제와 오늘 느낌이 같아야 한다. 그런데 다르다. 그렇다면?
'다 변해서 그렇다'라고 말하는 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제 오늘 별 차이 없이 사는 것 같지만 불과 24시간 차이에서 어제는 왜 기분이 좋았는데 오늘은 기분이 나쁠까? 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일이 왜 오늘은 힘들까? 내가 뭘 마주할 때 우리는 늘 우리가 동일하지 않다는 걸 느끼고 있다. 그런데 왜 자꾸 나는 그 동일하지 않은 것을 느끼면서도 그 동일하지 않은 것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까? 우리의 의식은 그에 대해 질문하지 않고 쭉 견지하게 된다. 그럴 때는 예술을 할 수 없다. 또한 역사에 대해서도 사료를 모아놓고 대충 타임라인을 맞추는 것일 뿐 역사 속에서 뭘 봐야 할지 질문을 끌어낼 수 없다. 뭘 하든 철학을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다를 수밖에 없다.
철학을 하지 않으면 노예로 살 수밖에 없다. 이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노예는 늘 자유를 갈망하지만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 없는 자. 무엇을 하든 자기 스스로가 자유롭다는 느낌을 갖고 있어야 한다. 자신의 행위와 자신의 느낌과 삶을 일치시킬 수 없는 방식으로 살아가게 되면 노예의 방식으로 사는 것.
자기 삶에 자기가 능동적으로 힘을 발휘하는가 아닌가이다. 그런데 능동은 열심히 하는 문제가 아니다. 자기의 삶의 양식이 무언가에 의해 만들어지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것이다. 마음대로 하는 것도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며 자기 스스로가 가치의 차원이든 뭐가 됐든 함께 사는 속에서 수동적이지 않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이다. 내버려두지 않으려면? 자기질문을 계속 가지고 가야 한다.
철학은 다른 게 아니라 아주 본질적인 질문을 하는 것이다. 내 몸이란 무엇이고 내 마음이란 무엇인가? 그런데 혼자 살아가는 게 아니니까, 나는 어떤 조건에서 신체성을 구성하는가? 어떤 시공간적 조건 속에서 마음을 형성하고 살아가는가? 이걸 하면 뭘 해도 타인에게 자기 삶을 저당잡히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이걸 하지 않고서는 자기 삶 스스로를 자유롭게 살 수 없다. 자유를 갈망하다 죽는 것. 어디를 가든 철학을 해야 보이는 게 다르다. 사물이 뭐냐, 몸이 뭐냐 이것부터 질문을 던지는 철학을 해야 한다. 자기 스스로 마주치는 것에 대해 질문을 던져야 한다.
에어컨 권력에 관한 에세이. 전기세가 전해에 비해 확 올랐다. 지난해 동일한 달은 별로 덥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올해는 덥다고 느낀다. 에어컨 없이 살 수 없게 되었다. 에어컨 권력 에세이. 1902년 처음 만들어진 에어컨. 이게 처음 만들어진 이유는 사람들이 덥다고 해서 만들어진 게 아니다. 공장에서 노동 생산성을 어떻게 높일까 고민했다. 여름에 확실히 노동생산성이 떨어졌다. 그렇다면? 사시사철 일정한 온도를 유지해준다. 그걸 위한. 처음 캐리어에게 의뢰한 기계는 종이가 눅눅해지지 않도록 만들어달라고 함. 그러다가 20세기에 노동생산성을 유지하기 위한 에어컨이 만들어짐. 미국에서는 20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미국은 혹한/혹서가 문제되는 때가 별로 없는데 모두 에어컨을 두고 있다. 그리고 지원자에게 선전문구: 에어컨을 두고 있다. 그러니까 에어컨은 생산력과 연관. 여기서 놀라운 점은 에어컨이 비단 그런 것만이 아니라 뭘 바꿔놓았냐면, 여름에 더우니까 7,8월에는 섹스도 잘 안 했다. 그래서 4,5월 출생률이 낮다. 그런데 에어컨이 보급되고 4,5월 출생률이 확 올라갔다. 명리학적으로 봤을 때 연/월/일/시 네 기둥이 있다. 그런데 시가, 요즘 애들은 불이 많다. 그런 역사적 조건 중 하나가 제왕절개 한 애들이 많아서. 그럼 제왕절개를 할 때 시간을 가장 좋은 시간을 잡는다. 엄마나 의사나 대략 11시 정도. 대략 10시에서 1시 사이에 태어나는 애들이 많다. 90년생 이후 생들 보면 시가 불인 애들이 많다. 옛날 태어나는 애들은 밤에도 태어날 수 있고 새벽에도 태어날 수 있다. 그런데 요즘 애들은 화기운이 많다. 그렇다는 건 노는 거 좋아하고 폼나는 거 좋아하고 연예인 지망생이 많다. 옛날에는 지금과 같은 미디어 환경이 아니었고 나가서 춤추고 그러는 걸 싫어했다. 그러나 요즘은 나가서 춤추고 노래하지 못하면 바보같다고 생각한다. 병원에서 좋은 시간을 잡기 때문에 시간이 불기둥인 애들이 많다.
에어컨이 생기고 나서 4,5,6월 출생자가 많아졌다. 그렇다는 건 월에 화가 많아졌다. 이전 시대에 비해서 화기운이 많아졌다. 사람들이 훨씬 표현적인 사람이 많아졌다. 같은 기운의 배치도 수나 금이 많은 사람은 자기표현적이지 않다. 근대인들이 자유분방해졌다고 얘기하는데 다른 관점에서 보면 5,6월생이 많아졌다는 건 뭘 얘기하는가. 물질이 인간의 출생률을 변화시킨다. 서양에는 그런 개념이 없긴 하지만 어느 달에 출생했느냐가 중요하다. 여름에 태어났을 때 그 우주의 기운을 타고 태어난 아이와 추운 겨울의 기운을 타고 태어난 아이의 성향이 다르다. 옛날에는 근대인이 아니라서 자유가 없어서 자기표현적이지 않았던 게 아니다. 기운 자체의 변화 문제다.
에어컨 권력이라는 게 어떻게 인간의 삶의 양식을 바꿔 놓았는가. 그리고 인간이 열감에 굉장히 취약하게 만들었다. 19세기, 20세기 아열대 기후에서는 덥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러자 쟤네들은 더우면 자기 때문에 생산력이 낮고 미개하다는 생각이 팽배하게 되었다. 전지구적으로 열감에 대해 신체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 굉장히 취약해졌다. 그리고 성에 대해서도 달라졌는데, 에어컨으로 사무실의 일정한 온도를 조정하자 미국 사무실은 와이셔츠와 넥타이 입은 사람이 주이기 때문에 20도로 맞춘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들은 추위를 느낀다. 여성하고 남성이 느끼는 온도차가 다른데 사무실 화이트 칼라 중심으로 온도를 맞추기 때문에 여성에게 가져온 변화가 많다. 지금도 미국에는 민원이 쇄도한다. 사무실 온도 3도를 높여달라고. 그런데 실내온도를 높였다가 또 민원이 쇄도해서 또 20도에 맞추었다. 미국사람이 가는 곳마다 20도 온도를 맞추는 에어컨이 기본으로 세팅되어 있다. 그것이 출생률의 변화, 일정온도로 맞추는 순간 차이나는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권력이 생겨난다.
권력이라는 건 정치권력의 문제는 너무 작은 권력이다. 정치권력은 그 힘관계들 중 아주 코드화된 것. 온도, 어떤 것을 먹을 수밖에 없도록 하는 것도 다 권력이다. 젠더, 기질, 신체성의 문제가 변화되고 있는 것이 모두 권력의 문제다. 아마 사주를 100년 전의 사람과 지금 사람을 비교해보면 불기운을 가지고 있는 비율이 훨씬 많을 것이다. 수기운과 금기운이 많은 사람들이 많다는 건 기질적으로 음적이라는 것이다. 나무와 불기운이 많다는 건 양적이고 표현적이라는 것. 근대인들이 자기표현이 강하고 주관이 강하고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차원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우리의 물적 조건은 테크놀로지와 분리되어 생각될 수 없다. 인간의 몸은 항상적인 방식으로 있고 무슨 기술을 쓰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기술 자체가 우리의 신체성을 변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신체성이 변하면 관념이 변한다.
AI는 단순히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는 문제가 아니라 인간과 마음에 대한 문제. 에어컨 역시 도움이 아니라 외부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신체와 관념이 바뀌는 문제다.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우리가 어떤 신체과 관념을 가진 인간으로 살아가게 될지. 그때 우리 의식이 어떻게 변할지도 알 수 없다.

