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

3학기 3주차 후기

작성자
정희
작성일
2021-08-14 13:52
조회
112
푸코  주체의 해석학’ 3주차 후기

미셸 푸코의 「주체의 해석학」에서는 주체화의 문제가 핵심입니다. 푸코가 스피노자와 닿는 부분은 우리를 무수한 연관관계의 상호작용 속에서 규정되어지고 구성되어지는 존재로 보는 지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저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가? 저항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푸코는 이 부분에 주목하여 억압하는 힘과 저항하는 힘을 외재적으로 사유하지 않고, 역동적인 힘들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배치를 달리하며 저항을 구성할 것인지 ‘주체화’를 사유합니다. 진리, 권력, 주체 의 키워드를 가지고 ‘능동적 주체화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이것은 ‘인식’의 문제로 환원될 수 없으며 수련을 통해 조형될 수 있음을 계보학적 고찰로 보여줍니다.

푸코는 <주체의 해석학>에서는 성의 역사를 언급하지 않고 ‘주체’의 테마를 다룹니다. 주체가 자신의 쾌락과 관계를 설정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자기와 자기의 관계를 전제로 하며, 성은 이러한 자기관계의 여러 표현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에 주체의 계보학은 성의 역사보다 더 넓은 외연을 갖게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방법으로 서구 문화에 있어서 진실과 주체가 맺는 관계의 역사를 재검토함으써 니체적 의미에서의 계보학을 보여줍니다.

푸코는 고대인들에게 철학적 행위의 중심이었던 ‘자기배려’가 어떠한 이유로 억압되고 소거되었는가를 밝히는 과정에서 ‘데카르트의 순간’을 주목합니다. 자기배려의 전통은 진실에의 준비로서 구도-주체가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자기 자신에게 변형을 가하는데 필요한 탐구, 실천, 경험-를 제기하는 것이 그 특징인데, “진실에 접근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오직 인식이라는 것을 용인하는 순간 우리는 근대로 접어든다”는 푸코의 말처럼 데카르트는 이 구도의 조건을 소거합니다. 데카르트가 이룬 참된 담론의 대상으로서의 주체의 구축은 곧 행동의 윤리적 주체를 포기함으로써 이루어졌다는 것이 논지의 핵심입니다.

