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역 세미나

성역 3학기 세 번째 시간(8.13)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1-08-09 15:06
조회
78
지난시간에는 《소크라테스 회상록》을 끝까지 읽고 세미나를 했습니다. 〈회상록〉 4권과 〈향연〉,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읽었는데요, 다양한 주제로 과제들을 써 오셔서 재밌게 토론을 할 수 있었습니다.

〈회상록〉 4권에서는 에우튀데모스와 소크라테스의 대화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에우튀데모스는 또래들보다 많은 책을 섭렵하여 장차 통치자가 되려는 야망을 지닌 젊은이입니다. 그는 자신이 다른 이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는 마음에 “남에게 배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인상”(194쪽)을 주려고 노력하는데, 이를 간파한 소크라테스가 에우튀데모스의 허영을 건드립니다.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소크라테스는 의술을 배운 적 없는 의사에게 우리 몸을 맡길 수 없는 것처럼, 다른 이들에게 배움을 구하려 하지 않는 통치자에게 나라를 맡길 수 없다고 말하며 에우튀데모스의 유치한 자의식에 야유를 보냅니다.

에우튀데모스 입장에서는 굴욕적인 경험이었겠으나, 그는 묵묵히 소크라테스의 말을 들어보기로 합니다. 그렇게 에우튀데모스가 점점 더 자신의 말들을 잘 참아내게 되는 것을 보자, 소크라테스는 혼자서 에우튀데모스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올바름에 관하여, “사람들을 훌륭한 행정가와 유능한 통치자로 만들고 남과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미덕”(197쪽)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눕니다. 물론 여기서도 소크라테스는 에우튀데모스를 곤란에 빠뜨립니다. 에우튀데모스의 전제를 하나하나 흐트러뜨리며 결국 에우튀데모스로 하여금 “자신이 경멸스럽고 또 자신이 사실은 노예라는 생각”이 들게 만듭니다.

소크라테스에게 이런 일을 당한 사람들은 대부분 다시는 그를 찾지 않았고 소크라테스는 그들을 멍청하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에우튀데모스는 “소크라테스와 함께 되도록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고는 자기가 이렇다 할 인물이 될 수 없다”(211쪽)고 느껴 소크라테스 곁에 머뭅니다. 소크라테스는 에우튀데모스의 마음가짐을 알아보고 더는 그를 놀리지 않았으며, “그가 알 필요가 있다고 여겨지는 지식이나 지키는 것이 아주 좋다고 생각되는 습관을 최대한 간단명료하게 설명”(211쪽)해주었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와 에우튀데모스의 대화 가운데에는 유명한 ‘너 자신을 알라’라는 격언이 언급되는데요. 이는 사실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 아니라 델포이 신전에 새겨져 있던 명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본래 뜻은 신탁을 듣기 전에 물어보고 싶은 게 무엇인지 충분히 숙고하라는 뜻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그 의미를 변환합니다. 그에 따르면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지혜의 핵심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행복의 열쇠이기 때문이죠. 부와 건강, 아름다움, 그리고 지혜조차도 그 자체로는 좋은 것이 아닙니다. 질병조차도 ‘좋음’의 원인일 때에는 좋은 것일 수 있기 때문이죠.

어떤 사물도, 어떠한 미덕이나 가치도 그 자체로 좋거나 나쁜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자기 자신을 아는 자에게는 그 무엇이든 좋음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가령 자신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얼마 만큼인지 아는 사람은 아주 적게 소유하더라도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지만 자신의 필요에 대해 무지한 자, 자신의 필요를 스스로 규정할 수 없는 자는 참주와도 같은 권력과 부를 지니고서도 극빈자처럼 가난해서 범죄로 내몰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소크라테스가 말하듯 우리는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때 ‘안다’는 것은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 안에서 자기 자신에게 가장 적절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러한 적절함을 실행할 수 있는 지적 역량입니다.

이 부분에서 저는 푸코의 《주체의 해석학》이 떠올랐습니다. 푸코에 따르면 소크라테스에게서 “Gnothi seauton(‘너 자신을 알라’)은 중요한 여러 텍스트에서 epimeleia heautou(자기 배려)라는 보다 일반적인 범주의 한 형식, 한 결과 또는 구체적으로 한정된 보편적 규칙의 특수한 적용으로 등장”(《주체의 해석학》, 44쪽)합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은 사실 ‘너 자신을 배려하라’― 그러니까 외부 대상들로부터 너 자신에게로 중심을 이동시키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때 돌봐야 할 ‘자기 자신’은 자신의 욕망도 아니고, 감정도 아니고, 내면도 아닙니다. 말하자면 돌보아야 할 것은 자기 자신을 구성하는 다른 모든 것들과의 관계이고, 행복이란 스스로를 규정하는 조건에 대한 이해 속에서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관계들을 구성해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세네카의 《세네카의 대화 : 인생에 관하여》를 6권까지 읽고 과제를 써 오시면 됩니다. 오프라인으로 세미나가 진행됩니다. 간식은 경혜샘이 맡아주셨구요. 그럼 금요일에 뵙겠습니다~
전체 1

  • 2021-08-11 16:34
    저도 에우튀데모스라는 청년한테 감정이입이 많이 됐어요. "남에게 배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인상”을 풍기기 위해 그가 얼마나 힘을 주며 살아야했을지 ᆢ한때의 제모습 같아 안쓰럽게 느껴졌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그런 에우튀데모스를 더 넓은 세상으로 이끌어 준 스승이자 친구가 아니었을까요. '안다'는 것을 더 많이 실험해 볼 수 있는 장으로 이끈 사람, 그래서 자기 자신을 더 자주 만나는 기쁨을 선사한 사람이 소크라테스였다는 생각이 드네요.
    건화샘~~후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