<의식과 본질>의 흥미로운 점. 굴원, 주역, 이슬람, 플라톤, 소크라테스, 불교 등 이게 다 뭐냐면 천 몇년 전 인간의 이야기다. 항상 과학적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게 좋은 점은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를 기준으로 시간 관념을 갖는다. 그런데 우리를 벗어나면? 인류의 시간/생명의 시간을 생각한다면? 지구는 46억년. 현생인류는 10만년. 현생인류가 있는 시간은 팔 끝 손톱 갈아서 나오는 가루만큼이다. 우리에게 1000년은 굉장히 오래된 시간이지만 지구의 시간으롭 보면 얼마 안 되는 시간이다. 지질학적 시간의 단위로 보면 인간의 시간은 너무 짧다. 눈 깜짝할 새. 인간의 진화 관점에서 보면 모두 같은 시기다. 이런 관점에서도 봐야 하고 반대의 관점에서도 봐야 한다.
세포의 관점. 가장 미세한 것의 차원. 우리는 미세한 관점에서 보면 거의 우리는 움직이지 않고 있다. 변화란 시간적 개념인데 어떤 차원에서 말할 것인가를 보면 굉장히 다르다. 변화를 관념을 보아서는 안 된다. 인간은 진화의 과정을 되풀이하고 있기도 하고 한 시간동안 작은 세포는 쉴 새 없이 운동하기도 한다. 그 작은 세포의 관점에서 인간은 활동하지 않는 거나 다름없다. 변화와 생성의 문제는 한번에 포착되지 않는다.
주역이니 뭐니 이런 게 다 맞는가? 과학적 정신으로 무장한 사람은 그렇게 말한다. 과학자가 논박하는 '이열치열'. 삼계탕을 먹고 시원하다고 하는데 삼계탕을 먹고 체온을 조사해 봤더니 아니라는 식. 이때 이열치열 문제는 체온의 문제가 아니라. 음양과 기의 문제. 과학적으로 접근하면 세상 모든 게 과학적이지 않다. 검증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 그런 유치한 과학주의를 벗어나 생각해보기.
3000년 전 만들어진 주역, 이게 우리에게 통용이 되는가? 그런데 그때 인간의 의식이 지금 우리와 크게 다를까? 우리는 3000년 전 인간에서 그렇게 멀리 와 있을까? 그런데 반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때 인간과 다르다. 청동기/철기. 기술적인 조건이 다르다. 다르다는 관점과 다르지 않다는 관점을 모두 동원할 수 있어야 한다. 변하지 않는 것, 느리게 변하는 것, 100년을 사는 인간으로서 규정지을 수 없을만큼 느린 것.
인간과 오랑우탄은 0.1%의 차이가 있다. 아주 미세한 차이로 우리는 인간이다. 대단한 방식으로 우리는 존재하고 있는 게 아니다. 원형이라는 게 시간의 관점을 다르게 가지고 있을 때 여전히 느리게 변하는 것, 우리에게는 거의 변하지 않고 있는 것. 무론 이게 절대적이라는 건 아니다.
우리는 신화를 읽을 필요가 있다. 신화시대 인간은 변화가 빠르지 않은 속도가 다른 시대의 인간들. 신화시대의 인간들은 우리와 날씨를 느끼는 게 달랐을 것이고 외부에 대해 느끼는 게 당연히 달랐을 것이다. 우리는 훨씬 복잡한 망 속에서 살고 있다. 중세만 보더라도 그렇게 복잡하게 네트워킹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들은 에너지가 분산되지 않았다. 우리도 그렇다. 숲 속에 가서 아주 적은 사람들과 공동체를 이루고 산다면 에너지가 분산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다. 핸드폰을 머리맡에 두고 자면 우리 뇌에 계속 신호를 보낸다. 근대인들이 자고 나도 개운하지 않은 이유가 스마트폰. 파가 한시도 우리를 놔두지 않는 것이다. 자는 데는 최대한 기계 없이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뇌가 쉴 수 있다.
물체를 사용하는 것과 우리의 신체성은 별개가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보는 것들이 계속 우리의 시각과 청각을 끊임없이 흔든다. 중간중간 뭘 듣고 얘기하기도 하고. 사람들도 쓸데없이 많이 만난다. 직장에서 접대하는 경우도 있다. 공무원들 사회의 핵심은 의전. 의전은 삶을 공허하게 만든다. 관계를 친밀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고 지혜가 많아지는 것도 아니다. 거기다 돈도 많이 든다. 이런 식의 관계를 하고 있기 때문에 신화 시대 인간들처럼 나의 에너지를 순연한 방식으로 보존한 채로 누군가를 만나지 않는다. A 만나고 있을 때 다른 거 신경쓰고 B 만나고 있을 때 다른 거 신경쓴다. 신화를 만들 수 없는 이유가 상상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신화는 그런 것이 실제라고 알려주는 것이다.
실제란 현상에 대립되는 개념이다. 현상이란 따뜻해지다가 차갑게 식는 것. 현상이라는 것은 계속 변하는 것. 계속 변하는 것을 우리는 '이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실제라는 것은 변하는 현상의 근원적인 무엇이다. 플라톤의 이데아. 동양의 리. 하지만 그런 개념이 아니라 실제한다는 말을 현상적으로 나타나 있음, 감각적으로 느껴짐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신화시대 인간들이 사슴을 쏘면 그 사슴이 쏜 자리가 자기도 아프다고 느낀다. 이건 거짓말 혹은 사랑을 의인화하는 게 아니다. 정말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동물들은 몸으로 확 느끼는 것이 있다. 지금 애완으로 키우는 애들도 인간보다 그런 능력이 있다. 애완동물이 동물이라는 본질을 갖고 있는가? 그렇게 보기 어렵다. 애완동물이 인간이 걸리는 병을 똑같이 걸리고 있다는 것. 인간이 먹는 것, 인간의 기운과 네트워크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인간이 걸리는 병에 걸리기 시작한다. 그럼 걔네들은 여전히 동물인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본질주의자는 인간은 인간 동물은 동물이라고 할 것. 그러나 신화시대 인간들은 그런 규정성에 갇혀 있느 것보다는 규정성을 넘나드는 힘들이 강하게 작동했다. 그렇기에 염소가 아프다고 하면 그것과 같은 부위에서 자기도 아픔을 느낀다거나 하는 것이 있따. 인간과 동물이 같은 기운의 장 속에서 살아가는 것. 코드가 없지는 않지만 지금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이 그들에게 실제적인 느낌의 세계다. 그럼 지금 우리의 세계는 좀 다르지만 우리는 우리 나름의 신화를 또 만든다. 예전 사람이 전혀 느낄 수 없는 감각.
