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역 세미나

성역 3학기 첫 시간(7.30)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1-07-26 11:46
조회
114
드디어 《성의 역사》 1~3권을 다 읽었습니다! 정식 발간된 《성의 역사》를 다 읽었네요. 무엇이 남았을까요? 뭔가 많은 걸 알게 된 것 같기도 하고, 그 중 무엇 하나 잡히지 않는다는 느낌도 들고요. 아무튼 ‘성의 역사’ 시리즈에 담긴 푸코의 문제의식을 어느 정도 소화하려 해도 갈 길이 몹시 멀다는 느낌입니다. 그렇지만 물론 그게 좌절할 이유는 못 됩니다. 앞으로도 푸코를 한참 더 공부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요. 《성의 역사》가 한 번 읽고 말 책들도 아니니 남은 두 학기 동안 앞의 책들을 천천히 다시 복기하면서 가면 좋겠습니다.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은 철학을 계란에 비유하면서 논리학은 껍질, 윤리학은 흰자, 자연학은 노른자라고 말했습니다(저는 알랭 바디우가 쓴 책에서 윤리학이 노른자에 비유되었다고 읽었는데 전해지는 바가 조금씩 다른 것 같습니다). 에피쿠로스 학파 또한 원자와 허공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이해하는 것을 자신들의 철학의 핵심으로 보았구요. 루크레티우스의 유명한 저작 제목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인 것은 우연이 아닐 겁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사물의 본성’을 탐구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였을까요? 자연의 질서와 사물의 본성을 철학의 중심에 놓았다고 하니, 이들은 철학자라기보다는 과학자에 가깝다고 보아야 할까요?

이들이 중요하게 생각한 자연은, 결국 윤리의 문제를 정초하기 위한 토대로서의 우주적 질서가 아닐까합니다. 이들이 자연학을 철학의 핵심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자연학적 이해를 통해서만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에 답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윤리적 존재가 되기 위해 자연학적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 이것은, 니체 식으로 표현하자면 ‘선악의 저편’에 있는 윤리를 보여줍니다. 즉 이들은 윤리를 만들어내기 위하여 무엇인가를 악으로 규정하며 심판하거나, 우리의 행위에 대해 상과 벌을 내리는 보다 높은 존재를 상정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입니다.

고대인들에게 ‘윤리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의 실존을 더 큰 자연의 질서 속에서 ‘이해’하는 것과 관련됩니다. 가령 그리스인들이 근친상간을 비난한 것은 그것이 ‘때에 맞지 않는’(그러니까 성교의 당사자들이 연령 상 적절하게 맺어질 수 없는) 행위였기 때문이지 ‘비정상’이나 ‘악’이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또 성적 쾌락의 ‘과도함’에 대한 이들의 문제제기는 인간의 동물성(=자연성)에 대한 비난이나 육체적 충동에 대한 죄악시를 함축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자연학적 이해에 기초한 의학적 관점에 따라 ‘자연에 부합하는’ 쾌락의 활용법을 창조하고자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금욕은 억제나 부정, 이상주의, 신체에 대한 거부 같은 것들이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운행방식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행위의 적절함을 발명하는 문제와 관련됩니다.

구체적으로, 스토아주의자들에게 금욕은 육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교정하는 것이었습니다. 동물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우리의 육체는 ‘과도함’을 모릅니다. 욕망이 과도하게 되는 것은 정신이 형상한 표상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한 번 좋았던 것이 계속해서 기쁨을 주리라는 기대, 쾌적한 상태에 대한 기억 같은 것들이 인간으로 하여금 집착과 예속에 빠지도록 합니다. 우리를 속이는 것은 감각이 아니라 판단입니다. 그래서 고대인들의 자기연마는 ‘분별 있는 영혼’을 갖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분별 있는 영혼을 갖는다는 것은, 표상을 점검하고 정돈하는 작업을 통해 기억과 습관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당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것, 자기 자신과 최상의 관계를 맺는 것을 뜻합니다. 자기 자신과 최상의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단지 더 건강하거나 성실하게 살아간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에 내포되어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을 지배하기 때문에 다른 무엇에 의해서도 지배당하지 않는 궁극적인 자유의 실현 같은 것입니다.

우리 시대가 윤리를 도출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니체는 ‘악’에 대한 규정으로부터 선을 도출하는 기독교 도덕의 반응적 메커니즘을 비판했습니다. 지금 우리의 도덕이 바로 이러한 메커니즘에 의해 형성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어떤 차원에서 우리 자신의 좋음을 발명하고 연마하고 또 그것을 공유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가 훨씬 더 쉽게 합의에 이르는 것은 ‘악’에 관해서입니다. 이기심, 폭력, 차별, 억압, 고통, 불행 등등. 이러한 악을 행하지 않는 것, 혹은 이러한 악의 제거가 우리에겐 선으로 드러납니다. 악으로부터 선을 도출하는 이러한 사고방식은 쉽게 이상주의/허무주의에 빠집니다. 자기실천이 아닌 악의 제거로부터 구원을 사유한다는 점에서 이상주의적이고, 어떠한 조건이 마련되지 않으면 자유와 구원은 불가능하다고 믿는다는 점에서 허무주의적입니다. 다양한 영역들에서 긍정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좋음, 우리의 윤리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채운샘은 경제적 관점을 넘어서서 연애와 결혼에 대한 윤리적 담론이 지금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또한 비슷한 문제의식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채운샘은 들뢰즈의 표현을 인용하시며 우리도 ‘pop-philosopher’가 될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들뢰즈와 가타리, 그리고 푸코가 보여주는 것은 혁명을 원하는 자들이 거대한 정치권력에 맞서 싸우거나 제도의 변혁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분자적 운동, 측정될 수 없는 미시적은 지점에서의 도주를 통해, 혹은 그러한 차원에서만 우리는 진정으로 혁명과 자유와 구원을 말할 수 있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pop-philosopher가 된다는 것은 자신을 규정하는, 자신의 정념이 들끓고 있는 지점으로부터 사유를 펼쳐낸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의 삶은 점점 더 미시적으로 인도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강제적인 규율이나 억압이 아니라 미시적인 기술적 장치들과 미디어가 우리의 행위를 규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더욱 스스로의 자유를 위해 행한 행위가 자신의 예속으로 귀결하기가 쉬운 것 같습니다. 그런 만큼 우리에게 ‘자기 자신과의 관계’, ‘존재의 기술’이라는 문제가 절실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3학기에 돌입합니다! 첫 시간에는 크세노폰이 쓴《소크라테스의 회상록》(숲) 중에서 <소크라테스의 회상록>을 3권까지(~188쪽) 읽고 공통과제를 써 오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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