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기너스

비기너스 시즌4 열 일곱 번 째 시간(09.15)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0-09-12 16:16
조회
122
우리는 능력들을 실체화하고 각각으로 분리하는 사고방식에 익숙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읽고 쓰는 능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죠. 독해력, 문장력, 어휘력, 주제를 다루는 능력, 문제의식을 구성하는 능력 등등. 사실 따지고 보면 읽고 쓰는 능력은 사유의 힘에 달려 있습니다. 구체적인 삶의 조건에 대해 질문하는 절실함 혹은 예민함과 무관한 추상적인 능력이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능력을 실체화하여 어떠어떠한 능력이 우리에게 부족하다는 식으로 결여를 도입합니다. 자신의 주변 세계에 관심을 기울이고 낯선 만남들을 자신의 정신으로 번역하는, 우리 모두에게 내재해 있는 지성을 계속해서 발휘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특정한 능력이 결여되어 있거나 부족한 일종의 문맹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죠. 읽기와 쓰기를 추상적 능력으로, 소유할 수 있는 기술 같은 것으로 환원하는 순간 우리는 사람들 사이에, 그리고 우리 자신 안에 위계와 결여를 도입하게 됩니다.

지난 시간에는 채운샘의 강의가 있었습니다. 다들 돌아가면서 나름대로 고민한 질문들을 던졌는데 근본적으로 저희의 질문에는 자신이 놓인 구체적 조건에 대한 고민이 결여되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대개 질문들이 어떻게 다른 품행을 구성할 수 있을까? 어떻게 자기 언어를 가질까? 일리치는 정보화 사회에서의 읽기에 대해 무엇이 문제라고 말하는 걸까? 같이 벙벙하게 제기되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일리치가 말하는 읽기의 방식과 가장 동떨어진 태도로 일리치를 읽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텍스트를 씹고 맛보고 그것을 통해 자기 무의식을 바꾸기. 그러한 수행으로서의 읽기와 쓰기. 이 지점을 놓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혹은 그저 말로만 반복하고 실제로 읽고 쓰는 경험을 변환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겠죠. 어쨌든 이제 알게 되었으니 괜찮습니다!

불교의 공부법은 문(聞) 사(思) 수(修)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문은 말 그대로 듣는 것입니다. 귀를 기울이는 것. 사유와 수행을 위한 재료를 모으는 것이 1단계인 문(聞)입니다. 저는 이것이 시각이 아니라 청각의 은유로 제시되고 있다는 것이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택적으로 무언가를 모델로 삼거나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생각되는 것들만을 수집하는 것이 아니라, 들려오는 것들 우리가 겪는 것들에 귀를 기울이고 그 모든 것을 재료로 삼으라는 말처럼 들려서요. 아무튼 다음 단계는 사유의 힘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밭(田)과 마음(心)이 합쳐져 있는 사(思)가 뜻하는 것은 자기 마음을 경작하는 것입니다. 자기 세계 안에 사로잡혀서 이리저리 짱구를 굴리는 것이 아니라, 들어서 모은 재료들을 숙고하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의 방식들을 뒤집어엎는 것이 사유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행(修)을 한다는 것은 이 과정들을 놓지 않고 계속 이어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정신의 에너지 장이 습득한 것들을 중심으로 작동하게 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 모두를 우리는 힘들게 배웠습니다. 단어 하나를 발음하기 위해 수도 없이 옹알이를 했고, 이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기 위해 수많은 좌절과 어려움을 맛보며 시도를 거듭했습니다. 그러니 사실 단순한 정보처리 이상의, 스스로의 삶을 바꾸려는 시도라는 의미에서의 공부는 필연적으로 오랜 시간 주의를 기울이고 자기 변환을 시도하는 계속적인 과정을 수반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새삼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어떻게 해야 자기 언어를 가질 수 있는가 라거나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낸다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식의 무책임한 질문들이 공허하게 느껴집니다. 채운샘이 가장 힘주어 강조하신 것은 우선 자기 자신의 읽고 쓰는 습관을 잘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내가 듣고 배운 것을 내 것으로 소화하기 위한 훈련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 나에게 앎이란 무엇인가? 나에게 앎은 왜 필요한가? 구체적으로, 나는 언제 얼마나 오래 어떻게 생각을 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 때에만 일리치의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대한 비판과도, 구술문화나 수사식 읽기에 대한 그의 연구와도 연결될 수 있는 지점이 생길 것입니다.

이제 에세이 발표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번 에세이 주제는 자신의 읽기와 쓰기를 성찰하는 것입니다. 지금 자신은 무엇을 통해 어떤 식으로 앎을 구성하고 있는지, 앎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해왔으며 그런 생각은 푸코와 일리치의 텍스트와 만나며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읽고 쓰는 것을 어떻게 실험할 것인지. 이런 질문들을 소화하는 에세이를 쓰시면 됩니다. 다음 주에는 《H2O와 망각의 강》을 읽고 공통과제를 써 오시면 됩니다. 이번 시즌 주제와 다소 동떨어진 내용일 수도 있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그동안 읽은 텍스트들을 새로운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화요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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