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비기너스 세미나

뉴비기너스 시즌 2/ 8주차(7.22)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1-07-19 15:07
조회
66
이번 주에는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읽고 세미나를 했습니다. 이 책 전체는 고발을 당하여 재판정에 선 소크라테스의 자기변론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어찌된 일인고 하니, 멜레토스를 비롯한 고발자들에 의해 소크라테스는 신성모독과 젊은이들을 선동한 혐의가 씌워져 사형에 처할 위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상 저 혐의들은 명분일 뿐이고, 실제로는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유력자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자신이 일생 실천해온 것은 신성모독이나 선동이라기보다는 ‘검토’였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친구 카이레폰은 어느 날 아폴론 신전에 가서 ‘소크타레스보다 더 지혜로운 자가 있느냐’고 질문을 했고, 이에 퓌티아는 소크라테스가 가장 지혜롭다고 답변합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소크라테스는 신탁을 이해하기 위해 자기보다 더 지혜로워 보이는 사람들을 찾아 나섭니다. 그러다 그는 알게 됩니다. 지혜롭다고 하는 사람들은 사실 자신의 기술이나 특정 분야의 지식을 과도하게 부풀려 자신이 다른 중요한 것들에 있어서도 가장 지혜롭다고 믿어버렸을 뿐이라는 것을. 이에 소크라테스는 자신은 스스로가 무지하다는 것을 안다는 점에서, 자신의 무지를 깨닫지 못하는 다른 이들에 비해 더 지혜롭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고는 지혜롭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새삼 스스로의 무지를 일깨워주기 위하여 아테네를 돌아다니며 등에처럼 사람들을 괴롭히기 시작합니다.

안다는 건 뭘까요? 지성이란 무엇일까요? 경험상, 우리의 정신이 활기를 띠는 것은 ‘문제’를 만났을 때입니다. 어떤 어려운 철학 개념을 이해하려고 애쓸 때, 뭔가 잡힐 듯 말 듯 한 낯선 관점으로 세계를 바라보려고 시도할 때, 우리의 지성이 운동을 합니다. 반면 이렇게 실제로 우리가 사유의 ‘운동’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알고 있는 게 많거나 IQ가 높아도 별 소용이 없죠. 지식이나 지능이 우리를 해방해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다르게 사유하기를 시도할 때 지성은 우리를 더 가볍게 하고, 우리가 겪고 있는 것들을 더 유연하게 긍정하도록 하고, 자신의 기질과 성향에 치우치지 않도록 합니다. 대신에 그만큼 노고가 들죠. 어쩌면 소크라테스는 우리를 주어진 조건에 더 잘 적응하도록 하는 기술이나 수단으로서의 지식을 넘어서, 일종의 고행이자 삶의 양식으로서의 사유를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소크라테스적 사유의 이미지는 기존의 사회적 질서와 충돌을 일으킵니다. 실제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지혜롭다고 불리는 자들의 지혜를 검토하고 그들의 무지를 폭로하는 모습을 보고 젊은이들이 깊은 인상을 받아 어설프게 자신을 모방했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자신이 그런 식의 ‘저항’과 ‘전복’ 자체에 머물렀던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애초에 그는 ‘진정한 지혜’를 추구하도록 촉구하기 위해 지혜인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물리칠 필요가 있었던 것이고, 진정한 올바름을 추구하려다보니 기존의 질서와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니까요.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이성과 욕망, 그리고 자신이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가 하나로 일치된 삶을 살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이성적 판단에 따라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그의 태도에서도 이러한 실천과 추구가 눈에 띄었죠. 그가 추구한 고매한 삶은 이상일 뿐일까요? 아니면 우리는 우리가 놓인 조건과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그 고귀한 삶을 다양하게 실행해갈 수 있는 걸까요? 솔직히 잘은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건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삶으로 보여준 철학자-수행자의 이미지가 굉장히 멋져보인다는 점(?)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소크라테스와 동시대를 살았으며 소크라테스를 풍자했던 아리스토파네스의 작품을 만나봅니다. 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을 읽고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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