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티(불교&티베트)

<불티모아> 3월 25일 5주차 수업 후기

작성자
은주
작성일
2021-04-06 16:44
조회
146
후기가 마이마이 늦었습니다.ㅠㅠ 죄송합니다!!

# 명상 시간

명상 시간에는 시각 명상에 이어 청각 명상을 했습니다. 저는 청각 명상을 하며, 평소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다양한 소리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익숙한 새소리, 문 닫는 소리 등이 먼저 들리고, 다음으로 웅웅하는 낮은 기계음 같은 소리들이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또한 웅웅하는 소리도 다양한 소리가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안 들리는 소리는 있는 것일까요 없는 것일까요? 안 들렸다 들리는 소리는 또 있는 것일까요? 없는 것일까요? ㅎㅎ 참, 명상 중에 진동음이 크게 나서, 저는 제 휴대폰이 켜진 줄 알고 깜짝 놀라서, 눈을 번쩍 떴습니다. 그런데 제 폰에서 난 소리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다른 샘들의 명상하는 모습을 의도치 않게 보게 되었는데, 청각 명상을 정말 제대로 하고 계셨습니다. 저도 잠시, 폰의 진동음에 대한 청각 명상(?)을 했어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채운샘 중론 워밍업 강의

[불티모아] 세미나는 첫 4주간은 채운샘께서 인도 사상사와 붓다의 탄생과 불교에 대한 강의를 하시고, 이후에는 저희가 직접 [중론]을 시작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중론 첫 장을 펼치고 그냥 혼이 달아나서 그야말로 망연자실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윤지샘께서 수업 당일에 구원의 카톡을 보내셨습니다. 채운샘께서 중론에 대한 워밍업 강의를 해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희는 모두 입을 모아 채운샘을 수희찬탄했습니다. (나중에 저는 들어도 이해가 안 돼서 좌절 모드가 되긴 했지만요)

삼사도

먼저, 채운샘은 불교의 수행 방법 중 하나인 삼사도(三士道)를 말씀하시며 수업을 시작하셨습니다. 먼저, 하사(下士)는 우리와 같은 범부를 말합니다. 하사는 윤회의 세계에서 잘 살다가 죽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집착하고 탐욕하는 마음을 거두기가 어렵습니다. 하사의 경우, 적절한 수행은 念死, 즉 죽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사가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떠올린다면, 영원히 살 것처럼 집착하고 탐하는 마음을 거둘 수 있습니다. 이러한 수행이 깊어지면, 불법승에 귀하는 삼귀의를 하게 되며, 하사에서 중사(中士)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중사는 집착하고 탐욕하는 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윤회를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을 냅니다. 사실, 인간계와 천상계에서 태어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어려운 일을 한 후에도 윤회를 벗어나겠다는 마음을 못 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중사는 이제 출리심을 갖고 윤회에서 벗어나 해탈과 열반의 길을 추구합니다. 중사는 사성제 수행을 통해, 일체 번뇌를 끊어내고 깨달음을 향해 나아갑니다. 하지만 개인의 열반을 목표로 하는 중사는 여전히 소승불교에 머물고 있습니다. 중사가 나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이 윤회에서 벗어나기를 소원한다면 이것은 상사(上士)의 단계입니다. 상사는 발보리심을 내어 모든 중생의 깨달음을 기원합니다. 상사에게 최고의 수행은 공을 체화하는 것입니다. 지관수행은 공성을 체화하는 최적의 수행으로, 공에 대한 체화를 통해 상사는 인무아(人無我), 법무아(法無我)를 체득하게 됩니다. 채운샘께서는 중론을 읽는다고 저절로 깨닫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중론의 논리를 이해하는 것이 머리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수행과 함께 가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중론: 존재와 무에 대한 극단적 입장을 배격

중론은 유, 무에 대한 극단적 입장을 경계합니다. 먼저, 서양철학사에서 유와 무에 대한 논쟁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파르메니데스는 세계는 애초부터 변화가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에게 세계는 그대로 ‘존재’합니다. 존재란 계속해서 같은 방식으로 있는 것으로, 있는 게 변하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a가 a'가 되면 a가 아닙니다. 그는 어떤 게 변했는데 그게 있는 거야? 라고 반문하며, 변화를 부정합니다. 그럼, 자연의 변화 등 우리 눈에 펼쳐지는 변화는 어떻게 설명할까요? 파르메니데스는 우리가 변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언어의 문제이고, 논리적이지 않은 사고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감각이 우리를 속인다고 말합니다. 반면에 헤라클레이토스는 변화와 생성과 소멸을 세계의 원리로 보았습니다. 그에게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소멸합니다. 그의 유명한 어구인 “같은 강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는 찰나생 찰나멸하는 끊임없는 변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같은 시간, 같은 물건이라는 건 없습니다.