예컨대 뭐가 손해고 아닌가 이에 대해 예민한 감각을 갖고 있다.
지금 우리가 사물을 개념화 하는 방식, 의식을 개념화하는 방식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철학사적으로 사람들이 대상과 관계했을까 이것을 배우는 것이다. 이때 이즈쓰 도시히코는 동양이라고 일컬어지는 문명에서 표층의식과 심층의식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 어떤 차이와 상동성이 발견된다는 것을 주장한다.
열대에는 에어컨 권력이 성립되지 않는다. 온대에만 에어컨 권력이 있다. 물론 최고의 미래 에어컨 시장은 중국과 인도. 열다 앤긴들은 덥다고 느끼지 않는다. 온대 지방 사람들만 덥다고 느낀다. 열대 인간들이 느끼는 방식과 온대 인간들이 느끼는 방식도 전혀 다르다. 또 사막의 사람들, 북반구의 사람들, 유목인, 일본은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사상적인 진동이 비슷할 수 있을까? 뭔가 섞였다는 거 아닐까? 우리는 여기 있으니까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와중에 진화하는 과정이 다르다. 그런데 비슷한 와중에 다름을 만들어내는 것은 무엇인가? 이걸 보면 타자성이라는 것을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 타자성과 관계한다는 것은 그들과 나의 차이에 대한 감각이다.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차이들이 형성해 내는 인간의 의식, 생각의 진동이 비슷할 수 있다는 것이 더 놀랍다. 어디도 생각이 더 열등하거나 우월하지 않다.
각각의 서로 다르게 표현되는 것들이 던지는 질문이 사실 우리 드러난 의식이 전부인가 하는 점이다. 이거소가 연관해서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는 나를 나라고 생각하기에 타자에 대한 배타성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과연 나는 나인가? 나와 타자는 어떻게 얽혀 있지? 인간의 생각이 다 거기서 거기 아닌가?
이슬람은 우리에게 너무 낯선 문명. 종교화가 되어 버렸는데 거기에는 종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기독교도나 불교도나 상관없이 비슷한 공통관념을 갖고 살아간다. 이슬람도 마찬가지. 그런 걸 보면서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굉장히 다르면서도 인간이라는 종족은 이렇게 비슷하게 뒤섞여 가는 것인가? 타자성에 대해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데자뷔. 의식이 표층의식만 작동하지 않다는 것. 우리는 실제가 있고 비유는 이것에 비해 더 흐릿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타난 사물은 더 뚜렷하다고 생각하고. 그런데 반대. 실제가 더 흐릿하고 이미지가 더 뚜렷하다. 허우샤오시엔. '희몽인생' 중국 전통 인형가. 희몽인생이라는 말은 마치 인생과도 같은 것. 인생이란 마치 인생과도 같은 어떤 것이라는 주제의 영화. 인생이라는 게 뚜렷하게 있는 게 아니다. 예술이라는 것은 그걸 오히려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실제란 윤곽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생각한다. 실제는 뚜렷하고 문학은 허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만큼 흐릿한 게 없다. 나는 그냥 나 같은 것이다. 무아는 내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나는 나 같은 것이라는 말에 가깝다.
내가 나인 것은 다른 사람과 동물과 사물이 나라고 느끼고 존재하는 것처럼 존재하는 것. 그런데 우리는 '나는 나'라고 말한다. 이건 말이 되지 않는 것. 그런 차원에서 심층의식과 표층의식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어떤 철학에서도 심층의식과 표층의식을 구분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드러나는 것은 전부가 아니며 드러난 것은 드러나지 않은 것과 관계한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심층이 더 근원적이고 본질적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건 내가 눈 앞에 보이는 것과 어떻게 관계맺을 수 있는가이다.
내가 나라는 존재를 '내가 이렇게 느낀다'라고 해서 내가 되는 것인가? 내 생각을 다 풀어내도 그건 내 생각인가? 그런 전체적인 관점과 연관해서 읽으면 각자가 가지고 있는 질문들이 전부 다르게 표현될 수밖에 없다.
(2) 선종

