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기너스

비기너스 시즌4 열여덟 번째 시간(09.22)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0-09-18 02:07
조회
150
“지금도 수도꼭지를 틀면 나오는 소위 음용수라는 이름의 그 물, 아이들에게 ‘냉장고 안 생수병 물을 마셔라,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그건 마시지 말고’라고 말하는 그 물을 받아서 아이에게 세례를 베풀 때 나는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현실이다. 바로 그게 오늘날 그 질료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나는 세례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게 아니다. 그저 오늘날을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는지, 얼마나 끔찍한지 한번 보라는 말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고 나면 순간의 열정과 아름다움을 소중히 여기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이반 일리치·데이비드 케일리, 《이반 일리치와 나눈 대화》, 물레, 274쪽)

댈러스 타운레이크 건설을 기념하는 강연을 부탁받았을 때, 아마도 일리치는 ‘자존심이 상했던’ 것 같습니다. 댈러스에서는 이전 70년 간 호수를 만들 것인지를 두고 논쟁이 이어져왔다고 하죠. 그 논쟁은 인공 호수가 가져다줄 경제적 이익의 문제라거나 사회적 가치 등에 관한 것들이었던 모양입니다. 여기서 일리치는 뜬금없게도 도대체 지금 우리에게 물이란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집니다. 도대체 우리 문화에서, 산업화된 사회에서 물이란 무슨 의미인지 우리는 그것과 어떻게 관계하고 있는지. 그러니까 일리치는 도시계획가도 환경전문가도 사회운동가도 아닌 비판적 역사학자의 관점에서 물에 대해 논합니다. 물이 단지 H2O라는 화학물질이 되어버렸고, 우리가 배관을 타고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는 일종의 생활필수품으로서의 물을 사용하고 소비할 뿐 그에 대해 더 이상 사유하려하지 않으며, 호수를 단지 도시의 미관이나 경제적 가치를 높여줄 한 요소로 생각한다는 것에 대해 애석해하고 자존심상해하는, 환경과 공간과 거주와 질료에 대해서 너무나도 이질적인 시선과 감각을 지닌 반시대적인 사상가로서 물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아마 강연을 부탁한 사람들로서는 벙찌는 일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책을 읽고 토론을 하면서, 저도 ‘자존심 상한다’라는 일리치의 감각을 조금은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새삼 우리가 우리 자신의 똥오줌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 자존심 상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위생’에 대한 근대적 신념을 신성시하며 너나할 것 없이 매일같이 몸을 씻어 체취를 제거하고 자신의 배설물은 위험한 오염물질이라도 되는 듯 얼른 물을 내려 눈앞에서 제거해버립니다. 물론 똥을 방치해야 한다거나 일부러 더러워질 필요가 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말하려는 것은 우리가 전문가들과 제도들, 거대한 처리장치 없이는 자기 똥 치우는 것조차도 스스로 해내지 못할 정도로 의존적인 존재들이라는 것에 새삼 자존심이 상한다는 것입니다. 토론 중에 민호가 말했듯 대단한 재앙을 생각할 것도 없이, 갑자기 며칠 동안 수도와 하수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우리 나약한 도시인들은 곧바로 지옥을 맛보게 되지 않을까요?