인도철학에서 유, 무에 대한 극단적 입장은 상주론과 단멸론으로 나타납니다. 상주론에서 존재가 있는 것은 계속해서 있으며, 동일성을 갖는 상태로 유지됩니다. 반면에 단멸론에서 존재는 없어지며, 소멸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입장은 모두 유, 무를 실체화하는 논리입니다. 현상에서 유나 무가 실체화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시간성 때문입니다. 어떤 것이 시간성을 거슬러 그 자체로 있음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럼 무(無)는 자체로 성립할 수 있을까요? 한 예로, ‘사과가 없음’을 떠올려 봅시다. 사과가 없음은 어떻게 나타낼 수 있을까요?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사과를 생각했다가 다시 없음을 떠올려야 합니다. 그냥 무 자체를 떠올리기는 불가능합니다. ‘무엇이 있다가 없는 것’은 떠올릴 수 있어도 ‘없는 것’ 자체를 실체화할 수는 없습니다. 채운샘은 우리가 흔히 착각하기 쉬운 허공이 무는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무엇이든 ‘있다’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요? 그것은 우리의 생각과 사고의 바탕이 되는 언어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실체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중론은 있음과 없음에 대한 극단적 태도를 모두 경계합니다. 중론에서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세상의 원리인 연기를 팔불(八不, 불생불멸 불단불상 불래불거 불이불일)로 설명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양극단을 배제하고 그 부정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채운샘께서는 그 부정에 도달하는 것은 무가 아니라 중도라고 말씀하십니다. 중도는 가운데가 아니라 양극단을 쳐내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흔히 사용되는 무엇이란 무엇인가?, 즉 연기란 무엇인가?(무엇이다) 또는 공이란 무엇인가? 라며 정의를 내리는 방식은 무엇인가를 실체화하는 방식입니다. 중론은 이러한 실체화의 위험을 경계하며 주어나 대상으로 출발점을 만들지 않고 ‘뭐가 아닌가’를 보여줌으로써 설명을 합니다.

나가르주나는 대승법으로 연기를 설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중론을 지었습니다. 여기서 대승법은 공을 말하는 것으로, 중론은 공으로 연기를 설하는 것입니다. 공은 연기이며, 연기가 또한 공입니다. 그럼, 잡히지 않는 공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가 관건이 됩니다. 채운샘에 의하면, 나가르주나는 상당히 공격적인 논법으로 공을 보여줍니다. 그는 공을 무언가가 없음을 나타내는 단멸공으로 이해하지 않으며, 또한 반대로 공을 부정한다고 무엇이 ‘있다’고 믿는 상주론도 배격합니다.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말씀하시길, 12연기가 허공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2연기는 그 자체가 실체적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채운샘은 연기가 무엇이고, 공은 무엇이며, 또한 연기가 공이라는 것은 무슨 말인지, 매시간 질문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중론: 언어의 절대화와 언어의 배제를 모두 배격

우리의 사고, 법, 습관은 모두 언어화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로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라, 언어적 관습 때문입니다. 우리는 ‘~~야’ 라고 부르면 그가 있는 것이고, 저기에 뭐가 있다 하면 저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범부들의 언어적 습관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언어를 사용하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언어가 아니라면 어떻게 진리를 밝혀내겠습니까? 부처님은 언어가 관습적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언어를 전면적으로 배제하는 방식이 아니라, 중도를 말씀하십니다. 언어를 배제하는 것은 진리 자체를 신비화하는 위험을 낳게 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세속적 언어를 진리화하는 시도도 쳐내시지만, 또한 모든 것을 부정하려는 시도 또한 쳐내십니다.