<마음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마음의 문제가 과학자들의 영역과 철학자들의 영역이 겹치는 문제다. 물질과 마음을 어떻게 통합할 것인가. 이것이 학자들의 주요 관심사다. 스피노자가 뜨는 이유도 그것. 스피노자는 물질과 마음 이원론을 넘어간 사람이다. 물질이 마음. 그런데 물질이 마음이다 라고 말한 게 싀노자가 있고, 그 다음에 또 하나를 말하자면 불교다. 뇌과학은 마음의 문제를 다루는 것. 그런 책들을 읽어보면 주로 스피노자, 불교가 언급된다. 물질과 마음을 하나로 보는 동서양의 예시.
이즈쓰 도시히코도 결국 대상과 의식에 대한 이야기, 마음과 사물에 대한 이야기다.
나카자와 신이치의 강연록 14페이지부터.
인문학은 자연과정에 속하는 물질과 인간의 뇌내 과정으로부터 생겨난 마음을 잇는 회로를 스스로 막아버렸다. 구조주의는 의식과 무의식을 파헤치는 핵심을 언어로 잡았다. 그런데 물질의 세계를 놓쳤다. 구조주의자들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으면서도 단절한 자가 들뢰즈와 푸코. 왜냐하면 물질의 차원을 가지고 왔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스피노자가 이들에게 중요했다. 모든 마음(비물질적인 것)은 그것으로 존재하고 작동하는 게 아니라. 항상 물질적인 차원과 함께 작동하고 있다. 가령 범죄에 대한 관념은 감옥과 감옥에서 인간을 길들이는 매커니즘과 떨어뜨려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물질적 차원과 비물질적 차원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하는 문제.
들뢰즈는 자연주의자. 왜냐하면 모든 것을 물질의 층위에서 사유하기 때문이다. 물질을 간과하면 초월적 관념주의로 빠질 수밖에 없다.