똥에 대해 이렇게 길게 이야기한 것은 이게 일리치가 이야기 하는 물과 질료, 그리고 공간에 관한 문제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일리치는 우리가 물을 어떤 문화적 상징성도 없는 죽은 물질로 바라보게 되었다는 것을 문제 삼는데, 이는 다시 말하면 우리가 더 이상 우리 자신의 흔적을 새기고 공간과 깊이 관련을 맺으며 정주하는 것이 아니라 계획되고 관리되는 환경 및 도시 그리고 상품으로서의 주거공간에 수납되는 입주민이 되어버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더욱 근본적인 차원에서 이것은 우리의 감각이 매우 편협한 방식으로 인도되고 있음을 뜻합니다. 일리치에 따르면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러 처음으로 도시는 끊임없이 청소해야 하는 공간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새로운 위생관념과 공간에 대한 감각과 더불어 사람들은 먼저 죽은 이들과 함께 있기를 거부했습니다. 살아 있는 신체와 시신의 엄격한 격리를 요청하게 된 것이죠. 그러고 나서는 배설물이 문제가 되고, 사람 몸에서 나는 온갖 체취들이 문제가 됩니다(그런데 이것은 분명 ‘자연스러운’ 감각이 아닙니다. 일리치에 따르면 “1760년까지만 해도 파리의 공동묘지는 오후에는 파티 장소로, 밤에는 혼외정사를 위한 장소로 이용되다가, 1780년에 와서는 시신이 부패하면서 내뿜는 냄새를 견디지 못한 인근 주민들의 요청에 따라 폐쇄되었다”고 합니다. 하층 계급들이 위생 전문가들의 담론에 따라 똥 냄새에 역겨움을 느끼도록 학습하는 데는 2세기 정도가 걸렸다고 하고요). 이제 살아 있는 이들과 죽은 이들이 뿜어내는 냄새와 흔적, 그들의 아우라는 제거되어야 할 부정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냄새 없는 도시가 이상적인 도시의 이미지가 되었으며, 요구사항이 많아진 주민들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도시계획 전문가들은 사람들의 거주 활동에 일일이 개입하게 됩니다.

죽음과 배설물과 냄새의 추방. 토론 중 난희샘이 말씀하신대로 이것은 생에 대한 부정을 함축하는 관념론적 태도의 표현인 것 같습니다. 삶에 속하는 이 모든 것들과 공존하는 지혜를 모두 버리고 기술과 전문가들에 의존해 그 울퉁불퉁한 것들을 은폐하고 생의 쾌적한 측면만을 움켜쥐는 방향으로 걸어왔습니다. 그 결과는 우리 자신의 무력화입니다. 우리가 사는 곳은 거주가 이루어지는 장소가 아니라 예쁜 차고 같은 것이 되었고, 거기에서는 아이가 태어날 수도 없고 고귀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없습니다. 죽음과 고통과 질병에 대해서도 우리는 같은 방식을 취해왔죠. 어쩌면 앎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우리에게 읽고 쓴다는 것, 배운다는 것은 지난한 수행의 과정과는 무관합니다. 우리는 배움의 과정으로부터도 모든 울퉁불퉁한 장해물들을 제거했습니다. 우리는 앎을 정보로 취급하죠. 편안하게 검색 몇 번으로 깔끔하게 정리된 정보들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더 없이 유능해진 것이죠. 그러나 우리의 유능함은 그 자체로 우리의 무능함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울퉁불퉁한 삶을 긍정하면서 해쳐나갈 수 있는 지혜로 전환되지 않습니다.

‘자존심 상한다’는 일리치의 말이 계속 남습니다. 이것은 연민도 냉소도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이런 방식으로 규정되지 않을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자 하는 사람이 가질 법한 감각이 아닐까 싶네요.

다음주에는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를 371쪽까지 읽고, 그간의 공부를 갈무리하며 에세이 개요를 작성해오시면 됩니다. 불가피한 사정이 있으시지 않은 한 필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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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9-18 11:41
    이반 일리치의 이야기와 살짝 삐끗하기는 하기는 했지만, 이번에 나누었던 이야기 중에서 "물"이 계속 머리에서 떠오릅니다. 태어난 이래로 수도꼭지에서만 흘러나오는 물(간혹 약수터에서 받은 물이 있지만)만을 섭취해온 인간으로서, 수도꼭지에서 물이 안나오면 어디로 가야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산으로 가야 하나, 큰 공포로 다가왔습니다. 아 정말 무력하구나, 내 환경에 있어서 나는 정말 무력한 인간이구나. 또 다시 경험했습니다. 수도꼭지에서 물이 안나오면 어디로 가야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