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티(불교&티베트)

<불티모아> 6월 3일 2학기 4주차 수업 후기

작성자
은주
작성일
2021-06-08 12:38
조회
121
1교시: 명상시간

은순샘께서 큰일을 앞두고 잠시 시간을 내서 세미나에 참석하셨습니다. 회사 일로 바쁘신 불티의 청일점 헌식샘도 나오셨고요. 어느 때 보다 풍성한 간식과 함께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지난 번에 배운 생각 명상을 복습하고, 새롭게 통증 명상을 배웠습니다. 우리는 보통 명상을 하면 잡념 때문에 집중할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생각 명상에서는 ‘잡념’을 버리야 할 무엇이 아니라, 명상의 대상이자 알아차림의 대상으로 가져옵니다. 떠오르는 생각을 물리치거나 부정하지 않고, 그대로 봐주고 인정해줍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알아차림을 하다 가도 부지불식간에 생각에 휩쓸리고 감정에 빠져 허우적댑니다. 그러나 때맞춰 들려오는 싱잉볼에 맞추어 생각에서 빠져나와 거리두기를 하고 감정을 바라봅니다. 생각과 생각 사이에는 틈이 있다고 합니다. 경험하지 못해서 이게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과거나 미래에 대한 숱한 생각에서 벗어나 이미지에 끄달리지 않는 순간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통증 명상은 우리가 피하고만 싶은 아픔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생각 명상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회피의 대상이 아니라 알아차림의 방편으로 가져옵니다. 우리는 각자 아픈 곳에 집중하거나, 특별히 아픈 부분이 없는 사람은 엄지와 검지 사이를 꼬집어 일부러 통증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통증명상을 하면 통증이 자리를 옮겨간다는 말을 전에 들을 적이 있는데, 이번에 실제로 경험을 했습니다. 어깨가 묵직해서 집중했더니 처음에는 오른쪽 어깨에 통증이 있었고, 이것이 해결(?)되자 왼쪽 어깨에 묵직함이 느껴졌습니다.

2교시: 낭송

찬드라끼르띠의 [입중론]을 지난 시간에 이어 제9지의 발심에서 시작하여 끝까지 읽었습니다. 앞서 읽었던 [친우서]와 달리 [입중론]은 낭송하며 바로 뜻을 파악하는데는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래도 한 번 읽었으니 회를 거듭할수록 어휘도 입에 익고 의미도 조금씩 파악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한 학기 말에 암송할 다섯 개의 게송을 엄선하여야 하니 빨리 정(?)을 붙여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3교시: 토론

이번 시간은 [중론] 제7장 “유위(有爲)에 대한 고찰”(삼상(生住滅)에 대한 고찰)입니다. 제7장은 35개의 게송으로 이루어져 분량이 많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먼저 16개의 게송을 다루었습니다. 먼저, ‘유위(samskrta)’의 뜻을 살펴보면, 이는 조건들이 함께 모여서 만들어진 것으로, 인연으로 말미암아 조작되는 모든 현상을 의미합니다. 아비달마 교학에서는 모든 유위는 생(生), 주(住), 멸(滅)의 삼상(三相)을 지닌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생주멸의 삼상은 실재하며, 앞서 주장한 온(蘊), 처(處), 계(界) 등도 유위상을 지닌 것이기에 확실히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용수는 삼상이 하나의 독자적인 개념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보임으로써 그들의 주장을 논파합니다.

[7-1] 만일 발생(生)이 유위라면, 거기에 삼상이 (존재하는 것은) 타당하다.

만일 발생이 무위라면, 어떻게 (그것이) 유위상이겠는가?

용수는 상대편의 논리를 따르면 삼상이라는 상, 즉 개념규정도 유위에 속하니, 생주멸 자체도 다시 삼상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럴 경우, 생은 생주멸의 삼상을 갖게 되고, 생이 주, 멸과 공존해야 하는 오류가 생기게 됩니다. 또한 대론자가 주장을 바꿔 발생이 ‘무위’라고 주장한다고 할지라도 이는 타당하지 않습니다. 무위란, 그 어떤 것으로도 규정지을 만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위란 유위의 반대되는 말이 아니라, 유위가 멸한 것을 이름하여 무위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무위는 ‘토끼의 뿔’처럼 상(相)조차 지을 수 없으니, 상을 짓는 생은 무위라고 할 수 없습니다(“만일 발생이 무위라면, 어떻게 (그것이) 유위상이겠는가?”).

[7-2] 발생 등 셋이 분리되어 있으면, (유위의) 상으로 작용할 수 없다.

유위의 (셋이) 결합되어 있으면, 어떻게 (그것들이) 동일한 장소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가?

