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역 세미나

성역 3학기 네 번째 시간(08.20)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1-08-16 17:39
조회
89
지난 시간에는 세네카의 《세네카의 대화 : 인생에 관하여》를 읽고 세미나를 했습니다. 1~6권까지 읽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세네카가 분노에 관해 이야기하는 긴 챕터들이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세네카가 정념의 문제를 매우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정념을 다스릴 것인가? 어떻게 자기 정서에 대한 지배권을 가질 것인가? 세네카가 보기에 이것은 철학이 다루어야 할 가장 우선적인 문제들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지요. 이는 고대 텍스트들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태도이기도 합니다. 이들에게 주체가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는, 철학적이고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문제였습니다. 이러한 문제가 지금 우리에게서 단지 개인의 라이프스타일과 관련된 문제로 취급되거나 아예 적극적으로 문제화 되지조차 않는 것과 상반된 모습입니다.

들뢰즈·가타리에 따르면 욕망은 그 자체로 사회적입니다. 또 푸코는 주체란 항상 역사적이고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주체화 과정의 산물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는 우리의 욕망, 정서, 신체성 등등이 결코 ‘개인적’인 문제일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들을 추상적 영역에 위치시키는 한편, 자신의 욕망과 충동, 정념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여 아주 내밀한 것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이때 우리가 다가가기 어려운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푸코가 ‘주체에 의한 주체 자신의 변형’이라고 말한 문제이죠. 즉 우리 근대인들은 비판과 저항과 해방 같은 우리 삶의 아주 중요한 주제들을 자기 자신의 존재역량과 어떻게 연관시켜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자유와 해방은 억압에 제거하고 자신의 욕망을 무한히 실현하는 것과 같은 편협한 관념으로 축소되어버립니다. 물론 자유에 대한 이러한 관념은 쉽게 주체 자신을 배반하고 맙니다.

“분노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그들이 제정신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무모하고 위협적인 표정, 찌푸린 이마, 험한 얼굴, 빠른 걸음, 떨리는 손, 돌변하는 안색, 잦고 거친 호흡이 미친 사람의 확실한 증거라고 할 때, 분노한 사람의 증거도 이와 같습니다.”(세네카, 《세네카의 대화 : 인생에 관하여》, 까치, 56쪽)

세네카는 말합니다. “분노에는 위대함도, 고귀함도 없습니다.”(83쪽) “덕은 분노 자체를, 분노를 야기하는 악행들보다 못하면 못했지 결코 나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89쪽) 즉, ‘정당한 분노’란 있을 수 없으며, 분노를 야기한 행동의 악함이 분노를 정당화시켜줄 수도 없다는 것이죠. 세네카의 묘사는, 분노란 정념에의 예속과 다른 무엇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의 표정과 떨리는 손과 좋지 않은 안색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역량의 저하를 나타내는 징후들이고, 분노하는 자가 외부적 상황과 그 상황에 의해 촉발된 감정에 일방적으로 지배당하고 있음을 보여주죠.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분노하라’, ‘짱돌을 들어라’ 같은 정치적 수사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러한 구호들은 분노의 대상(기득권, 불평등, 사회적 부조리 등등)의 악랄함이 특정 정념을 정치적·윤리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음을 전제합니다. 그러나 세네카라면 되물을 것입니다. 자기 정념에 지배당하는 자가 스스로의 자유를 위해 싸울 수 있을까? 수동적 정념에 지배당한 자가 새로운 삶과 새로운 세계를 구성해내는 적극적 역량을 발휘할 수 있을까?

