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류학

[시즌 1마무리]예술인류학 6주차 후기

작성자
혜림
작성일
2018-12-17 18:21
조회
166
<예술인류학 시즌 1>이 끝이 났네요~ 6주 동안 고생하셨습니다~

시즌 1에서는 예술의 기원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돈이 좀 있고 감각이 있어야 예술을 할 수 있다’는 오해를 풀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2달 여의 방학이 있고, 3월 초에 <시즌 2, 시선, 공간, 자본>이 다시 시작됩니다! 시즌 2에서는 예술에 대한 우리의 오해들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제도화된 예술은 어떻게 발생했는지를 다룰 예정입니다.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미셸 푸코, <헤테로토피아>/존 버거 <다른 방식으로 보기>/레지 드브레, <이미지의 삶과 죽음>, 총 4권의 책을 읽습니다.) 시즌 2에서도 함께 공부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6주간 ‘신이치, 바타이유, 레비스트로스, 엘리아데’가 쓴 책을 통해서 예술의 기능과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대칭성의 영역에서 작동하는 예술’, ‘금기를 위반하는 예술’, ‘신성함이 내재된 예술’, ‘구조 속에서 의미작용을 하는 예술’에 대해서 배우면서, 우리가 비대칭적인 영역, 의식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에만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술이 작동하는 심층의 영역을 비합리적인 것으로 치부하며, 먹고 살기 위해 도움이 되는 유용한 측면만을 비대하게 키웠습니다. 4명의 학자들은 예술이 이 단절된 두 극단의 영역을 소통시키는 기능을 한다고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합리적 가치가 더 중요해진 시대에 극단으로 치우는 것이 심각해졌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엘리아데는 이런 치우침의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합리적 가치가 지배하는 일상을 넘어서 ‘새롭게 고취되는 경험’을 원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즉, 인간은 신성함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이런 성스러움이 없어도 사는데 지장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엘리아데가 말하는 신성함, 성스러움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예술은 신성함과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요?

-성스러운 공간

우리가 성스럽다고 여기는 것은 일상 너머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기독교의 천국과 신에 대한 개념이 익숙하기 때문이겠죠. 엘리아데에게 신성함은 ‘체험’과 관련이 있습니다. 대부분 신성함을 정신적인 영역으로 이해하지만, 엘리아데는 이 신성함을 물질에 깃들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상적 사물, 건축, 공간, 예술과 같이 문화적 현상에서 신성함을 발견합니다. 엘리아데의 연구는 ‘왜 인간들은 성스러운 것을 원하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이번에 읽은 <상징, 신성, 예술> 3장에서는 ‘성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스러운 공간은 속된 사물들로 속세의 공간에 구축되지만, 일상의 영역과는 구분된 공간으로써 속세와는 전혀 다른 기능을 합니다. 예를 들어, ‘라스코 동굴벽화’은 속세 밖의 공간은 아니지만, 생계가 이루어지는 유용한 공간의 의미를 탈맥락화함으로써 무용한 행위가 벌어지는 성소의 역할을 했습니다.

이렇게 고대나 중세는 의례를 치를 성소나 교회와 같이 신성한 공간을 만들어서 성과 속을 공존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럼 우리 시대는 어떨까요? 우리가 사는 공간은 무엇에 따라서 구획될까요? 채운샘께서는 우리가 이 시대의 공간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 그 양상을 문제 삼을 필요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 도시는 성과 속이 공존하는 맥을 모두 차단하고, 오직 자본만이 흐를 수 있는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자본이 흐르는 공간에서 비일상적 체험은 우리가 ‘핫플레이스’라고 불리는 곳이나 집값이 비싼 동네를 가야 할 수 있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상을 모시는 대신 상품을 모시고 살고 있지요. 엘리아데는 이러한 문화적 현상에서 사람들이 광신적으로 모여들고, 뭔가를 모시려고 한다는 점에서 의례 행위의 흔적을 볼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물론 이러한 성스러움은 자본주의 구도 속에서 왜곡된 형태로 드러난 것이지만, 엘리아데가 이런 문화적 현상 속에서 본 것은 성스러움에 대한 ‘인간의 갈망’입니다. 인간은 ‘종교적인 인간(Homo Religiosus)’으로서 단순히 일상만으로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본으로 왜곡되지 않는 비일상적인 신성한 체험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신체와 성스러움

보통 신성함이라고 하면, 웅장한 성당에 들어갔을 때 압도되는 느낌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강의시간에 고딕성당과 보르보두르 사원을 비교해주신 부분에서 신성함에는 서로 다른 차원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딕성당에 들어가는 순간, 인간은 왜소해지고 거대한 신성성 속에서 사라져버리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고딕성당은 하나의 웅장한 객체가 인간을 압도합니다. 반면에 보르보두르 사원의 경우 인간이 한 번에 사원 전체를 조망할 수 없으며 올라갈 때마다 사원의 형상이 바뀝니다. 인간의 신체를 움직일 때만 그 사원 속에서 성스러움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신체의 움직임과 더불어 신성함의 순간을 체험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고, 우리가 신성함을 얼마나 정신적으로만 접근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보르보두르 사원, 인도네시아-

사진만 봐도 사원의 기운이 예사롭지 않은데, 기회가 되면 꼭 한번 가고 싶습니다.

