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탁 NY 3학기 8주차(9.25) 공지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21-09-14 17:20
조회
87
 

 

 

혼자 읽는 것과 함께 읽는 것은 정말 혼자 밥먹는 것과 같이 먹는 것 만큼의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혼자 읽을 때는 왠지 알 것 같은 문장도 다른 해석에 부딪히고, 혼자서는 도저히 모르겠던 것도 가만히 듣다보면 이게 그말이구나 하고 끄덕이게 됩니다. 특히 니체의 수수께끼 같은 아포리즘들을 공부할 때는 더 그런 것 같습니다. 1교시에 저희는 자신에게 와 닿은 글귀들을 엮어가며 세미나를 했습니다. 이번 범위에는 두고두고 소장하고 싶은 주옥 같은 구절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소유에 대한 니체의 명문들은 정말 소유하고 싶을 정도였지요ㅎㅎ. 가령 이런 구절들입니다.

“소유는 단지 어느 한 단계까지만 인간을 더 독립적이고 자유롭게 만들어줄 수 있다. 그 한계에서 한 단계만 나아가면, —소유는 주인이 되고 소유자는 노예가 된다.”(317절)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소유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유는 공적으로 위험한 것이 된다. 즉 소유가 그에게 보장할 수 있는 한가한 시간을 사용할 줄 모르는 소유자는 항상 소유하기 위해 계속 나갈 것이다.”(320절)

저희는 소유의 이런 특징은 단지 물질적인 재화에만 그치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재산은 당연하겠지만 지식이나 경험도 단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방대한 앎과 진한 체험이 그 사람을 더 고집스럽게 만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너무나도 아는 게 많은데, 그 앎을 사용할 줄 모르는 사람, 오히려 자신과 남들을 불행하게 하는데 사용하는 사람을 심심찮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유로 얻은 풍요를 소유를 늘리는 일 말고는 다른 데 사용할 줄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앎을 숙성시키지 못하면 그 앎에 지배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아마 그런 이유로 니체는 너무 많은 책을 읽지 말라고 한 것이겠죠?(언젠가 강의 중에 채운샘은 ‘지식은 좀 소유하세요’라고 하신 말이 따끔하게 기억나긴 합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읽고 듣는 것이 설익은 채 제개 남아있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공부 공간에서 배우는 것들은 너무나 귀한 가르침이지만 저는 소화하지도 못한 채 입으로만 떠벌거리고 있다는 자의식이 드는 것이지요. 앎을 소유하는 일에 있어서도 ‘정신’이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해봅니다. 저는 이 정신이 아마도 ‘회향의 마음’이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즉 이 공부를 내가 잘나서 혹은 내가 똑똑해지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배울 수 있는 몸, 인연, 스승, 도반이 있기에 이런 지혜를 접했으니 그것을 어떻게 나눌지를 고심하는 마음 말입니다. 이것을 상기하지 못하고 저처럼 ‘정신’ 없이 공부하다보면 소화불량에 휩싸이기 십상입니다. 소유의 문제 앞에서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겠네요!

저희는 소유와 정신의 문제와 연결시켜 볼 수 있는 고통과 그것의 감수성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니체는 말합니다. “자주 아픈 사람은 그만큼 자주 건강해지기 때문에, 건강해지는 데에 대한 기쁨을 더 크게 느낄 뿐만 아니라 자신과 타인의 작업과 행동 속에서도 건강한 것과 병에 걸린 것을 보는 극도로 날카로운 감각을 가지고 있다.”(356절) 무척 공감이 가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질문이 듭니다. 어떤 사람은 죽다 살아날 정도로 아파도 하나도 바뀌지 않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사소한 일에도 큰 배움을 얻는가 하면, 사경을 헤매고 와도 똑같이 사는 게 인간입니다. 왜 누구는 죽다 살아나도 그대로고(혹은 ‘건강’이라는 더 견고한 우상에 빠지고) 누구는 벌레로부터도 통찰을 시작하는가? 이 차이를 뭘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번뇌의 감수성, 고통의 문제화 능력, 영향받을 수 있는 능력 뭐라고 표현하든 이것은 인간의 근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큰 병이 도래한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것을 앓을 수 있음, 정신을 가지고 그 경험을 소유할 수 있음이 문제인 것이지요. 니체는 고통을 단순한 아픔이 아니라 가장 위대한 고통인 산통으로 만들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병으로부터 전에 없던 건강을 발명할 것인가의 문제. 어떻게 앎과 소유로부터 전에 없던 삶의 양식을 형성할 것인가의 문제. 니체는 말합니다. “어떻게 의무는 광채를 얻는가—너의 청동빛 의무가 모든 사람의 눈에 금으로 보이도록 변화시키는 수단은, 네가 약속한 것보다 항상 더 많은 것을 지키는 것이다.”(404절) 병, 의무, 고통, 치부, 패배, 운명의 무게와 색깔을 바꾸어내는 것은 그 다음의 행위들입니다. 달리 말하면 기대되는 것보다 더 많은 항체를 만들어내고 그리하여 전과는 다른 패턴을 그려낼 수 있을 때 우리는 건강해지는 것 아닐까요.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읽고도 재미난 이야기를 많이 나눴습니다. 마지막까지 읽고 모이니 혼자 볼 때랑은 다르게 얘깃거리가 무척 많았습니다. 그중에서도 거울에 대한 것과 죽음에 대한 것, 그리고 니체에 대한 것들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우선 고양이의 주인인 구샤미가 거울을 보는 장면이 길게 언급됩니다. 실제로 소세키는 자의식도 강하고 외모적인 콤플렉스가 많았다고 하는데요(샤프한 사진과는 다르게도). 아마도 어린시절 양자로 친척집을 오갔던 일과 심한 곰보자국이 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을 것 같습니다(왠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양이는 거울은 인간의 “자만 제조기이자 소독기”라는 말을 합니다. 거울을 보며 자신에 대한 우쭐감에 빠지는 한편, 자신이 추하다는 생각에 자만심을 꺾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내면 혹은 자의식의 두 가지 경로인 것 같습니다. 그것은 분명 인간을 왜소하고 수동적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해롭지만, 그렇게 자신의 심리를 관찰하고 완전히 해부할 때 우리의 번뇌를 넘어갈 길도 보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왠지 거울을 보는 구샤미를 보는 고양이에 대해 쓰는 소세키의 어마어마한 관찰력, 자기 자신을 거리를 두고 보는 힘에 놀랐습니다.

