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기너스

비기너스 시즌 4 열한 번째 시간(8.4)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0-07-22 23:23
조회
100
《담론과 진실》을 다 읽었습니다! 장장 10주 간의 푸코 공부가 끝났네요. 뭐랄까... 엄청나게 많은 영감을 주는 두 텍스트였던 것 같은데, 그 영감들을 충분히 흡수하고 소화하지 못한 것 같은 아쉬움도 조금 남습니다. 사실 이건 매번 푸코의 책을 읽을 때마다 드는 느낌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푸코는 정말로 우리에게 사유의 연장통을 마련해주는 것 같아요. 푸코는 뭐가 문제고, 무엇과 싸워야 하고,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고, 어디로 나아가야 한다는 식의 말들은 일절 하지 않죠. 그렇다고 해서 그가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서술을 하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의 사유가 특정한 이념이나 행동강령 같은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중립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근본적이기 때문입니다.

파레시아라는 개념에 대한 연구 역시 어떤 근본적인 물음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파레시아 개념을 통해 푸코가 보고자 하는 것은 주체와 진실이 맺는 관계의 고대적 형식이죠. 여기서 핵심은 ‘진실’과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가 진실 말하기의 실천에 앞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정치적 장에서 군주나 여론에 맞서 자신의 진실을 말하는 경우이건, 기존의 삶의 방식과 단절하는 아스케시스의 실천 속에서 진실에 접근해가는 경우이건 언제나 진실에 접근하는 ‘실천’이 먼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체의 변형을 가져오는 진실 말하기의 실천입니다. 진실은 그 안에서 구성됩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가 로고스와 비오스의 조화를 이야기할 때, 견유학파가 삶의 방식을 진실의 시금석으로 삼을 때, 그들은 단지 ‘언행일치’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진실과 주체의 비(非)근대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여기서 주체는 진실이라고 알고 있는 바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감으로써 자신의 진실을 구성합니다.

이것은 삶이 앎보다 가치 있다거나 실천이 인식보다 중요하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서 앎의 문제와 실천의 문제가 우리의 상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문제화된다는 점입니다. 나아가 주체와 진실의 관계를 중심으로 도덕, 정치, 비판, 양생 등 온갖 삶의 문제들이 다른 방식으로 구축된다는 점을 우리는 푸코의 텍스트를 통해 미약하게나마 확인할 수 있었죠.

저는 이 지점에서, 푸코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서 말했던 ‘예속된 앎들의 봉기’가 떠올랐습니다. 여기서 푸코는 지난 10~15년을 “산발적이고 불연속적인 공격이 지닌 실효성”(《“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20쪽)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으로 특징지어진 시기라고 규정합니다(75년도 강의에서 한 말입니다). 이 시기에 정신의학에 반해서, 감옥제도에 반하여, 그 외에 사람들의 품행을 인도하는 다양한 통치의 실천들에 반하여 국지적이고 자격을 박탈당한 앎들의 봉기가 이뤄졌다는 것입니다. 이 ‘예속된 앎들’은 어떤 보편성이나 공통의 지반, 총체성에 의거하지 않고 목소리를 상실한 자들의 개별적인 앎과 형식적 체계화 속에 파묻힌 역사적 내용들의 짝짓기 속에서 탄생합니다. 서민적인 앎(과학적 앎에 의해 자격박탈당한 환자의 앎, 광인의 앎, 의사의 앎 등)과 박식한 앎(방대한 역사적 지식 속에서 은폐된 역사적 내용들을 재활성화하는 앎)이 총괄적인 담론의 전제를 제거한 채 만날 때 예속적 앎들의 봉기가 이뤄집니다. 푸코는 이 ‘예속된 앎의 봉기’의 대표적인 예로 들뢰즈-가타리의 《안티-오이디푸스》를 들고 있습니다.

예속된 앎들의 봉기는 과학적 명증성을 참조하지 않는 국지적인 비판의 실효성을 지닙니다. 참된 담론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과 그 조건에 균열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을 함께 말함으로써 이런 방식으로 통치 받지 않을 수 있는 길을 모색할 수 있는 지적인 역량을 지니는 것이 문제입니다. 또 여기서 예속된 앎들의 봉기가 지니는 실효성이란 계급의 정의를 실현하거나 사회주의적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 또한 그 원인이자 결과로서 그것과 공모하고 있는 통치성에 균열을 내는 일입니다. 대항적인 삶의 방식을 마련함으로써.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고 나니, 《주체의 해석학》과 《담론과 진실》에서의 푸코의 문제의식이 10여 년 전의 그것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명증성, 보편성, 총체성의 차원을 참조하거나 재활성화하지 않는, 그 자체가 비판이자 대항적 품행의 실현인 지식이란 무엇일까? 이런 고민 속에서 푸코는 고대 그리스-로마를 연구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아마도) 푸코가 발견한 힌트는 실존의 미학으로서의 아스케시스가 아닐까 합니다. 상식과, 기존의 권력과, 자기 자신의 익숙한 삶의 방식과의 단절을 내포하는 자기 수양. 그리고 그와 더불어 실현되고 구성되는 자기 진실. 주체의 변형을 촉발하는 진실, 진실을 구현하는 주체의 자기 변형. 푸코는 파레시아스트로서의 철학자의 삶의 방식에서 어떤 근본적이 비판의 형식을 발견했던 것 같습니다.

푸코는 예속된 앎들의 봉기의 예로 《안티-오이디푸스》를 들고 있지만, 저는 일리치와 그의 저작들 또한 훌륭한 예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일리치야말로 현대의 파레시아스트였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무튼, 그런 관점에서 이제 일리치와 푸코의 문제의식이 어떻게 공명할지, 또 그것이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어떤 질문을 던지도록 하게 될지 궁금해지네요~

다음 주는 방학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주(8/4)에는 채운샘의 인트로 강의가 있을 예정입니다. 읽을 텍스트는 일리치의 《ABC 민중의 마음이 문자가 되다》입니다. 읽을 분량은 카톡으로 공지드리겠습니다. 간식은 경혜샘과 혜원누나가 맡아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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