#인문학은 또다시 자연과정에 속하는 '물질'과, 인간의 뇌 내 과정으로부터 생겨난 '마음'을 잇는 회로를 스스로 막아버렸다는 생각이 듭니다. 언어학을 모델로 하는 구조주의는, '마음'의 건너편 언덕에 펼쳐진 '물질'의 영역으로 파고들어 가는 일이 불가능한 채로, '마음'의 이쪽 편에서 문화와 노닐고 있습니다. (...)
하지만 나에게는 확신이 있습니다. 아무리 인간이 고도의 사고력을 가지고, 다양한 발명과 발견을 해왔다고 하더라도, 모두 뇌가 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뇌는 자연의 진화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뇌에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물질과정은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점차 밝혀지고 있습니다.

뇌는 물질. 마음은 진화과정과 분리되지 않는다.
뇌과학과 인지과학계열이 있다. 인지과학자들이 제일 관심있는 게 명상하는 사람의 뇌에서 무엇이 발생하는가다. 신경에서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그 외 뉴런계열, 분자생물학 등등. 그래서 신경과학을 약물로 치료하는 경우가 이 떄문이다. 신경과학이라는 것은 모든 것이 신경의 문제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게 약물의 문제. 그래서 그게 또 하나의 편향을 낳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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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런계와 마음계를 잇는 회로.
이게 같은 원리를 가지고 있다면 어떤 회로를 설계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가설이 있다. '브리콜라주'(레비-스트로스).
브리콜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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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엔지니어는 특정한 작업을 수행할 때, 그 전용으로 특화한 도구와 소재를 미리 준비해 두고 작업을 합니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전의 인간은 거의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다른 용도를 위해 준비해 두었던 도구와 소재를 다른 종류의 작업에 사용하는 일이 보통이었습니다. 돌도끼는 신석기인에 의해 온갖 종류를 작업에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브리콜라주: 신화적 사고.
신화시대 인간들의 마음은 인간과 동물과 무생물이 정해져 있는 기능이 없다. 그러니 서로 소통하고 사귀기도 하는 일들이 발생한다. 이게 신화적 사고방식을 표현해주는 말로 브리콜라주라는 말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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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자재를 외부로부터 조달하는 일은 없고, 오래 써서 낡은 자재로부터 잠재적인 능력을 끌어내어 지금까지와는 다른 기능을 부여함으로써~

신화적 사고란 이상한 상상이 아니다. 원래 가지고 있던 관념들을 지금 우리보다 훨씬 더 다이내믹한 방식으로 연결시키는 것이다. 생각의 경계가 별로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과 동물간의 구분이 확실하지만 신화시대 인간에게는 인간과 동물간의 관계에 아무런 걸림돌이 없다. 사고가 그런 형식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 주목한다. 사고가 규정성에 얽매이는 게 아니라 규정된 코드들을 넘나든다.
물론 일상 속에서는 그런 코드가 작동하지 않지만 그런 일상적인 코드와 함께 일상적인 코드를 허무는 신화적 코드가 공존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 속에서의 코드가 절대화 되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은 잠정적인 것. 우리가 규정성을 가지고 가야 하는 게 일상의 삶.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 코드밖에 없다. 이즈쓰 식으로 말하면 우리에게 심층의식 영역이 활성화가 되어 있지 않다. 언제나 표층의식만 있다. 우리의 무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화폐적인 관계가 점령하고 있다. 화폐적인 교환관계가 우리 무의식도 잠식하고 있을 뿐만아니라 우리의 표층의식도 잠식하고 있다. 그런데 나카자와 신이치의 결론은 그것으로 결코 환원되지 않는 사고의 차원이 잠재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인류에게 아주 오래 전부터 내장되어 왔던 대칭적 사고.
대칭적 사고란 넘나들 수 있다는 의미. 우리는 인간과 동물이 넘나들 수 없고 남녀가 넘나들 수 없다. 그런데 꿈에서는 그 경계가 없다. 신화에서도. 그게 보여주는 게 무엇인가가 신화학 하는 사람들이 탐구하는 것. 인간이 아무리 표층의식을 견고하게 하더라도 그 표층의식에 사로잡히지 않을 잠재성. 표층의식이란 일상화된 코드. 언어화된 것. 그런데 지금 우리 행위양식을 규정하고 있는 가치체계를 만들기도 한다. 교환관계, 가격, 이런 것이 점령한 우리 무의식. 역사적인 조건 속에서 그런 의식은 다 다르다. 코드화된 채로 인간이 다 존재하는 게 아니다. 그런데 신화시대 인간들은 신화를 전승하거나 공연하면서 언제나 표층의식이 전부가 아니라고 강하게 위협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근대로 올 수록 우리는 그런 식의 표층의식을 위협하는 심층의식을 더 억압해 버린 것이다. 그러다보니 일상적인 코드를 위협하는 것이 일상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축제도 없고 전승신화도 없다. 그러면서 점점 인간들이 표층의 코드화된 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들뢰즈가 말하는 코드화 영토화 재코드화 재영토화. 그럼 코드를 변환시키는 힘은 어디서? 탈코드화의 여백, 탈주선의 힘. 나카자와 신이치의 경우 마음의 연구를 통해. 인간 밑바닥 근저에서 흐르는 코드화되지 않은 힘을 일상에서 흘러넘치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단순히 신화를 회복하자고 하는 게 아니라 그런 식의 사고방식을 어떻게 우리가 현대적인 방식으로, 신화가 아닌 방식으로 할 수 있는지.

22페이지.
하이에크. 신자유주의의 아버지. 우리의 뇌가 동일한 것을 발생시키기도 하지만 어떻게 차이를 발생시키는지.
그리고 마음의 작동방식.

33페이지 8번.
생물학, 신경과학, 하이에크, 구조인류학, 수학 등 마음의 작동방식을 증명하기. 과학을 발달한 사회에서는 그런 이론을 가지고 와서 마음의 매커니즘을 설명한다.

34페이지
호몰로지.
벡터공간 V에서 W라고 하는 방향을 전혀 감지할 수 없는 생물이 보는 세계. 다시 말해 V의 성분인 V는 W에 포함될 때는 0벡터가 된다.
#구체와 같은 삼차원 물체의 표면을 걷고 있는 이차원 생물에게 구면은 끝없이 이어지는 평면으로밖에 느껴지지 ㅇ낳겠지요. 구체의

>3차원을 3차원으로 의식하지 않는다. 2차원 존재는 3차원인 존재를 2차원으로 인식한다. 그렇다며 4차원이 3차원을 인식하는 것은 또 다를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동일한 정보를 동일한 방식으로 산출해 내는 것이 아니다.

36페이지.
0의 공간.
정보가 플러스 값을 갖기도 하고 마이너스 값을 갖기도하는데 정보 자체의 규정성이 무화되는 차원이 있다.