생주멸의 상 하나하나가 독립적으로 유위법에 대해 상을 짓거나 아니면 화합하여 상을 짓거나 양자 모두 옳지 못합니다. 먼저, 삼상이 분리되어 있는 경우, 생상이 존재할 때, 주상과 멸상이 존재하지 않으면, (어떤 것의) 발생이 유위법이라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어떤 것의) 발생이 존재할 때 지속과 소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떤 것의 발생이 유위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주(住)상이 존재하며 생(生)상과 멸(滅)상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도 타당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발생과 소멸이 없는 (어떤 것의) 지속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멸(滅)상이 존재하며, 생(生)상과 주(住)상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도 타당하지 않습니다. 발생이 없고 지속이 없는 (어떤 것의) 소멸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 반대로 삼상이 결합되어 있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이 또한 타당하지 않습니다. 서로 위배되는 법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람의 경우만 보더라도, 생주멸이 동시에 작동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용수는 또한 유위법에는 삼상이 있다는 주장에서 ‘무한소급’의 오류를 발견합니다(7-3). 만일 생주멸에 또 다른 생을 비롯한 삼상이 존재한다면, 그것들에 또 다른 유위상이 존재하고, 또한 그것들에 또 다른 유위상이 존재하게 됩니다. 이것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는 문제와 유사합니다. 이 경우, ‘생’이라는 것은 무한히 소급되며 어떤 것의 발생 원인이 되는 ‘생’은 규명 불가능합니다. 이러한 무한소급의 오류는 용수가 앞에서 다루었던 제2장 “이미 간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에 대한 고찰”과도 연결됩니다.

[7-13] 아직 발생하지 않은 발생이 어떻게 자기를 발생시킬 수 있는가?

만일 이미 발생한 (발생이 자기를) 발생시킨다면,

(발생은) 이미 발생하였는데 다시 무엇이 발생하겠는가?

[7-14] 현재 발생하고 있는 것, 이미 발생한 것,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은 결코 발생하지 않는다.

현재 가고 있는 것과 이미 간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에 의하여 이미 설명되었다.

용수는 제2장에서 실체로서의 ‘간다’는 행위를 논파한 적이 있습니다. ‘이미 간 것’은 가는 행위가 종결되었기에 가는 행위가 없으며, ‘아직 가지 않은 것’은 가는 행위가 일어나지 않았기에 가는 행위가 없습니다. 또한 ‘현재 가고 있는 것’도 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간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과 분리되어 별도로 현재 가고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는 자가 어떤 장소를 갈 때, 그곳은 이미 간 장소이거나 아직 가지 않은 장소입니다. 따라서 ‘현재 가고 있는 것’에는 ‘가는 행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재 발생하고 있는 존재는 발생하지 않으며, 이미 발생한 것과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도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발생은 자신을 발생시키지도 남을 발생시키지도 못합니다.

용수의 계속되는 논파에 질려버린 듯 대론자는 다음과 같은 악담을 퍼붓습니다.

여래 세존께서는 …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고, 이것이 발생할 때 저것이 발생한다. 무명에 연하여 행들이 발생하고”라고 운운하시며, 전도되지 않는 연기를 가르치셨다. 그대는 “현재 발생하고 있는 것과 이미 발생한 것과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은 (결코 발생하지 않는다).”라고 하면서 논파를 서술함으로써 여래의 어머니인 연기를 살해하는 짓을 저질렀다. ([쁘라산나빠다] 349)

중론을 공부하며, 용수에 대한 믿음으로 읽고는 있지만 대론자의 주장에 먼저 공감하게 되는 저는 그의 악담을 그냥 가벼이 무시할 수만은 없습니다. 그의 악담이 연기를 이해하고자 하는 그의 노력 만큼의 좌절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용수는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알송달송한 답을 합니다.

[7-16] 이것에 연하여 저것이 있을 때, 저것은 자성에 있어서 적정(寂靜)하다.

그러므로 현재 발생하고 있는 것과 발생은 적정(寂靜)하다.

다음 시간에 남은 7장을 하며 ‘적정’의 의미를 파헤쳐 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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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  2학기 5회차 수업 공지입니다.
  1. 명상 하루 10분+ 꾸준히 연습하기

  2. 쁘라산나빠다 7품 발제


17-19:  길례, 20-22:  은미, 23-25:  윤지, 26-28:  은주, 29-31:  설,  32:  현화, 33:  헌식, 34:  경아

3. <인도인의 논리학> 4장 208쪽까지 읽어 옵니다.

4. <입중론>에서 학기말에 암송할 부분 5게송 (1쪽 분량) 선택해서 조금씩 외워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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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6-09 13:28
    저에게 중론은 책을 앞에 두고 찬찬히 읽고 있으면 이해한 것 같다가도 뒤돌아서면 잊어버리고, 토론하면서 뭔가 풀린 것 같다가도 토론이 끝나면 그 내용이 스르르 손가락 사이 모래빠지듯 사라지는, 참으로 공부가 공함(?)을 경험하게 합니다. ㅋㅋㅋ 나가르주나 귀류논증의 방식이 착 달라붙는 그날까지 불교 버전 수학의 정석은 계속 풀고 또 풀어야 하는 거겠죠?! ^^;;

    암튼 이번 주 7품 중간부터 다시 공부하면서 앞의 내용이 뭐였더라....@_@? 하는 저에게 은주샘의 후기는 꿀이네요, 꿀~! 모범생의 찰떡같은 핵심 요약~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어요~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