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티(불교&티베트)

<불티모아> 4월 1일 6주차 수업후기

작성자
고은미
작성일
2021-04-02 23:34
조회
157
#1교시 - 명상

방석을 깔고 둥글게 모여 명상을 하는 것으로 세미나가 시작되었습니다. 지난주에 이어서 소리 명상을 해보았습니다. 바르게 앉아 눈을 감고 소리를 듣고 있는 걸 알아차리려고 하니 새들이 우는 소리, 서재에서 웅성거리는 소리, 시계가 딸깍 거리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그러다가 깜박 잠에 빠지듯이 생각에 빠져버렸습니다. 직장에서 억울했던 일을 생각하다보니 ‘아차! 내가 소리 명상 중이였지’ 번쩍 정신이 들었습니다. 다시 소리를 듣고 있는 자신을 알아차리려고 하니 명상이 끝났다는 종 소리가 들렸습니다. 소리명상, 자유 명상을 몇 번 반복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차분하고 고요해졌습니다. 저는 매일 저녁에 10분의 명상을 하고 있습니다. 종종 생각에 빠지지만 명상을 할수록 마음에 윤기가 돕니다.

 

#2교시 - 친우서 낭송과 입발제

친우서의 게송 53부터 64까지 입발제를 했습니다. 저는 죽음을 사유하라는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죽는 때가 정해져 있지 않고 죽음의 인연은 늘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닥쳐오니 늘 내일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무상을 수행해야 한다고 합니다. 또 죽고 나면 썩고 흩어져버릴 육신을 생각한다면 몸에 대한 집착도 덜어낼 수 있겠죠. 죽음을 생각한다면 오늘 제가 감정을 소모하면 집착하던 것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살아있는 하루 더 열심히 수행하고 공부해야겠습니다.

 

#3교시 - 중론 발제읽기와 채운 강의

중론의 귀경계에서 대해 이해한 부분을 한 장으로 정리해서 써오기로 했습니다. 도반님들께서 정성스럽게 써온 발제문을 읽으니 난해한 중론의 귀경계가 조금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채운샘의 강의가 이어졌습니다. 강의 내용 일부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1. 중론의 핵심은 연기이다

중론을 읽을 때 계속 관통하는 건 연기이다. 연기하기에 공(空)하다, 연기하기에 자성(自性)이 없다, 이게 다 같은 말이다. 연기, 공, 무자성은 같은 의미이다. 귀경계를 보면 팔불(八不)이 나오고 나서 인(因) 연(戀)(인연 즉 연기), 희론의 적멸, 연기를 설법하셨다고 나온다. 중론의 맨 마지막 게송을 보면 중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있다. 29품의 30게송은 ‘그분은 (크나큰) 자비심을 갖추셨기에 모든 견해를 제거하기 위하여 바로 그 정법을 가르쳐주신 분, 그 가우따마[부처님]에게 (저는) 경배하옵니다.’이다. 여기서 정법은 연기를 의미한다. 중론을 읽으며 바른 법인 연기를 이해해야 한다.

 

2. 귀류 논증법으로 연기를 논증한 이유

찬드라키르티는 귀류논증파이고 바비베카가 자립논증파이다. 이 둘은 부처님이 설하신 연기, 공성(空性)을 논증하는 방법에 차이가 있다. 나가르주나, 아리야데바, 초기 주석자들에게는 공성 논술 방법이 쟁점이 아니었다. 6~7세기에 논리학인 발달하면서 공성을 논증하는 게 쟁점이 되었다. 바비베카의 붓다팔리타에 대한 비판이 공성 논증을 쟁점화했다. 공을 논증하는 건 쉽지 않다. 공을 논증하기 위해 하는 말마저 공하다는 논리적 모순을 담는 말이 될 수 있다. 공성을 주장하는 것으로 공성을 논증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다른 논증의 형식이 필요하다.