#뉴런계에 브리콜라주식 개편을 더해간 끝에 출현하는 마음계도 호몰로지적 작동을 합니다. 특히 호모 사피엔스의 경우, 그것은 아날로지(유추)

>신화는 유추의 과정. 사고의 흐름에 벽이 없다. 무한한 유츠, 확장을 통해 나아간다. 당연히 그곳에서는 0공간이 큰 역할을 한다. 규정성이 흐르지 않기 때문에. 도망가다가 나무가 되기도 하는 공간. 망므계의 작동을 만들어내는 0공간이라는 것이 이즈쓰가 말하는 일종의 심층의식이다. 심층의식은 더 중요한 의식인 게 아니라 표층의식과 함께 흘러가지만 표층의식으로 환원되지 않는 차원을 말한다. 모든 것이 우리의 의식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모든 것이 코드화 되지 않는다. 세상에 나, 너, 이것, 저것. 우리는 다 코드를 언어화 한다. 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언어로 붙들리지 않는다. 언어로 붙들리는 채로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로 붙들어 놓은 어떤 세계상은 잠정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사고가 동양에는 있다. 내가 언어를 가지고 세계를 붙들고 있더라도 세계를 붙들리지 않고 계속 흘러간다.
세계의 신상이란 막힘이 없다. 막힘이 없다는 것은 흐름 자체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른 흐름은 뒤섞인다. 그런데 언어는 고체적 세계다. 이것, 저것. 그래서 섞일 수 없는 세계다. 이게 표층의식이다. 그런데 철학은 그 표층의식 말고 표층의식으로 환원될 수 없는 차원을 동양 철학에서는 여러 차원에서 설명했다. 물이 분절될 수 없다는 것처럼. 0공간.
0은 플러스도 마이너스도 아니지만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기관없는 신체의 강도=0

강도intensity=0
이때 0란 강도가 없다는 뜻이 안아니다. 강도란 에너지와 결합해서 그것을 자기 차이화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강도가 0이라는 말은 어떤 것과 결합해서 차이를 만들어낼 수 없다는 게 아니고 일종의 규정적이지 않은 차원을 말한다.
온도계의 0도. 0도는 하나의 기준을 말한다. 물이 얼고 녹는 기준. 0도는 아무 온도도 없는 게 아니다. 그런 차원을 인간은 개념으로 생각해 낼 수 있다. 그것과 비슷한 게 바로 無. 空. 無는 없다는 게 아니다. 0도가 아무것도 아닌 온도가 아니듯. 존재의 발생, 드러나는 모든 현상. 드러난 것이 절대적이지 않고 임시적이라고 말하는 것일 뿐이다.
(2) 선종

191페이지
분절 1: 코드화의 영역. 이건 컵이다, 저건 인간이다 식으로 분절화 해서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분절할 때는 두 가지 차원이 있다. 물질적 차원/언어적 차원. 컵이라고 할 때 펜과는 다르다 라는 물질적 분절이 있다. 언어로도 분절이 일어난다. 분절이 되어 있는 세계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나'라고 생각해보면? 나는 어떤 말을 하고 행동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그런 의식을 언어화 할 수 있고 행위를 묘사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규정성이 도입된다. '나쁜 말을 했다' '얼굴이 빨갛다 등등. 그런데 머리가 짧은 나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왜냐하면 머리는 자라고 있기 떄문에. 머리가 짧은 나라고 하지만 짧은 나로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다. 머리가 자라는 것으로 계속 존재하고 있다. 매번 다르게 드러날 수 있다고 하는 건 고정되어 있지 않은 어떤 차원이 같이 가고 있다. 같이 가지 않으면 매번 다르게 드러나지 않는다. 고정되어 있지 않은 차원이 바로 무분절. 0의 공간.
그런데 선종은 더 나아가 분절 2를 말한다.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불교는 철두철미한 현실주의이기 때문이다. 불교의 핵심은 어떻게 드러난 그대로를 긍정할 것인가? 이기 때문이다. 드러난 것 아닌 것을 긍정하는 게 아니다. 드러난 그대로를 긍정한다. 드러나지 않은 것을 긍정한다는 것은 '그래도 A는 A다'라고 하는 것이다. 드러난 것이 전부라고 하는 것 속에는 지금은 A로 지금은 B로 드러난다는 것은 얘가 규정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긍정할 때만 드러난 것을 그대로 긍정하는 것. A를 A라고 생각한다면 A가 달라지면 바로 규정성을 벗어났다고 원망하게 된다. 어떤 것도 규정적이지 않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분절 1: 내가 배운 코드. 물질적 분절과 언어적 분절. 그런데 이때 왜 산을 산으로 긍정할 수 없을까? 겨울산과 여름산 어떤 게 산의 모습인가? 산이 분절적인 차원에 대응한다고 한다면 어떤 사람은 여름산이, 어떤 사람은 겨울산이 진짜 산이라고 할 것이다. 그럼 다른 측면들은 산에 대해서 허구나 가짜가 되어 버린다. 우리가 생각하는 코드 아닌 다른 것을 부정하게 된다. 내가 생각하는 현실 아닌 것이 펼쳐지면 부정할 수가 없다. 분절 1은 임시적인 것일 뿐 사실은 어떤 것도 분절되지 않은 채로 존재하는 것이 세계의 진상이다. 空. 0.
무규정적인 차원에서 어떤 것이 드러나도 다 긍정할 수 있다는 게 바로 분절 2. 여실하다는 말. 如實. 세상은 진짜같이 존재한다.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순간이 진짜인 것처럼 존재한다. 즉 가짜는 없다. 진짜라는 하나의 표본이 있고 다 이것들처럼 존재한다는 말이 아니고 여실하게 존재한다는 말은 세상에 어떤 가짜도 없다는 말. 드러난 모든 것은 드러난 그 자체로 진짜와 같다.
니체 왈. 세상은 다 오류다. 오류라는 것은 모두 '그런 것 같다'는 것이다. 오류란 진리에 대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라는 것도 결국 오류이기 때문에. 선종에서는 분절되지 않는 흐름으로서의 세계를 깨달아야 공과 연기를 아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긍정한다는 것은 코드를 긍정한다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 유의 세계와 무의 세계가 나누어져 있지 않다. 유/무라는 말 자체가 그런 게 아니다. 무가 0 개념과 같다. 공을 나타내는 인도말이 0이라는 개념과 같다. 공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0을 생각하라. 0은 없는 수가 아니며 다른 모든 수의 기준이 되는 수다. 그래서 수학에서 0이라는 개념을 발명한 게 혁명. 왜냐하면 다른 수를 출현시키는 수이기 때문이다. 공은 실체가 없다. 0도 실체가 없다. 0은 지시할 수 없다. 그러나 0이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다른 수들의 차원을 가능하게 때문이다. 0이 없으면 10, 100이 불가능하다. 수의 세계의 관점에서 보면 0이라는 것이 수의 세계를 작동시키는 근원. 하지만 초월적 근원은 아니다. 선종은 본질이라는 것을 부정했다. 선종에서 말하는 본질이란 드러난 것 그대로가 있는 그대로의 본질이다. 즉 하나의 본질이란 없다.
그런데 뭔가가 있다, 없다고 하는 것은 다 망상.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사랑을 카피하다>
줄리엣 비노쉬가 나오는 영화. 두 남녀가 여행지에서 만나는데 각자의 배우자 얘기를 한다. 그러다 갑자기 둘이 각자의 배우자인 것처럼 행동한다. 키아로스타미는 영화 안에서도 분명 극 영화인데 그게 연출과 연출 아닌 것의 구분이 모호하다. <올리브 나무 사이로>에서도 영화를 찍기 위해 마을 사람들을 배우로 쓴다. 그리고 영화 찍는 얘기까지 보여준다. 그런데 영화 중간중간 얘기를 나누는데 배역으로서 얘기하는 것인지 아니면 진짜인지가 헷갈리는 영화다. 키아로스타미는 의도적으로 구분하지 않고 찍는다.
<클로즈업>이라는 영화. 키아로스타미보다 더 유명한 영화감독 마흐말바프. 집안이 다 영화를 찍는 사람. 이 감독이 사랑받는 국민감독. 그런데 이 감독을 존경하는 남자가 실제로 마흐말바프 감독이라고 하면서 진짜로 그 감독처럼 행동한다. 그 실제 사람을 데리고 영화를 다시 찍는다. 영화 자체가 실제인지 허구인지. 어디까지가 픽션이고 논픽션인지 전혀 중요하지 않은 세계를 보여준다. 실제 사기꾼이 자기를 연기하는 장면. 맨 마지막에 영화의 주인공을 키아로스타미가 찍으면서 마흐맒바프를 만나게 해준다. 그런데 그 둘의 대화를 롱샷으로 잡힌다. 그래서 모든 것을 들을 수가 없다. 그래서 모든 것을 들을 수가 있다.

