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앓이

19. 이 사람이 사는 법

작성자
수영
작성일
2016-03-25 10:53
조회
619
19. 이 사람이 사는 법

증자는 공자의 제자다. 이름은 삼(參)이고 자는 자여(子輿). 공자의 도통(道通)을 잇는 이로 거론되는 사람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증자가 공자보다 40살 이상 어리다는 것이다. 공자가 73세에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 정말 말년에 만난 꼬마 제자가 아닌가. 공자 문하에 머리 큰 똑똑이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나보다,하면서 한 번 감동. 40살 이상 차이나는 사제지간의 정을 상상하며 혼자 또 감동. 하지만 도올 샘에 따르면 증자는 공자에게 그다지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을 것이라 한다. 이 말에 대한 반박을 기대하며 채운샘에게 물었더니, “공자 눈에 안회 빼고 누가 들어왔을까”하신다. 기대했던 드라마를 더 진행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게다가 내 마음 속 꼬꼬마 제자가 혹 스승에게 사랑도 못받고 자랐나 싶어 괜히 속상해진다. 하지만 이런저런 상상을 계속하기에는 증자에 대해서도 공자에 대해서도 아직 모르는 게 많다. 어쨌든 증자는 효도 왕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성향 때문이었는지 공자의 3년상을 치룬 것은 증자 뿐이었다고 한다. 아래는 증자에 관해 논어에 나오는 첫 구절이다.

  曾子曰 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 - 論語 學而 4장

  증자가 말하였다. 나는 매일 세 가지로 나 자신을 살핀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일을 도모함에 최선을 다하지 아니하였는가. 친구와 교제함에 신의가 있지 아니하였는가. 스승에게 가르침을 전수받고 익히지 아니하였는가.

증자는 날마다 세 가지로 자기를 살폈다. 첫째, 일을 도모함에 마음을 다하지 않음은 없는가. 둘째, 친구와 교제함에 최선을 다하지 않음은 없었는가. 셋째,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고 익히지 않음은 없었는가. 이 세 가지 중 어느 것 하나 내 모습 같지 않은지 일단 침묵하게 된다.

첫 번째 질문부터 보자. 다른 사람의 일을 도모할 때 증자는 자기의 충(忠)을 살폈다. 다른 사람의 일이란 여러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겠다. 내게 직접적으로 이익이 돌아오지 않는 일, 그동안 내게는 상관없다고 여겨졌던 일 등. 이 일에 대해 거론되는 충(忠)이란 우리가 보통 ‘충성’을 말할 때와는 의미가 다르다. 타인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다. 충(忠)은 자기 성실성을 묻는 단어. 증자는 설령 다른 사람을 위해 무엇인가 할 때조차 자기 마음을 다하고자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질문에서 중요한 것은 신(信)이다. 약속을 잘 지키고, 뱉은 말을 실천하는 것 모두 신(信). 하지만 신(信) 역시 일종의 성실성이다. 충(忠)과 다른 점은 타인과의 관계성이 강조된다는 것. 친구 간의 사귐도 증자에게는 자신의 성실함을 살피는 장이 된다.

주자는 충(忠)과 신(信)이 전습(傳習)의 근본(本)이라고 보았다. 일종의 성실함이 무언가를 배우고 익히는 일의 기본이 된다고 생각한 것. 그런데 이 성실함이란 어떤 것일까. 충(忠)과 신(信)을 말할 때 모두 성실함을 가지고 풀이를 한다. 이 성실함을 단순히 ‘최선을 다한다’고 이해하고 지나가기에는 아쉽다.

유학에서 말하는 성실함에는 쉬지 않고 계속 한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자강불식自强不息’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그치지 않음은 그로 인해 기계적 성과를 얻기 위한 것은 아니다. 유학에서 말하는 인간은 본성이 선하다(善). 단순히 착하다는 말은 아니다. 텅비고 환하여 모든 것을 사실 그대로 비출 수 있는 능력. 이것이 인간 본래의 선한 본성이다. 보통 밝음(明)으로 표현된다. 그런데 이 마음이 제대로 사용되지 못한다. 사람마다 다르게 갖고 태어난 기질적 특성 때문에, 또 사욕(私欲) 때문에 사람은 본성에 어긋나는 행위들을 하며 살아간다. 물에 빠진 아이에게 손 내밀지 않을 수 없는 마음을 잃은 채로 살아가게 된다고 할까. 군자의 성실함은 사욕에 치우친 채 살아가는 일을 그치는 것. 본성에 마땅하게 살아가는 것을 계속함을 말한다고 할 수 있겠다.

다시 증자를 보자. 증자는 충(忠)과 신(信)을 살폈다. 이기심에 따라 행동하기 쉬운 자리 곧 남의 일을 도모하는 일에서 충(忠)을 물었다. 자기 멋대로 일을 끌고나가기 쉬운 자리 곧 친구와의 교제 속에서 신(信)을 살폈다. 그리고 전습(傳習). 충(忠)과 신(信)을 물었던 맥락과 마찬가지로 그는 배우고 익히는 일에서 자기 자신 가장 위태로울 수 있다고 본 것 같다.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기만 하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삼기 위해 부단히 힘쓰지 않는다면 그것은 얕은 만족이나 꾀하는 공부라고 본 것은 아니었을지.

지난 삼경스쿨 수업에서 15살에서 70까지로 공자의 배움의 과정을 말해주는 구절을 읽었었다.(유명한 바로 그 구절이다.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하나하나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어쨌든 공자는 점차로 의식하지 않아도 천지자연의 이치에 어긋남이 없이 살아갈 수 있게 된다.  70살에 이르러 마음이 바라는 바를 따라도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할 때는 괜히 시원하다.  증자는 나름대로의 방식대로 스승의 길을 가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세 가지나 살펴야 하니 다소 갑갑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세 가지 뿐이라 누군가는 증자에게 지키는 것이 간략하게 정해져 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내게는 쉬울 것 같지 않으니 일단 어렵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몇 가지 메뉴얼을 제대로 사는 길을 가겠다는 마음이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의식하지 않아도 절로 본성에 따라 살아지는 그 날까지 말이다. 이상 증자와의 첫 만남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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