푸코의 방식은 철학이란 역사적 조건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진리는 탈시간적인 것이 아니며 그것 자체로 역사적 산물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어떤 조건 속에서 이것들을 진리로 구성해왔는가 그 배치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대의 윤리적 주체가 제기하는 문제는 ‘나는 나를 무엇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인가?’하는 문제이며, 이것은 자기인식의 문제라기보다 자기의 삶을 작품의 재료로 간주하여 어떻게 자신을 조형해나갈 것인지의 문제였고 푸코는 이를 ‘실존의 미학’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자기와 자기자신과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고 실천 행위를 통해 자신의 삶을 조형해나가는 것이 '자기해방'이며 이러한 과정으로서만 권력에 대한 궁극적인 저항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는 정치적 지배에 대한 저항이나 경제적 착취로부터의 해방만이 아니라, 정체성의 예속에 항거하는 투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기배려(Epimeleia heautou) 개념은 자기 자신을 돌보는 행위, 자기자신에 몰두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푸코는 Epimeleia heautou(자기배려)와 gnothi seautou (너 자신을 알라) 간의 문제에 주목합니다. 고대 그리스 신전에 새겨진 gnothi seautou (너 자신을 알라)의 뜻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잇는 것처럼 신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인식을 규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신의 견해를 들으러온 자는 최대한도로 질문의 수를 줄이기 위해 알고 싶은 바에 스스로 주의를 기울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 소크라테스와 연관되면서, 소크라테스가 말한 자기배려(Epimeleia heautou), 즉 자신을 돌보는 여러 가지들 중에 한 형식으로서 등장합니다. 이후 이러한 자기배려의 개념은 소크라테스로부터 출발해서 에피쿠로스학파, 스토아학파 등 헬레니즘과 로마의 긴 여름을 거치면서 초기 기독교의 금욕주의까지 폭넓게 확산되어 총제적인 문화현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의 서양 철학사에서 자기배려가 무시된 이유는 무엇인지, 왜 ‘너 자신을 알라’에 그렇게 많은 가치를 부여하게 된 것인지 푸코는 문제제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 ‘데카르트의 순간’ 이전, 오래 전부터 유일한 인식주체를 통해 진행되는 진실에의 접근과 주체가 자신에 가하는 작업의 구도적 필요성을 서로 분리시키는 작업이 있었습니다. 5세기 말부터 17세기까지 관통하는 기독교의 주요 분쟁은 구도(求道)와 과학 간의 분쟁이 아니라 구도(求道)와 신학 간의 분쟁이었습니다. 대립은 신학적 사유와 구도적 요청 간에 발생하였고 따라서 단절은 근대과학의 출현으로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와 관련하여 구도의 조건과 진실에 이르는 여정과 방법의 문제에 17세기는 어떻게 문제제기를 하였는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피노자의 <지성교정론>에서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나는 주체 존재에 어떤 조건들을 부과해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어떤 한도 내에서 이 진실에의 접근이 내가 찾고 있는 바, 지고의 선을 줄 것 인가?’하는 인식철학과 주체의 존재변형 작업과의 밀접한 관계가 드러납니다. 이후 헤겔, 쉘링, 쇼펜하우어, 니체, 후설, 하이데거 등 19세기 철학 전반을 검토하면 구도성이 아무리 신빙성을 잃고 비판적으로 고찰되었다 하더라도 인식은 구도의 요청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철학에서 구도의 어떤 구조가 인식, 인식행위, 인식행위의 조건, 그 결과를 주체 존재의 변형과 연관시키려고 시도합니다. 결국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바로 이런 의미에 다름 아닙니다. 그리고 19세기 철학사 전반은 기독교 이래 17세기 철학이 벗어나려 했던 구도의 구조들을 재성찰하려고 시도하는 철학이 이용한 일종의 압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푸코는 바로 여기에서 모든 고전 철학-데카르트, 라이프니츠 등-과 19세기 철학 간에는 심층적인 적대성이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19세기 맑시즘을 보면 그것은 우리를 진실접근을 위한 주체형성조건으로 회부하지만 이것들을 사회, 조직을 통해 사유합니다. 주체와 진실의 문제를 당이나 계급 등의 사회형식으로 귀속시킬 때, 실존과 구도를 역사적 측면에서, 노동자 주체의 삶의 양식을 바꾸는 문제로 사유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런 교훈으로부터 채운샘은 철학을 정합적 논리로만 생각해서는 안 되며, 실천을 통해서 어떻게 나를 조형하는 하는 무기로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것에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체의 해석학>, 이 책의 독법에 있어서 <알키비아데스>와 같은 관련 텍스트 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푸코가 문제를 설정하고 문제를 구성하는 방식에 더욱 초점을 갖고 읽어보라는 채운샘의 조언이 있었기에 후기를 짧게 써야 한다면 이 부분을 정리하고 싶었습니다.

고대 자연철학자들 이후로 인간의 문제를 철학의 화두로 가져온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영혼을 돌보라’라는 말로 문을 엽니다. 그의 말은 어느 시대든 누구에게든 큰 울림을 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현존하는 우리는 주어진 삶을 어떻게든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자신과 어떻게든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푸코의 문제제기는 무척이나 나의 깊숙한 부분을 건드린다고 생각됩니다. 소크라테스가 ‘의미 있는 삶을 살기위해 자신을 돌보라’라고 했을 때에는 자기배려의 풍부한 여러 기술들 안에서 자기인식의 문제가 표명되었는데, 근대를 지나 오늘날에는 자기배려의 문제가 자기인식의 문제로 한정되어버렸다는 것을 나는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나 또한 자기인식의 문제로 진실에 접근하고자 해왔던 것이 분명합니다. 문제를 정확히 인식하는 방법으로, 그 이유를 끊임없이 추궁하는 방식으로 나와 관련한 문제들을 풀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부족한 것은 제대로 상황을 인식하지 못한 지점도 있지만 그것 이상으로 몸으로 실천으로 수련하고자 하지 않았던 지점이었습니다. 자기인식 이외의 자기수련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 무지가 정점으로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부터 내가 할 수 있는 자기배려는 어떤 것일까요? 이 무지를 자각하는 순간이 자기배려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시간이라고 했습니다. 저 또한 이 책을 읽어가며 나름의 답을 찾아가고 싶습니다. 또한 주어진 관계 속에서 어떻게 능동적으로 자기를 조형해갈 것인지 ‘실존의 미학’으로써 철학을 사유하게 해 주는 푸코에게 더욱 더 많은 에너지를 받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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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16 10:54
    하나의 문제가 어떤 계열과 어떻게 관련됐는지를 구성할 수 있으면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특히 고대 중국의 텍스트들을 조명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역, 논어, 맹자, 장자부터 묵자, 열자 같은 텍스트들도 다루면 어떤 이야기들을 할 수 있을지 기대돼요. 아주 세련된 논의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ㅎㅎ 마음만 앞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