베다는 (세속적) 언어를 진리로 생각합니다. 베다는 그 자체가 진리이며 계시입니다. 따라서 진리의 말씀을 바꾸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베다에 쓰여진 언어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한 예로, ‘계급이 나누어져 있다’고 하면 ‘계급이 나누어져 있다’는 말 자체가 진리가 되고, 계급은 없앨 수 없는 것이 됩니다. 또한, 제사 절차가 있다면, 언어를 진리화하여 그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상, 베다란 그 시대의 어떤 논제를 당대의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언어를 절대화하면 그 언어가 진리화하는 것도 그대로 행하여야 합니다. 시대가 달라져 현대에는 구할 수 없거나 통용이 되지 않는 것들도 진리의 이름으로 거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언어를 절대화하는 것은 관습, 규범을 절대화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부처님은 베다식의 언어의 절대화는 언어가 연기적으로 발생했다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부처님은 베다가 신의 계시라는 것을 부정하며, 언어가 범부들의 관습에 불과하며 따라서 언어가 필요없다고 하는 것도 부정하십니다. 더 나아가 부처님은 자신의 말 또한 절대화하지 말고 하나하나 검증하라고 하십니다. 부처님은 자신의 말 또한 연기 조건을 벗어날 수 없음을 아셨습니다.

# “귀류논증파” ([중관사상] 경서원, 146-151쪽)

[수업시간에 나누어 준 프린트입니다.]
<중관파의 두 학파>

나가르주나와 아리야데바에 의해 형성된 중관파는 후세에 귀류논증파와 자립논증파로 분열된다. 귀류논증파는 붇다파리타와 챤드라키르티에 의해 확립되었으며, 자립논증파는 바바비베카로부터 시작되었다. 달라이라마가 속한 쫑카파를 시조로 하는 게루그파는 귀류논증파로 분리된다. 채운샘은 자립논증파는 무언가를 실체화할 위험이 있다고 하신다.

<귀류법과 그 논증식>

귀류논증학파란 귀류법을 사용하는 학파이다. 귀류법의 논사들은 범부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여 집착하는 것이 진제의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속제의 차원에서 조차도 있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해 귀류법을 사용한다 (채운샘에 의하면, 여기서 ‘집착’은 인간이 무엇인가에 과도하게 매달리는 것뿐만 아니라,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이 ‘무엇인가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진제는 궁극의 진리이며, 진제가 세속에서 진리가 아닌 것은 아니다. 진제와 속제도 심지어 두 개가 아니다. 귀류논증학파는 범부 차원에서도 공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귀류논증 학파는 어떤 명제가 참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방식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자립논증파의 방식으로, 자립논증파는 먼저, 주장 명제를 내세우고, 그 주장 명제의 원인을 내세우고, 그 원인에 대한 예를 드는 방법으로 논증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극단화되면 신비화될 위험이 있다. 귀류논증파는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주장을 논파한다. 상대방이 내 주장을 다시 논파하지 못하면 이기게 되는 것이다.

귀류논증을 살펴보면

① s라는 논제가 참을 논증하려고 할 때,

② s와 모순되는 명제 비(非)s를 가정하고,

③ 그 가정에서 거짓이라는 것을 연역해 낸다.

④ 비(非)s가 거짓이므로, 최초의 명제 s는 참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중론 2장 8게에서 11게는 걷는 것(혹은 가는 것)과 그 작자와의 관계를 다루면서 걷는 동작은 어떤 사람에게도 없다고 서술한다.

나가르주나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생각한다.
나가르주나의 주장: 걷는 동작은 어떤 사람에게도 없다’ ① s라는 논제가 참을 논증하려고 할 때
만일 ‘걷는 동작이 있다’면,

그것은 (a1) ‘걷는 사람’ 또는

(a2) ‘걷지 않는 사람’ 중 하나에 속한다.
② s와 모순되는 명제 비(非)s를 가정하고
- a1은 불합리하다. 왜냐하면 만약 (a1)이 참이라면, 1인의 걷는 사람에게 두 개의 ‘걷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걷는 사람에게 걷는 것이 없다.’

- (a2)도 불합리하다. 왜냐하면 걷지 않는 사람에게 걷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③ 그 가정에서 거짓이라는 것을 연역해 낸다.
‘a1. 걷는 사람에게 걷는 것이 있다’와 ‘a2. 걷지 않는 사람에게 걷는 것이 있다’는 모두 거짓이다. 따라서

‘걷는 동작은 어떤 사람에게도 없다’는 참이다.
④ 비(非)s가 거짓이므로,

최초의 명제 s는 참이 되는 것이다.
위의 예를 논증식의 구조로 다시 살펴보자.