고양이는 다소 허무하게 죽습니다. 맥주를 맛보고 기분이 좋아져서 물 항아리에 빠져서 익사합니다. 저는 혹시 연재를 급 마무리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쉽게 처리해버렸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샘들은 다른 해석을 해봄직하다고 하셨습니다. 갑작스런 죽음, 그게 죽음인 것이라고요. 오히려 소세키는, 주인공이고 화자이면 의미 있는 결말을 맞이해야 한다는 저희의 환상을 돌아보게 한다는 것이죠. 그렇습니다. 오히려 저희는 이런 죽음에 의문을 품는 저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야겠지요. 고양이는 죽기 전에 깨달은 자와 같은 말을 합니다. “빠지기 위해 독을 긁어대는지, 긁어대기 위해 빠지는 것인지 알 수 없다”며 고통은 억지부림에서 온다는 것을 깨우치고 발버둥을 그만두지요. 채운샘은 강의에서 이것을 깨달음으로도, 혹은 여전한 지식인의 허영으로도 해석해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죽음에 대한 소세키 자신의 체험인 ‘생각나는 것들’이라는 단편에서의 단상들과 함께 이리저리 질문을 찔러가며 읽어볼 만한 결론이지요.

마지막으로 소세키가 본 니체에 대한 생각이 계속 머릿속에 남습니다. <고양이>에서 메이테이 선생은, 니체가 초인을 이야기한 것이 바로 모래알과 같이 서로에게 평등하고 서로에게 자기주장을 하며 서로에게 위축된 개인들로 넘치는 현실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얼핏 그 사람의 이상처럼 보이지만 그건 이상이 아니라 불평이네. 개성이 발달한 19세기에 위축되어, 옆 사람에게 좀처럼 거리낌 없이 몸을 뒤척일 수 없으니까,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그런 난폭한 글을 휘갈긴 거지. 그래서 그걸 읽으면 장쾌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안됐다는 느낌이 드네. 그 목소리도 용맹하게 정진하는 목소리가 아니야. 아무리 봐도 원통하고 분하다는 소리지.”

처음에는 (우리가 배우는) 니체에게 이렇게 말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강의를 듣고 다시 생각해보니 썩 틀리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소세키에게 니체는 어떻게 읽혔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습니다. 20세기 초, 니체 죽기 직전부터 영웅처럼 숭배되었고 일본의 소세키는 그의 철학을 맑시즘을 비롯한 수많은 서양 사상들과 한꺼번에 만났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소세키가 니체를 보기에 그는 서양인 중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니체는 병으로 고생한 서양인이고 서양에서 자기 문제를 고민했을 뿐입니다. 자신의 정체성, 일본의 정체성, 동양의 정체성 속에서 불교, 도교, 유교, 일본의 민족 정신 등 훨씬 더 복잡한 사상들 속에서 고민했던 소세키가 보기에 니체의 초인 개념은 어쩌면 순진해보이지는 않았을까요? 인간을 넘어간다는 것이 서양인의 외발성 혹은 적극주의의 억눌린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진 않았을까 하고 추측해볼 따름입니다.

달콤한 추석 연휴가 다가오네요! 한 주간의 방학 동안 여유롭게 놀고 책도 읽어오면 좋겠습니다. 채운샘의 말씀을 전합니다. “모두 공언하신 대로 추석때 열필하셔서 연휴 끝나는 대로 내게 글폭탄을 보내주시길 기원합니다.” 대단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추석입니다ㅎㅎ. 공지하고 마치겠습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2> 286쪽까지 읽고 이야깃거리를 준비해옵니다.

-<마음>을 읽고 이야깃거리를 준비해옵니다.

-4학기 에세이를 구상해옵니다. 어떤 작품으로 어떤 이야기를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나눌 수 있을지 생각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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