<4:33>
이것이야말로 선불교. 4:33간 이루어진 모든 소음과 음악의 경계를 없애버렸다. 음악에 대해 갖고 있는 우리의 표상이 있는데 4:33초간 있었던 모든 소음을 음악이라고 한다. 소음과 음악의 경계를 없애는 순간 음악가와 음악가 아닌 것을 없애버린다. 존 케이지가 불러온 혁명. 노이즈 음악. 음악가와 음악가 아닌 사람들의 경계를, 음악과 소리의 경계를 허물어버렸다.
소음도 음악이다. 분절 2.
음악이라고 갖고 있는 분절1의 세계. 음악은 음악이고 소음은 소음이다. 이것을 4:33초로 뚫어버려서 모든 소음도 다 음악이라고 한다.
213페이지.
모든 존재가 투명하다.
꽃은 꽃이라고 산은 산이라고 부르지만 임시적으로 부를 뿐이다.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게 아니다. 존 케이지도 침묵이 음악이라고 말하지 않은 게 아니다. 모든 언어가 깨달음의 언어다. 나타나는 현실 모두에 대한 절대긍정으로 갈 수 있다. 모든 소음이 음악이라고 해야 하는 것.
도겐 선사. 꽃이란 꽃과 같은 것. 우리가 꽃이라고 말하지만 꽃과 같은 어떤 것으로서 실선을 가지고 존재하지 않는다. "물고기 노니는데 물고기 닮아 있다. 새 나는 데 새와 같다." 내가 보는 것을 보면서 물고기를 닮았다고 말한다. 언어로 세계를 규정하려는 방식이 아니라,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언어를 규정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게 이런 시적인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와 같다'의 사태. <사랑에 빠진 것처럼> 영화인지 아닌지를 여러겹으로 보여주는 영화.