나가르주나는 걷는 사람과 걷는 것, 원인과 결과, 보여지는 것과 보는 자 등 어떠한 내적 관계를 가지는 두 개의 사실을 하나의 명제 속에 표현한다. 이 경우, 분류는 A와 비(非)A로 나누어 진다. 앞의 예에서 걷는 것과 걷는 것의 작자는 이미 내적인 관계—운동과 그 기체(基體)의 관계—에 있는 ‘두 개의 사실’이다. 만약 가는 것의 기체가 있다면 그것은 ‘걷는 사람’(X)이든가 ‘걷지 않는 사람’(X’)이라고 나타낼 수 있다. ‘가는 것’을 Y로 표시하면, 두 개의 가정은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a1. 걷는 사람에게/ 걷는 것이 있다 a2. 걷지 않은 사람에게/ 걷는 것이 있다
gantur gamanam

Xgen, Ynom
agantur gamanam

X'gen, Ynom
a1은 불합리하다. a2는 불합리하다.
이유: 만약 a1이 참이라면, 1인의 걷는 사람에게

두 개의 ‘걷는 것’이 있다고 하는 불합리가 생긴다.
이유: 걷지 않는 사람에게 걷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결론: 걷는 사람에게 걷는 것이 없다. 결론: 걷지 않는 사람은 걷지 않는다.
나가르주나에 의하면, a1과 a2 모두 불합리한 결과가 발생한다. 왜냐하면 a1, a2 모두 잘못된 명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들의 일상적인 통념에서는 용인할 수 없다는 것을 나가르주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오히려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상식을 타파하고자 한 것이다.

………

나가르주나는 모든 것을 실체화하는 범부의 상식을 타파하고자 했다고 하는데, 저는 아직 나가르주나의 논법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채운샘께서 수행과 함께 나가르주나의 논법도 함께 파헤치라고 하셨으니 그 말씀을 새겨야겠습니다. 삼사도에서 하사는 염사(念死)가 좋은 수행방법이라고 하였는데 꽃 피는 봄날, 휘날리는 벚꽃을 보며 멸(滅)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

참고로, 윗 부분은 우리 교재인 신상환 선생님의 [중론]에서 32쪽에 해당합니다. 이해를 위해 32쪽을 인용합니다. 이 교재에서는 ‘걷다’가 아닌 ‘가다’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지금, 가버린 것은 가는 것이 아니고

가버리지 않은 것 또한 가는 것이 아니다.

가버린 것과 가지 않은 것을 배제한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은 이해되지 않는다.
전체 5

  • 2021-04-06 18:23
    아이고, 은주샘~ 이 어려운 내용을 복습하고 공부하고 어떻게든 하루라도 빨리 후기를 쓰시려고 끙끙대셨을 모습이 눈에 신합니다. 마치 모범생의 노트를 보는듯한 후기가 앞서 공부했던 내용과 강의를 다시 복기시켜주네요. 수고하셨슴다!

  • 2021-04-06 21:23
    프린트 내용 중 <귀류법과 그 논증식> 부분이 이해가 잘 안됐었어요. 근데 수업후기로 다시 보니 낯섦이 한결 덜 하네요^^
    내가 언어를 실체화하기 때문에 밉네, 옳으네, 그르네, 기쁘네, 슬프네...이 있는 거라고, 사실은 그것들에 실체가 없는 거라고 나에게 얼마나 알려줘야 할까요!

  • 2021-04-06 22:26
    공부에 도움이 많이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 2021-04-07 11:05
    어머나~! 이렇게 정성을 다해 후기 준비하시는라 애썼어요?
    귀류논증 방식을 구체적으로 예시하니 조금은 이해가 될 듯합니다. 우리가 벌써 이렇게 많은 내용을 배웠나 싶어요.
    물론 아직 제대로 사유하고 체화되어가지는 않지만, 가랑비에 옷이 젖어가듯이 조금씩 연기의 사유를 하게 되지 않을까 희망해봅니다.

  • 2021-04-07 21:29
    잘 정리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꼼꼼하게 두고두고 읽어보려고 프린트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