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비기너스 세미나

뉴비기너스 시즌2/ 9주차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1-07-26 20:40
조회
72
지난 시간에는 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을 읽고 세미나를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소피스트 중의 소피스트, 소피스트의 대표자로 등장하는 소크라테스를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줄거리는 대략 이렇습니다. 시골 출신의 가난한 가장인 스트레프시아데스는 사치스러운 아내와 아들 때문에 빚에 시달립니다. 아들 페이딥피데스는 겉멋에 찌들어 분수에도 맞지 않는 말을 타고 다니느라 스트레프시아데스의 재산을 거덜 내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스트레프시아데스는 놀라운 계책을 떠올리게 됩니다. “공상에 잠긴 멋진 사람들”(19쪽), 소크라테스나 카이레폰 같은 소피스트들에게 아들을 보내 변론술을 배우게 해서 화려한 말빨로 자신의 빚을 없던 것으로 만들어 주도록 하자는 것.

우여곡절 끝에 페이딥피데스는 변론술을 배우게 되고 그 덕에 스트레프시아데스는 채권자들을 한방 먹입니다. 그러나 결국 스트레프시아데스의 흉계가 그 자신에게 돌아오는 일이 벌어지고 맙니다. 페이딥피데스가 아버지인 스트레프시아데스를 흠씬 두들겨 패고는 익혀온 궤변으로 태연자약하게 자기 합리화를 하는 것이죠. 그리고 분풀이 할 곳을 찾던 스트레프시아데스가 하인을 시켜 소크라테스와 그 제자들의 집에 불을 지르며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저는 내내 이 작품이 극으로 상연되는 모습을 상상하며 책을 읽었습니다. 아마 당시 아테네에서는 최고로 빵빵 터지는 희극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혼란의 연속입니다. 처음에 작품은 마치 검소한 스트레프시아데스와 사치스러운 모자(母子) 사이에 대립 구도가 그려지는 듯했으나, 이내 소박한 시골사람 스트레프시아데스는 말로 사기를 쳐서 자신의 빚을 없애려는 부도덕한 계책을 꾸밉니다. 그렇다면 이 희극은 스트레프시아데스와 소크라테스의 부정직한 태도를 비판하며 정직과 진실됨을 장려하는 작품일까요? 사실 그렇지도 않습니다.

애초에 이 모든 문제는 스트레프시아데스의 부채에서 시작되는데요, 그는 부채를 궤변으로 무마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부채와 궤변은 비슷한 데가 있습니다. 둘 모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꾸며낸다는 점에서 그렇죠. 소피스트는 궤변을 통해 A를 A가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설득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말의 힘을 빌려 상황을 뒤집고 현실을 교란시킬 수 있죠. 부채에도 비슷한 속성이 있습니다. 채권자가 빌려준 원금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아무런 노동이 가해지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몸집을 불립니다. 조금 비약이 있지만, 스트레프시아데스는 궤변에 맞서기 위해 궤변을 사용한 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리스토파네스는 무엇을 풍자하고 있는 걸까요? 돈을 받고 지식을 파는, 궤변으로 진실을 왜곡하는 소피스트일까요? 아니면 부도덕한 방식을 택한 스트레프시아데스일까요? 아니면 사치를 부리는 페이딥피데스 같은 젊은이들일까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전부라고 말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그 무엇도 진지하게 비판하고 있지 않다고 말해야 할 것 같기도 합니다. 제 생각에 아리스토파네스는 정론의 편에 서서 사론을 비판하고, 정직성을 지지하며 정직하지 못한 자들을 심판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작품에는 의인화된 정론과 사론이 논쟁을 벌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리스토파네스는 정론과 사론 모두를 희화화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미 낡아버려 힘을 갖지 못하는 정론, 또 정론에 대한 반박으로부터 밖에는 스스로의 존재 근거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사론. 개인들을 부채의 위기로 내모는 공동체와 그러한 조건에 지배당하는 개인들. 이 모든 상황들에 대한 유쾌한 풍자 속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몰락의 징후 같은 것을 보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상상도 해보게 되었습니다.

자 이제 에세이 발표만 남겨두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함께 공유한 주제들을 남은 시간동안 발전시켜 한 학기를 마무리짓는 짧은 에세이를 써 오시면 됩니다. 그러면 목요일에 뵙도록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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