자립논증파인 비바베카는 붓다팔리타를 비판했다. 귀류논증파인 찬드라키르티는 붓다팔리타를 옹호하면서 다시 비판했다. 바비베카는 붓다 팔리타의 주석에 대해서 1) 귀류 논증에 가까웠던 붓다팔리타가 추론식의 체재가 없다, 2) 대론자가 지적하는 오류를 배제하지 않았으며, 3) 결함이 있는 문장이기 때문에 의미가 반전되어 중관론자에게 불합리한 결과가 돌아온다, 이 세 가지 문제점을 지적했다. 전형적인 논리학자인 바비베카가 보기에는 붓다팔리타의 주석을 다는 방식이 이상하다 느꼈고, 제대로 된 추론 방식을 갖추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반면 찬드라키르티는 추론식의 제시가 단순한 효과일 뿐이지 추론 자체가 주장하는 명제를 제시하면 안 된다고 했다. 주장 명제를 제시하는 순간 그것은 자성이 있다는 모순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 딜레마를 빠져나오기 위해서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 방식이여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나가르주나는 모든 것이 공하다고 하는데 나가르주나의 말도 공한 게 아닌가하는 비판이 많았다. 그 당시의 실재론자였던 설일체유부는 ‘나는 공하지만 법은 있다’라는 아공법유(我空法有)를 주장했다. 법은 실체, 자성을 뜻한다. 그들은 근원적으로 불변하는 본질, 4대 지수화풍을 만들어내는 근원적인 무언가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걸 깨기 위해 나가르주나는 공을 주장한 거다. 유(有)를 버리지 못하는 자들, 자성(自性)을 버리지 못하는 자들은 나가르주나의 공을 허무, 단멸처럼 이해했다. 귀류논증파는 그것에 맞서서 나가르주나의 공사상이 부정되지 않기 위해 귀류법은 잘못된 것을 깨뜨려서 바른 것이 드러내는 파사현정(破邪顯正) 논증 방식을 취했다. 주장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자성을 전제하는 모든 논리를 격파함으로써 어떤 것도 그 자체로 자성을 가지지 않는다는 걸 드러내는 방식으로 공을 논증했다. 이 때 추론은 진리를 드러내는 효과로 작동했다.

찬드라키르티는 붓다팔리타를 다음과 같이 변호했다. 1) 추론식의 제시는 어디까지나 현실적인 효과인데 바비베카가 현실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없는 경우에도 추론식의 사용을 고집한다는 부분을 지적했다. 2) 명확한 주장을 전개하는 건 대론자의 비판을 초래한다고 반론하고 주장을 정립하지 않은 프라상가 논법에 충실한 붓다팔리타의 방법을 높이 평가했다. 자성이 전제할 수밖에 없는 모든 논증을 격파하여 연기와 공이 드러나게 하는 논법이었기 때문이다. 3) 바비베카가 제시하는 추론식의 주장 명제에서 발견되는 부정 판단을 스스로 ‘비정립적 부정(a가 아니다= not a이다)’이라고 규정하는 건 성립하지 않는다. 중론자는 자신의 주장을 정립하지 않으므로, 붓다팔리타에게 의미가 반전되어 오는 결과는 없으며, 그와 같은 결과는 대론자에게 부수되는 것이라고 반론한다. 모순을 격파할 뿐이므로 자기 모순에 빠지는 걸 피할 수 있다. 찬드라키르티는 어떤 주장도 정립하지 않는 게 나가르주나의 논증방식이라고 했다.

 

3. 자성을 가지고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연기

예를 들어 ‘비가 온다’는 걸 살펴보자. 자성(自性)을 가진다는 건 스스로에 의해 스스로 존재하고 스스로 작용한다는 뜻이다. 어떤 것에 의존하지도 않고 그 스스로 존재&작용해야 한다. 그렇다면 ‘비’ 속에 ‘옴’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오는 비’가 ‘온다’는 말은 오류이다. 자성을 가진다는 건 주체와 대상이 나뉘지 않아야 한다는 거다. 그렇다면 ‘비’ 속에 ‘옴’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비가 온다’는 건 ‘비’와 ‘오는’ 속성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이미 그 말 자체에 모순이 함축되어 있다. 붓다팔리타나 찬드라키르티가 보기에 나가르주나는 그냥 부정을 하는 거다. 주장으로 출발하지 않아 파사현정(破邪顯正)을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공하다’는 명제 자체를 부정하는 화살이 되지 않기 위해 취한 논증 방식이다. 찬드라키르티는 모든 게 공하기 때문에 내 말도 작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찬드라키르티는 붓다팔리타에 대한 변호를 통해 재평가된 프라상가 논법을 ‘프라상가 아팟티’라고 불렀다. 이걸 용어로 번역하면 ‘귀류논증에 의한 의미 발생’이다. 즉 파사현정(破邪顯正)을 의미한다. 어떤 주장 명제 속에 들어있는 전제와 자성을 깨뜨림으로서 의미가 발생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이것이 진짜 공성을 논증하기 위한 최선이다. 나가르주나는 ‘모든 것이 연기다’라고 출발하지 않는다. 생(生)을 부정하고, 멸(滅)을 부정하고, 하나를 부정하고, 다르다는 걸 부정하는 등의 팔불(八不)을 설명한다. 이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즉 자성이 없다는 걸 논증한다. 자성을 가진 건 생하지도 멸하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나가르주나가 비판하고자 하는 건 유(有), 자성이다. 모든 사물은 다른 사물을 인연해서 존재한다는 게 공이며 무자성이다. 어떤 것이 존재하는 데 다른 것에 연해서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논증한다. 연기하기 때문에 공하다. 연기에서 나타나는 게 공이다. 모든 것은 연기해서 나타나므로 무자성이다.

