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세키와 글쓰기

10. 15 소세키 수경조 후기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6-10-16 21:49
조회
301
수경조는 공통과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먼저 혜원누나의 글을 보았는데, 혜원누나는 1장에서 히에이잔산을 오르는 고노와 무네치카, 그리고 2장에서 6첩 다다미방 안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는 오노와 후지오에게 주목했습니다. 소세키에게 이전에 잡지에 발표했던 것과는 다르게 신문에 연재하는 것은 <우미인초>가 처음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신문에 소설을 연재하는 것을 두고 ‘실록연재’이라 부르는데, 그것은 실제 일어난 사건들을 소재로 사용하되 내용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소세키의 연재방식은 1장에서는 히에이잔산을 오르며 자연을 묘사하는 내용을, 2장에서는 그들의 등산과는 전혀 관계없이 후지오와 오노의 이야기를 다루며 지난 이야기의 맥을 그대로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후지오와 그녀의 어머니의 대화 도중에 ‘서술의 붓’이 등장해서 자신은 이 대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등 소설의 맥을 자꾸 끊어놓습니다. 혜원누나는 독자로서 이런 전개방식이 당황스러우면서도 “당시 <우미인초>가 신문 1면에 실린 만큼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 것이 아닐까?” 라고 했습니다.

화자는 인물들을 ‘~한 사람이다.’라는 식으로 쉽게 단정하는 것이 이상하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오노와 사요코는 불쌍한 사람이다.’, ‘후지오는 이런 여자다.’ 같이 말입니다. 이것은 단지 인물평에서 그치지 않고 화자의 입장을 눈에 확 띌 만큼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의 화자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화자가 아니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 대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는 여자의 마음을 모른다.’와 같이 서술하는 화자가 있는 반면에 인물들의 내면을 보여주는 화자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오노와 무네치카가 걸어갈 때, 이 둘을 ‘서로 경멸하는 사이’라고 얘기하거나 교토에서 돌아온 뒤에 무네치카의 아버지와 얘기를 하고난 뒤에, ‘이 노인도 자신의 어머니를 보통의 어머니로 알고 있다. 마치 세상에서 혼자 남은 듯한 느낌이다.’ 라는 구절이 나오니까, 어쩌면 이 소설에는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눈에 띄는 화자와 그 뒤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화자가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었지요.