‘분노의 사회’라고들 합니다. 분노와 혐오가 만연해 있다고. 정말 인터넷을 돌아다니다보면 대상 없는 분노들이 요동치고 있음을 종종 목격하게 됩니다. 어쩌면 몇몇 경제적 지표들이나 언론이 다루는 정치적 담론들보다 우리를 강하게 규정하는 정서가 무엇인지가 우리 사회에 대해,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분노를 어찌해야 할까요? 세네카의 처방은 ‘판단’을 해체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노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착각하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동물들은 분노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동물들은 공격적인 본능을 지니고 있으나 그것은 스스로를 보호하거나 지속하기 위한 본능일 뿐, 그들이 지속적으로 분노에 사로잡히지는 않습니다. 분노는 ‘판단’과 더불어 성립됩니다. 내가 옳고, 상대가 부당하다는 판단. 그러나 상대가 불의한 행위를 했다는 것이, 우리가 분노에 사로잡힘으로써 자신과 타인을 해쳐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자극하는 마주침들을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 어떤 상황에 처해서도 아무런 느낌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능력의 징표일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우리의 판단을 돌이켜 숙고해봄으로써 우리가 놓인 상황에 의해 일방적으로 지배당하는 상태로부터 빠져나올 수는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함께 읽어보면 좋을 만한 구절을 공유합니다. 예전에 채운샘이 ‘문장을 훔치다’에 인용하신 구절인데 다시 찾아보니 역시 생각할 거리를 주는 구절인 것 같습니다.

나는 1960년대에 정치적인 불의에 항거해 열정적으로 사회운동을 했던 한 사람을 알고 있다. 그는 어떤 갈등이 해결될 기미를 보이면 오히려 우울한 태도를 보여서 주위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그러다가도 분노를 터뜨릴 만한 새로운 문젯거리가 발생하면 다시금 생기를 되찾는 패턴이 반복되곤 했다.내 친구 자비스 제이 매스터스는 사형수이자 불교신자다. 자비스가 쓴 책 <자유를 찾아서>에는 우리가 ‘말의 신’의 꼬임에 넘어갈 때 어떻게 행동하는지가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다. 한번은 자비스가 침대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데, 옆방에 수감되어 있던 오마르가 외쳤다. “자비스, 어서 TV를 켜고 7번 채널을 한번 봐!” (…) 그가 본 화면은 화난 군중들이 야유하며 거칠게 팔을 흔드는 장면이었다. 그래서 자비스가 오마르 쪽을 향해 물었다. “지금 저 사람들 뭐하는 거야?” 오마르가 말했다. “자비스, 저 사람들은 KKK단이야. 흑인과 유태인 때문에 모든 게 잘못되고 있다고 고함을 질러대는 거라고.” 그런데 불과 몇 분이 지나지 않아 오마르가 또 외쳤다. “이봐, 지금 나오는 화면 좀 보라고!” 이번에 자비스가 본 화면에는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하던 군중들이 경찰에 둘러싸여 체포되고 있었다. 그는 물었다. “이 사람들 되게 화난 거 같은데, 대체 무슨 일이야?” 오마르는 말했다. “자비스, 환경운동가들이 시위하는 거야. 벌목과 바다표범 포획을 당장 중단하라는 거지. 마이크를 붙잡고 고래고래 외치는 여자 보이지? 다른 사람들도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지르고 있어.” (…) 자비스는 말했다. “오마르, 나는 오늘밤 재미있는 걸 배웠어. KKK단 옷을 입었든, 환경운동가 옷을 입었든, 최고급 양복을 입었든 그 사람들의 표정이 모두 분노에 차 있었다는 거야.”당신의 신념이 합리적이든 합리적이지 않든 마찬가지다. 모든 신념에는 ‘말의 신’에게 사로잡힐 수 있는 함정이 있다. 정의감에 불타서 아무리 정당한 이유 때문에 화를 낸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이미 우리가 지나쳤다는 증거며, 그로 인해 마음을 바꿀 수 있는 유연성을 잃었다는 신호다. 우리가 가진 신념과 이상이 자기 주위에 방어벽을 쌓는 또 다른 수단이 된 것이다. (페마 초드론, <지금 여기에서 달아나지 않는 연습>)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