설일체유부는 원인과 상관없이 결정되어 있는 게 자성인 담마가 있다고 했다. 서양 철학에서는 실체이다. 자성은 모든 것이 발생하는 근원, 자생적인 것, 실체적인 것이라고 이해해도 된다. 서양철학에서는 불변/불멸하는 건 신이다. 신은 모든 것을 낳는데 피조물은 필멸한다. 불멸하는 게 필멸하는 낳는다는 건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신이 피조물보다 위대하다고 우겨서 그렇지 논리적으로는 모순이다. 자기가 자기 안에 없는 걸 낳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자성도 이런 방식으로 논증된다.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다른 것에 의해서 다른 것을 낳을 수는 없다. 찬드라키르티의 논증에서 이걸 어떻게 깨느냐는 경험적으로 알 수 있다. 생하지도 멸하지도 오는 것도 가는 것도 없다는 중론의 논리를 경험적으로 알 수 있다. 자기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다른 것을 낳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경험적인 세계와 논증하려는 연기의 세계가 배치되지 않는다. 부처님이 말하는 진리의 세계가 우리의 경험적 세계에서는 알 수 없는 어딘가에 따로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진리를 우리의 경험과 모순되지 않는 방식으로 이야기한다. 그래서 불교는 신비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그 자체로 영원하고 결정되어 있는 게 있다는 자성이 우리의 경험과 위배된다. 모든 사물의 상호의존적으로 연기한다는 게 공사상의 핵심이다. 그 자체로 자성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 없다는 걸 깨는 방식으로 연기를 논증할 수 있다.

팔불(八不)도 이걸 논증한다. 자성을 전제할 경우 발생이 성립되지 않는다. 자성을 가지고 있는 차원을 버리지 않으면 생도 없고 멸도 없다. 현상세계에서 씨앗를 심으면 싹이 난다. 고정불변하는 세계에서는 이걸 증명할 수 없다. 싹에서 싹이 나오거나, 씨앗에서 씨앗이 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씨앗이 원인이고 싹이 결과라고 말한다. 하지만 씨앗이 자성을 가지고 있는 원인이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원인일 뿐이라면, 아무것도 발생하지 말아야 한다. 결과는 그 자체로 결과일 뿐이라면 이 변화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경험적으로 변화하는 현상 세계를 관찰할 수 있다. 나가르주나의 논쟁은 현상세계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현상세계가 연기에 입각해서만 설명될 수 있음을 입증한다.
전체 3

  • 2021-04-03 16:22
    지난 주 중론의 첫 발제를 준비하다 샘들께서 다들 심각한 멘탈 붕괴를 경험하셨었는데, 채세음보살님의 자비로 중론의 인트로를 차근차근 짚어갈 수 있었죠. 중론 두 번째 강의를 듣고 나서 은미샘의 후기를 보니 이제 바바비베카와 붓다빨리타가 논쟁의 구도에서 어떻게 대립이 되고, 중론의 해석에 귀류 논증이 왜 필요했는지, 그리고 중론의 핵심이 연기에 있음을 분명히 알게되네요. ㅎㅎ 이번 발제 준비는 2주 전과는 달리 뭔가 맥을 짚어가며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은미샘이 깔끔하게 정리해주신 후기가 많은 도움이 됩니다. 감사해요, 은미샘! ^^

  • 2021-04-03 19:37
    훌륭하신 스승에게 부처님과 용수보살의 가르침을 배운다는 것이, 그리고 이런 시절인연에 함께하는 도반님들이 있다는 것이 새삼 기쁘네요. ^^

    죽음의 인연은 늘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닥쳐오니, 늘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무상을 수행해야 한다는 <친우서>의 내용이 마음에 남습니다. 그리고 모든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없어 다른 사물들과 연해서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공의 진리도 마음에 남습니다. 수업후기를 읽으면서 이 두 가지를 깊~~~게 이해하고 또 품고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은미샘 수업후기 잘 읽었어요.

  • 2021-04-05 16:50
    '"씨앗이 자성을 가지고 있는 원인이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원인일 뿐이라면, 아무것도 발생하지 말아야 한다. 결과는 그 자체로 결과일 뿐이라면 이 변화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씨앗과 싹의 비유가 원인과 결과를 설명하는데 자주 등장하지만, '자성'의 의미를 배제하고 해석하므로 매번 걸려넘어졌지요. 현상의 세계는 연기에 의해 설명된다고 인지하다가도 말에 걸려넘어집니다. 은미샘의 깔끔한 후기 덕분에 지난 강의를 상기할 수 있어서 땡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