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기너스

비기너스 시즌 4 열 번째 시간(7.21)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0-07-16 00:41
조회
61
“극단적 의견은 만장일치를 이끌어내지만 절제된 의견은 민회를 분열”(185쪽)시킨다. 이번 주에 읽은 부분 중 3강에서 푸코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아테나이 민주정에서의 ‘파레시아의 위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파레시아의 위기라는 말이 뜻하는 바는 이전에는 그 자체로 진실의 기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여겨졌던 파레시아가, 불현 듯 ‘문제’가 되기 시작 했다는 것이죠. 어떤 연유인고 하니, 아테나이의 민주정은 민회에 참여하는 모든 시민들에게 파레시아의 권리를 부여하는데 이렇게 모두에게 평등하게 부여된 ‘권리’가 실제로 진실을 말할 수 있는 ‘능력’ 혹은 ‘자격’과 일치되지 않는다는 것 입니다. 데모스 앞에 선 연사들은 그들의 환심을 사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극단적인 주장을 펼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시민들은 오직 자신들의 욕망을 지지하는 연사만을 남기고 다른 이들을 내쫓거나 도외시하게 됩니다. 그 결과 민주정은 그저 원하는 대로 하는 것, 즉 아콜라시아akolasia(무절제, 품행의 문란, 방만한 품행)가 되어버립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며, 고대 세계에서도 ‘표현의 자유’가 문제가 되었구나! 하고 한 번 놀랐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표현의 자유가 문제화되는 방식이 지금 우리와는 너무나도 다르다는 것에 또 한 번 놀랐습니다. 당연히 미디어의 환경을 비롯한 시대적이고 사회적인 조건이 다르니, 표현의 자유가 문제가 되는 방식도 다를 수밖에 없겠죠. 그런데 푸코의 텍스트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다름’이 ‘진실과 주체의 관계’로부터 비롯된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시대가 다르다’의 차원이 아니라 여기에는 전혀 다른 주체성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죠. 지금 표현의 자유는 어떠한 방식으로 문제가 되고 있을까요?

다양한 방식이 있겠지만 ‘페이크 뉴스’의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표현의 자유가 문제가 되는 방식은, 복잡한 미디어 환경에서 사람들의 발언을 그대로 방치할 경우 ‘실체적 진실’이 왜곡되고 사람들이 거짓된 정보에 선동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국가 차원에서 인터넷상의 표현의 자유를 어느 정도 규제할 필요가 있다는 말들이 나오기도 하는 것이죠. 여기에는 객관적 ‘진실’이 주어져 있고, 그것을 조작하거나 왜곡하여 유포함으로써 이익을 얻으려는 이해관계가 작동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도대체 해석과 왜곡의 경계는 어디인가? 어디까지가 표현의 자유이고 어디부터가 명예훼손 혹은 허위사실 유포인가? 나아가 조작된 정보일지라도 그것이 기꺼이 그 정보를 받아들이고 그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자 하는 욕망과 맞닿아 작동한다면, 그것을 단순히 ‘거짓’이라고 말 할 수 있는가? 페이크 뉴스가 문제라면, 그것은 객관적인 팩트체크와 적절한 규제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가? 이런 식으로 계속 질문을 던지다보면 결국 ‘객관적 팩트’라는 것의 무력함과 실체 없음에 도달하게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테나이 민주정에서 표현의 자유가 문제가 된 방식은 조금 다릅니다. 여기서는 파레시아의 권리를 사용하여 정치적 발언을 하는 연사가 적절한 조언을 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의 문제는 뒷전입니다. 고대인들은 ‘그가 객관적 사실을 말하는가?’, ‘그가 하는 말에 증거가 있는가?’하는 방식으로 질문을 던지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간단히 말하자면, 진실을 말할 능력을 지니지 못한 나쁜 연사들이 대중에 영합하려 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주체의 해석학》에 나왔던 하급자의 아첨과 상급자의 분노에서처럼, 발언자와 청자가 서로의 예속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문제입니다. 대중(청자)들은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 하는 어린애 같고 나약한 상태에 놓이게 되고, 발언자는 여론에 예속되어 파레시아의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여기서 문제는 발언자가 객관적 사실을 참조하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가 진실을 말할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의 여부입니다. 푸코는 말합니다. 고대 세계에서 “완전한 자유는 진실을 말할 능력과 동일한 것”(183쪽)이라고. 즉 (권력, 정념, 평판 등에 대한) 예속 상태에 있는 자, 스스로 명령하고 복종할 능력이 없는 자는 진실을 말할 능력도 지니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고대의 표현의 자유는 팩트가 아니라 마테시스mathesis, 즉 지식과 배움, 수련의 문제와 연관됩니다.

우리의 현실에 이 낯선 관점을 가지고 와 보면 생각해볼 만한 지점들이 생깁니다. 우리는 왜 수행과 시련 속에서 자기 진실을 구성하는 동시에 실현해가고 있는 발화의 주체가 아니라 제 3자에게 진실이 속한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팩트’라는 단어에는 바로 그러한 함의가 담뿍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든 이들이 제 나름의 이해관계에 따라 행위 한다고 믿으면서도 특정한 사건의 진실은 이해관계에 사로잡혀 있는 당사자들이 아닌,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운 제 3자에게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치인들이나 유명인들이 어떤 논란이나 의혹에 휩싸이면, 그에 대한 어떤 ‘오피셜한’ 사실이 밝혀지길 기다립니다. 그리고 그런 팩트를 손에 넣는 순간 그 사건으로부터 제기되는 모든 물음들과 문제들은 방기해버린 채 제 3자, 즉 ‘공정한’ 재판관으로서 잘잘못을 따지고 가해자나 죄인을 심판합니다. 그러나 (앞서 페이크 뉴스에 대해 이야기하며 말했듯) 그런 식으로 판결지어질 수 있는 ‘사실’이라는 게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요? 정리는 잘 안 되지만, 여기에는 무언가 도외시되고 있는 문제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진실을 소유할 역량이 있는가? 단지 안전한 심판자의 자리에 머물며 남을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진실로서 타인의 진실에 대면할 용기와 능력을 지니고 있는가? 이런 질문들이 남습니다. 이만 후기를 마치겠습니다.

다음 주에는 《담론과 진실》을 끝까지 읽어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지영샘과 현숙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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