여행을 가고 싶은 것도 우리가 익숙해진 일상의 지루함에서 벗어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여행을 통해 비일상적인 새로움을 느끼고 싶은 것은 아마도 일상을 벗어나 다른 장소로 ‘순간이동’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일 겁니다. 이것은 마치 일상과 분리된 고딕성당과 같은 비일상적 공간으로 이동함으로써 무언가에 압도되고 싶은 것과도 같습니다. 반면에, 신성함을 수반한 새로움을 느끼기 위한 여행은 나를 압도하는 곳이 아니라 내 신체를 좀 더 다른 방식으로 쓸 수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닐까요? 성과 속이 구분되지 않았다는 맥락에서 이러한 일상을 벗어나기 위한 여행은 일상 속에서도 가능할 수 있습니다. 사원을 반복해서 걸으면서 매번 다르게 신성함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일상에서 주어진 조건과 다른 관계를 맺음으로써 일상에서 신성함을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매 순간마다 신체의 변형과 함께 느낄 수 있는 것이 엘리아데가 말하는 신성함인듯 합니다.

지난 시간에 ‘타르코프스키’의 <노스탤지어>에서 촛불을 꺼뜨리지 않고 이동하는 장면에 이어서, 이번 시간에 본 ‘빌비올라’의 <egg hatch>는 아주 느린 속도로 새가 알을 깨고 나오는 영상이었습니다. 이 두 영상은 뭔가 뭉클함이 느껴지면서도 ‘시간’이 주는 신성함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줍니다. 반복되는 행위와 느린 시간을 잘 견디지 못하는 제가 일단 영상을 본다는 것 자체가 고행(?)이었는데요. 영상을 끝까지 본 뒤에 묘한 정서적 반응이 올라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게 혹시 '신성함 '이 아닐까요.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듯 뭔가 웅장하고 굉장한 느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알을 깨기 위한 행동을 반복하는 새, 초를 꺼뜨리지 않기 위해서 오고가기를 반복하는 배우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무엇. 신성함은 순간적으로 어딘가로 이동해서 압도당하는 경험이 아니라 오히려 반복되는 과정 중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성스러움과 예술

저는 예술가는 반복되는 행위보다는 일상에서는 본 적 없는 파격적인 새로움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채운 샘께서는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예술가는 하나의 화두를 돌파하기 위해 반복되는 행위를 했다고 합니다. 브랑쿠시는 ‘비행’이라는 하나의 화두를 잡고 형상화하는 것을 반복했고, 반고흐의 화두는 ‘씨뿌리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그들은 형식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감각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러한 예술가는 기존 예술의 전형성을 탈피하기 위한 문제의식이 담긴 작품을 창작해냈습니다. 예를 들어보면, 아름다운 화풍에 추함을 그려 넣는 것, 사람들이 좋아하는 정적인 분위기의 작품이 아니라 인체의 역동성을 느끼게 해주는 것, 노동자의 삶을 거리를 두고 보는 낭만적인 시선이 아니라 노동을 함께 일하는 자의 시선으로 그 삶을 포착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고흐,<낡은 구두 한 켤레>(1886)

예술가는 일상적인 사물에서 드러나지 않는 가치를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고흐의 <낡은 구두 한 켤레>의 구두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구두이지만, 예술가는 낡은 구두를 신고 힘든 삶을 살았을 어떤 사람들의 삶을 읽어내서 구두 그림을 그린 것입니다. 일상적 사물이 그자체로 보여주지 않는 삶의 지평을 보여주는 것이 예술의 역할입니다.  우리는  예술을 통해 전형적으로 인식하던 사물을 다르게 감각할 때 신성함을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예술은 일상의 사물을 다른 차원으로 보여주면서 속의 차원의 물건을 성의 차원으로 열어줍니다. 성과 속은 기능이 분리되어 있지만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예술을 통해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 성과 속의 마주침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 엘리아데의 신성성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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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2-19 11:58
    느린 시간을 체험하는 고행을 통해 느끼는 성스러움 !!
    좋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