256페이지
스후라와르디.
조명철학(254)
선종에 가 있으면 좋았을 것 같다. 256페이지. 비슷한 모습이라는 뜻. 드러난 것은 그런 것 처럼 드러난 것이다. 아슈바라는 말의 본래 의미는 사막에서 멀리 아득히 나타나는 사물의 모습. 경험계 사물에 비슷하지만 물질성을 결핍하고 있기 때문에.
컵이라는 것은 컵과 비슷한 무엇 속에서 떠오르는 무엇이다.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절대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카스타네다.
대학원에서 공부하면서 남미 쪽에 남아 있는 샤먼에 대해 연구했던 사람. 멕시코에 샤먼이 제일 많다. 멕시코는 아직도 마약 성분의 식물이 자라는 서직지가 많다. 그것들은 누구나 접근할 수 없지만 아직도 거기에 샤먼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어렵게 그 사람을 만나서 훈련을 받아서 다른 체험을 하고 쓴 책이 많다. 샤먼 얘기가 실제로 나오는 책.
실제 속에는 네가 보는 힘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힘 하나가 작은 돌덩어리에도 강하게 존재한다. 그걸 감지하기에는 속세의 때가 너무 많이 묻어있다고 하는 샤먼. 우리는 돌을 가볍게 들지만 훈련을 받고 나면 돌에 정령이 있는 것처럼 감당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자기 스스로 강해지는 훈련부터 받아야 한다.
니체. 남을 존경하려면 나부터 강해져야 한다. 강자를 만나려면 나부터 강자가 되어야 한다.
자연은 에너지로 넘쳐나는데 그 에너지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그 훈련을 받으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세계가 드러난다. 샤먼은 영을 본다. 시공간이 달라지는 것을 느끼고 조금 왔는데 너무 먼 곳을 왔다. 잠깐 눈을 붙였는데 하루를 자고 난 것처럼. 시공간이 완전히 변형된 것처럼. 이를 카스타네다는 논문으로 썼다. 이때 현실이 가장 비현실적이게 되고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른 현실들 가운데 하나가 된다.
초끈이론. 현대과학에서는 차원이 적어도 11차원까지 있다는 것을 계산해 냈다. 차원이 다르다는 것은 시공간이 완전히 바뀐다는 것이다. 다른 유형의 시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계산해 낸 것. 그렇다면 우리가 실제라고 부르는 것은 다양한 시공간 중에 하나에 불과하다.
우리는 지금 이걸 실제라고 믿고 나머지는 다 신비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이마주의 세계, 샤먼들이 보는 세계, 몸이 달라지는 체험은 신비한 체험을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존재하는 이 시공간 말고 다른 시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스피노자. 우리는 이런 신체와 정신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사유와 연장으로만 파악한다. 하지만 신은 무수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샤먼, 주역, 이마주라고 말하는 세계. 이마주는 실제에 대한 모사로서의 이마주가 아니다. 이마주는 실제하는 세계를 하나로 출현시킬 뿐인, 하나의 세계로 환원될 수 없는 다양한 세계상을 이마주라고 한다.
이슬람의 신비주의, 수피즘, 카발라는 카프카와도 연관이 된다. 카프카의 소설을 읽으면 지금 여기서 출발을 했는데 도착하는 게 바로 나온다. 출발 하자마자 도착해 있는 방식으로 묘사한다. 혹은 한참을 갔는데 제자리인 것으로 묘사한다. 이른바 근대적인 지성이나 이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시공간적 차원에 대한 사유. 우리가 의식을 형성하는 게 언제나 의식화되지 않은 차원에서 형성한다. 의식의 차원이 다른 의식화되지 않은 차원과 어떻게 연관을 맺고 있는가. 의식을 어떻게 볼 것인가가 달라진다.
키아로스타미가 질문하는 것처럼 경험하는 세계가 너에게 진짜인가? 혹은 경험하는 세계말고 다른 세계가 있는 것인가? 우리가 편협하게 코드에 가둬놓고 보는 실제 아닌 세계가 따로 있다는 것. 이마주. 미묘한 실제. (환상이 아니라). 시뮬라크라의 철학.
시뮬라크라가 지금까지는 판타지라고 부정되어 왔는데, 그들은 시뮬라크라를 복권시킨다. 그떄 뭘 허무는가? 코드화된 세계의 절대성을 허무는 것이다.
어떻게 코드화된 채로 세계를 바라보고 듣고 느끼는가. 이런 코드를 어떻게 고장나게 할 것인가? 코드로부터의 해방, 다른 코드로의 발명으로 이어지게 할 것인가? 지금 우리는 코드를 코드로 맞선다. 하지만 근원적으로 자본주의화 된 코드를 고장낸다고 한다면 자본주의 코드 자체를 오작동 시키는 다른 류의 흐름을 흐르게 해야 한다.

아뢰야식.
유식이란 마음의 작용을 다루는 파가 있다. 저변에 의식이라고 부르는 차원이 있다. 프로이트적인 무의식까지 모두 포함. 그 밑에 말나식, 그 밑에 아뢰야식. 의식은 왜 생겨나는가? 심층에 식 자체가 있다. 그런데 왜 이런 차원이 존재하는가? 개인이 살아가면서 의식을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코드화 하면서 살아간다. 그럼 그런 코드화된 삶이 습관이 되면 밑에 씨앗으로 심겨진다. 바로 종자. 그러니까 불교에서는 표층의 사고와 심층사고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말하고 생각하는 식이 또 우리의 의도와 관계없이 심겨진다.
우리의 의식은 요동치고 있는 흐름이 말나식을 거쳐서(나라는 주체를 만드는 식) 의식을 성립시킨다. 표층의식이란 우리 자신이 그리고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의 오래된 습관화된 의식이 무의식 속에서 잠재하고 있는 것.
우리가 습관적으로 생각하는 의식은 무의식에 잠재해 버린다. 그래서 의식을 바꾸기 어려운 것이다. 의지의 문제가 아님. 그러니까 의식을 바꾸는 수련을 해야 무의식도 바뀐다. 의식이 바뀐다는 것은 아래 종자가 다른 종자로 심어져야 한다. 그런데 그게 언제나 말나식, 나라는 게 있는 것처럼 만들어져 온다. 그래서 나의 의식이라는 식으로 의식한다.
언어 아뢰야식은 이즈쓰가 만든 말. 의미적인 것을 아뢰야식이 가지고 있다는 식으로 말을 덧붙인 것. 예를 들어 중요한 것은 미래라고 말하면 미래를 향해 달린다는 게 너무 자연스럽고 좋은 식으로 의식화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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