그 다음으로는 빠지면 섭섭한 사생문적 글쓰기에 대해 얘기를 나눴습니다. 2장에서 오노와 후지오가 나누는 장면에 대해 얘기를 나눴는데, 이때 화자의 시선(서술의 붓)은 그들의 대화를 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닫힌 문 밖의 인력거와 세계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을 전쟁, 생명의 탄생을 보고 있습니다. 지난 후기에도 써져있듯이, <베가본드>가 다시 나왔습니다. 또 얘기하자면 수경쌤이 만화 <베가본드>에는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무사의 진검승부가 벌어지는 와중에 동시에 풀벌레나 위의 하늘, 구름, 지나가는 새 같은 온갖 잡다한 것들을 같은 크기의 컷으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야기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넣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중심 스토리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사생문이 아닐까? 어쩐지 사생문이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는 얘기가 있어서, 제가 그렇다면 작품에서 그러한 이야기의 효과는 과연 무엇으로 나타나는 지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만약 비극의 끝이 죽음이라고 한다면, 결국 고민은 생사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건을 겪고 있는 인물을 가까이서 보지 않고 더 멀리서 봄으로써 다른 무관한 것들을 보게 된다면 더 이상 희극과 비극의 차원이 아니라 그것들을 뛰어넘는 시선으로 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작품에서 나타는 비극과 희극이 무엇인지, 그것을 더 위에서 보는 시선은 무엇인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락쿤쌤의 글에 대해 얘기를 나눴습니다. 락쿤쌤은 길도 모르는 채로 히에이잔산을 오르는 고노와 무네치카나 박람회에서 사람들에게 떠밀리는 고도 선생과 사요코를 묶어서 자신의 위치를 지각하지 못하는 사람들, 길을 잃은 현대인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냐는 말을 했습니다. 이에 대해, 해제에서 히에이잔산을 오르는 고노와 무네치카를 누가 떠밀지 않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산책하는 인물들이라는 것을 얘기했다며, 그런 점에서 단순히 길을 잃은 것과는 다르지 않냐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도 선생과 사요코, 고노와 무네치카 모두 기차를 타고 자신들의 고향을 떠나 어딘가의 명소로 찾아갔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 있었습니다. 사실 기차가 생기기 이전에 ‘명소’라는 개념이 있지도 않았고, 있었다 해도 ‘봄에는(혹은 벚꽃을 보려면) 어디를 보러 가야한다’와 같은 생각이 그렇게 널리 퍼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기차가 생기고 사람들의 이동이 확장되고 빨라짐으로써 명소가 생겨난 것이지요. 그렇게 본다면 명소를 찾으러 갔다는 점에서 이들을 모두 ‘현대인’이라는 틀 속에서 볼 수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노가 왜 욕심을 부리지 않는가에 대해 얘기를 나눴습니다. 작품 속에서 고노는 어머니와 동생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주겠다고 합니다. 근데 왜 ‘굳이 전부 다 주는 걸까? <도련님>에 나오는 형처럼 일부분만 줘도 될 것 같은데 왜 굳이 전부 다 주는 걸까? 자신은 무엇으로 먹고 살 생각일까?’ 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당시 대학은 지금처럼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선택된 엘리트들만이 가는 곳이기 때문에 그들은 어떻게든 먹고 살 방법이 있었을 것이라는 얘기가 있었고, 그들의 부유한 생활습관 때문에 굶어죽는다는 생각을 못 했을 것이라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르디우스 매듭이 결국 끊어지는 것말고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처럼, 고노와 그의 재산을 노리는 어머니와 동생과의 관계는 풀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재산을 다 주는 것만이 그들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유일한 방법이지 않았을까 라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다음으로는 제 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저는 오노와 고노, 무네치카가 자꾸 만날 듯 하면서도 만나지 못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오는 것이 궁금했습니다. 만약 화자가 이들의 만남을 일부러 이렇게 포착하는 거라면, 거기에는 어떤 의도가 숨어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만남들을 ‘어떤 초월적인 외부의 존재’의 개입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운명적’이라는 것으로 보일 정도 였습니다. 하지만 오노가 사요코와의 결혼을 거절을 가난이라는 자신의 처지를 든다거나 후지오와의 약속에서 늦는 것의 핑계로 무네치카의 방문을 얘기하는 모습에서 ‘운명이라는 게 정말 어쩔 수 없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장에서 후지오와 오노가 6첩 다다미방 안에서 얘기하고 있지만 동시에 밖에서는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나가서 사건에 엮이고 벌어지는 것이 그저 운명인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얘기하고 나니까, 그러면 ‘운명은 개척해 나가는 것인가?’ 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오글거리는 말이었지만, 살아가는 것 자체가 운명이라는 것이 제 생각이었습니다. 이밖에도 저는 이 소설에서 나오는 인물들이 가지는 공간이 흥미로웠습니다. 수수께끼 여자의 세계관을 설명될 때 그녀는 연못에서 잉어가 튀어 오르든 나무에 꽃이 피든 관심이 없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서재에 있는 고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각각의 공간이 있는데, 자신의 방은 보여주지도 않으면서 다른 인물들의 공간에 침입하여 멋대로 화사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무네치카라는 인물은 무엇일지 궁금했습니다.

어쨌든 소세키에게는 ‘자기본위’나 ‘취미’ 같은 키워드가 있었습니다. 소설을 읽고 글을 쓸 때는 이런 것들을 염두에 둬야 하는데, 어느 샌가 잊어버리고 말았던 이번 주의 제가 또 보입니다. 작품 속 인물들을 따라가지 말고 그들을 보는 시선에 대해서 의심해보라는 수경쌤의 조언을 떠올리면서 <갱부>를 같이 읽어봐요~ 그리고 종은쌤은 이번 주에 고노의 행동이 궁금했던 것처럼, 궁금한 게 있으면 꼭 써오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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