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류학

5주차 후기 : 성과 속, 필멸과 불멸은 둘이 아니다

작성자
순화
작성일
2018-12-12 22:00
조회
169
  • 성과 속, 필멸과 불멸은 둘이 아니다


이번 주의 책은 M. 엘리아데의 『상징, 신성, 예술』이었다. 이 책 1, 2부를 읽고 예술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글을 써 오는 것이 과제였다. 세미나에서 모두가 책이 신선한 주제로 재미있게 읽었다고 했다. 이 책에서 종교의 상징인 성聖을 예술로 풀어낸 것이 종교와 예술 그리고 성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고 하는데 모두가 공감을 했다. 그러면서 드는 여러 가지 의문점이 있었다. 聖이라는 것을 어디에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예술을 너무 종교로 해석해서 그 의미를 부여한 것이 아닌가? 성聖(예술)이 나오려면 입문식을 해야 한다니, 일상에서의 입문식이 뭐가 있을까? 상징이면 상징이지 그림자 상징이란 무엇인가? 돌로 만든 예술의 의미는? 예술이 성의 표현이라면 결국 일상과는 거리가 먼 것인가?

강의를 들어보니 聖이 비일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저자가 예술을 종교의 상징으로 해석한 것을  신기하게 본 것이 우리의 편협한 사고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과학, 철학, 신화, 종교, 예술을 나누어서 보지만 사실은 이것들 모두가 세계를 보는 하나의 방식이다. 세계를 보는 방식이 다른 것이지, 세계를 표현한 것이라는 면에서는 같은 것이다. 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느 것이 가짜인 것이 아니다. 표현 방식이 다른 것이다. 100년 전만 해도 과학과 예술의 경계가 그다지 크지 않고 서로 주고받는 폭이 넓었다. 르네상스 사람을 Perfect man이라고 한다. 모든 것을 다 하기에. 과학자가 SF 소설에 소설을 영감을 받는다. 들뢰즈는 새로운 철학은 SF 소설이라고 했다. 우리는 이러한 새로운 개념에 준해서 다르게 볼 수 있게 된다. SF는 뻥이 아니고 다른 세계에 대한 이야기다. 이 세계의 경험을 다른 방식으로 확장한 것이다. 그에 비해 지금의 자본주의 시대는 경제와 정치로 환원되지 않는 것은 모두 비일상이 되었다. 이러한 경제만을 추구하는 것이 가장 빈곤하고 편협한 것이다.

엘리아데의 독창적 개념은 ‘역의 합일’인데, 신성하다(sacred)는 것이 역의 합일이다. 성과 속은 둘이 아니다. 신성은 일상적인 것에서 벗어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더 근원적인 차원의 에너지다. 신성은 신성한 주제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고, 가시적이지 않은 것을 가시적 차원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속은 비대칭의 세계로 분절적 세계이다. 일상은 분절을 하면서 형식을 부여하고 리듬을 부여하나 인위적인 것이기에 지루하다. 일상 속의 휴지기도 획일화되어 있다. 이 반복을 깨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새로운 봄(seeing)이 필요하다. 자연은 반복되면서도 그 반복을 파괴하는 요동이 있다. 인간의 삶도 반복을 끝장내고 원점으로 돌아가는 게 필요하다. 기원(원점, 제로상태)으로의 회귀이다. 또 다른 삶을 산다는 재생의 느낌이 필요하다. 무로 되돌려야 새롭게 시작된다. 그것이 성이다.

예술은 눈에 보이는 힘을 다룬다. 새를 그리는 것이 예술이 아니고, 새의 비상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가 예술이다. 새의 비상은 중력과 다른 관계이다. ‘날아감’이라는 이 사건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예술가는 이 비상이라는 느낌의 영역과 관계한다. 보이는 것과 동떨어져 있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예술가는 표현한다. 살아있는 사람의 삶이 아닌 삶의 원초적 형태를 그리는 것이 신성이고 예술이다. 그래서 개체적인 차원이 아니라 개체를 넘어가는 본질을 찾아야 한다. 찢겨진 개체 이전에 근원적 합일의 존재로 가야 한다.
미켈란 젤로는 돌의 형상을 해방한다. 돌이 차갑다, 단단하다라는 코드를 깬다. 그 깨짐을 보고 우리도 답답하게 우리를 가두고 있던 견고함을 깰 수 있다. 돌이 가볍게 비상하는 느낌에서 중력을 무시하고 날아오를 수 있는 우리의 의지의 힘을 느낀다. 한계를 극복하는 힘을 느낀다. 인간은 비상(초월)에 대한 열망이 있다.  이러한 신성, 영성은 정신적 체험만이 아니다. 신체성을 바꾸지 않는 영성 획득은 없다. 그러니 신체적 지평부터 바꿔야 한다. 이게 되지 않으면 새로운 관념을 떠올릴 수 없다. 단식이 그 사례다. 단식을 통해 영성을 획득할 수 있다. 내적 체험이라는 것이 주관적 체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개체가 세계와 만나는 방식이 달라지는 것이다. 내 사고의 지평을 다르게 하는 것이다. 개체는 죽음을 경험한다. 개체의 경험은 죽음으로 즉 필멸한다. 그래서 개체는 필멸에 대한 공포가 있다. 이 공포가 없으면 인간은 함께 살지 않고, 예술 또한 생겨나지 않는다. 문화의 구성은 필멸성과 연관된다. 필멸을 대체할만한 것으로 간 것이 전체다. 인간은 종족의 보존과 동시에 집단을 이룬다. 집단은 기억을 공유한다. 필멸을 보상받는 것이 기억이다.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사라지나 우리는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불멸에 대한 욕망으로 인해 어떤 것을 남김으로 해서 시간적 지평을 벗어난다. 필멸성에 대한 자각으로 일어나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첫째 무력하게 불멸을 꿈꾸는 것이다. 죽어서 천당간다는 것은 수동적인 방식이고, 개인적인 차원에 머무는 것이다. 둘째 무엇인가를 기억하고 쓰면서 흔적을 남기는 능동적 방식이다. 이 방식에는 나를 포함한 이 생에 대한 믿음이 있다. 내가 죽어도 삶은 지속된다. 이러한 면에서 예술을 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무신론자다. 신을 믿으면서 신에게 의지하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남긴다.
상징은 개체에게 새겨진 우주의 기억이다. 근원적이 상징이 있다. 인류의 기억은 같은 뿌리이다. 사물에 대한 다양한 상징을 이끌어내는 자가 예술가다.

강의를 듣고 보니 인간의 필멸에 대한 자각 그리고 죽음은 안 좋은 것으로 일상적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에 대해 확 바뀌는 반대되는 시각이 열린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자각에서 聖이라는 것이 있음을 어렴풋이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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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2-14 10:17
    제목이 멋져요.

  • 2018-12-14 13:47
    성과 속을 분리된 대상이 아니라 역의 합일로 본다면, 일상의 편협함과 지루함을 넘어서 새로운 세계를 감각할 수 있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된 시간이었지요~ ^^
    성(聖)은 일상을 초월한 어딘가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반복을 끝내고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 ! 또 다른 삶을 산다는 재생의 느낌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것!
    두 번째 후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