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문회 숙제방

장자 시즌2 2주차 메모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21-06-25 08:14
조회
40
  1. 6. 25 금요일 / 장자 시즌2 2주차 메모 / 박규창


 

거울과 같은 정치

성인은 끊임없이 운행하는 하늘의 도(道)를 본받아 자신의 마음을 거울과 같이 고요하게(靜) 만든다. 장자에게 ‘고요함(靜)’이란 운동성(動)의 결여가 아니라 새로운 운동성을 발생시킬 수 있는 잠재적 상태다. 마음이 고요한 거울과 같다는 것은 어떤 것이 와도 거기에 응할 수 있는 매우 유연한 상태, 곧 누구와 어떤 상황에서도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자유로움을 말한다. 내편에서는 이러한 마음을 가져야만 죽음과 같은 문제에서도 고통받지 않을 수 있다고 얘기했다. 그런데 외편에 와서는 통치자의 덕목으로 거울과 같은 마음이 요구된다. 왜 정치에서 이런 덕목이 요구되는 것일까?

통치자는 어떤 존재여야 할까? 통치자를 리더로 바꿔놓고 생각하면, 나는 ‘일 잘하는 사람’을 이상적인 리더로 생각한다. 일을 잘하면 최소한 어떻게 판이 굴러가야 하는지 알고, 구성원들이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진두지휘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장자가 생각하는 성인은 일 잘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일 잘하는 것은 리더로서 성인이 갖춰야 할 본질적인 덕목이 아니라 부림 당할 사람이 갖춰야 할 지엽적인 덕목이다.

 
“윗사람은 반드시 무위해서 천하의 사람들을 부리고 아랫사람은 유위해서 천하를 위해 일하는 것, 이것이 바꿀 수 없는 도(道)이다. 그 때문에 옛날 왕으로 천하를 다스린 사람은 비록 천지(天地)를 다 망라할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스스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비록 만물을 두루 다 논할 정도의 말재주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스스로 말하지 않았으며, 비록 사해안의 모든 일을 처리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스스로 일하지 않았다.” - 〈천도(天道)〉 2장

 

장자에 따르면, 성인은 일을 잘하더라도 그것을 드러내지 않는다. 실제로 실무를 맡아서 처리해야 하는 것은 리더인 성인이 아니라 신하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성인은 그들이 능력을 발휘하도록 인재를 등용하고 배치하는 것이 역할이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기능적으로 군주와 신하의 역할을 구분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닌 것 같다. 장자가 유·묵·법가 등을 비판하는 이유는 그 학파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가치가 실현돼야 ‘다스려졌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외부적 가치를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여러 학파는 인간의 본성이 어떻다고 규정하고, 본성을 회복하든 교정하기 위해 특정한 가치를 실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군주로부터 비롯된다.

하지만 장자가 보기에, 누구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새로운 가치를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오히려 외부적 가치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자신의 본성을 억압해야 한다. 본성이 억압된 상태에서 어떤 가치를 덧붙여도 군더더기와 같다는 것이 장자의 주장이다. 장자는 일관되게 자신에게 좋은 가치가 타인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다는 생각을 비판한다. 이는 정치에서도 마찬가지다. 통치자에게 ‘보기 좋은 나라’는 실제 백성에게 어마어마한 고통의 산물일 수 있다. 〈천도(天道)〉 4장에서 순 임금이 요 임금의 마음씀에 대해 “아름답기는 아름답습니다만 아직 위대하다고는 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자기에게 보기 좋은 모습이 꼭 다른 사람에게도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다. 오히려 그 보기 좋은 모습을 위해 많은 사람이 본성이 억압되는 등 피해를 받을 수 있다. 도(道)가 자신에게 보기 좋은 방식으로 세상을 만들지 않듯이, 성인도 자신에게 보기 좋은 나라를 위해 통치하지 않는다.

고요한 거울과 같은 마음으로서의 성인의 통치는 정치란 자신의 마음을 일방적으로 투영할 수 없는 활동 영역이라는 얘기가 아닐까? 정치는 함께 살아가기 위한 기술이고, 나는 나 혼자서 살아가는 것보다 여러 사람과 함께 살아갈 때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우리가 모여서 공부하는 것 같은 활동들).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그들의 마음을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가 실제로 얼마나 일을 잘하더라도 리더일 수 없다. 오히려 다른 사람을 비출 수 있는 거울 같은 사람이 아니라면, 자기 생각 속에서 그려진 이상적인 계획을 위해 억지로 구성원들을 채찍질할 것이다.
장자와 혜자의 우정

장자와 혜자는 내편에서부터 토론하는 모습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 혜자는 논리와 모순을 중시하는 명가(名家)로 분류된다. 장자는 혜자를 비판하지만, 〈제물론〉 같은 편을 보면 상당 부분 혜자로부터 영향받았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장자와 혜자의 토론을 보다 보면, 서로의 논리를 반박하면서도 영향을 주고받는 묘한 우정이 성립하지 않았을까 상상하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장자가 혜자의 죽음을 슬퍼한 것을 보면, 거기에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그려왔던 우정과 다른 우정이 보인다. 누군가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장자 사상에서 좀 생뚱맞게 보인다. 장자는 죽음을 존재가 소멸하는 슬픈 사건이 아니라 존재가 다른 존재로 화(化)하는 운동으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군가 죽는다 해서 굳이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장자의 생각이다. 그런데 혜자의 죽음에 대해서는 이런 도식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는 혜자의 죽음을 ‘속박에서 풀려남(懸解)’으로 보지 않고, “더불어 이야기할 사람이 없어졌다”고 슬퍼한다.

장자가 혜자의 죽음을 슬퍼한 것은 단순히 혜자라는 존재가 사라졌기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장자가 혜자의 논리에 응수하며 자신의 깨달음을 펼칠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혜자라는 상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혜자는 자신이 논파해야 할 적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깨달음을 펼칠 수 있는 기반이기도 했다. 즉, 혜자가 없다면 장자의 깨달음도 무의미하다. 장자가 혜자의 죽음에 슬퍼한 것은 더 이상 자신의 깨달음을 펼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지 않을까?

아무리 대단한 공부도 그것을 펼칠 수 있는 관계가 없으면 소용없다. 우리는 누군가와 같이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하하호호 떠들 수 있는 사람과 우정을 맺지만, 장자와 혜자와 같은 우정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나의 깨달음을 갈고닦을 수 있는 사람과 우정을 맺기. 그러한 우정을 맺고자 한다는 것은 부단히 깨달음을 추구하겠다는 발원과 분리될 수 없다.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