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내어 읽는 니체

[소니] 선악의 저편 두번째시간 후기(11/12)

작성자
경아
작성일
2018-11-18 12:04
조회
118
<선악의 저편> 두 번째 시간, ‘2장 자유정신’과 ‘3장 종교적인 것’을 같이 읽고 이야기 했던 부분들을 정리해봅니다.

40절의 “깊이 있는 모든 것은 가면을 사랑한다.”라는 구절에서 이 가면은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 이야기 해보았습니다. 피부나 표피는 보통 내면의 반대로서 피상, 가상적인 것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한의학의 진단에서 피부는 내부 장기의 상태를 정확히 말해줍니다. 피부는 무엇인가를 숨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드러내줍니다. 니체도 표피적인 것이 전부라는 식의 말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가면 아래 숨겨진 불변의 진리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니체의 사유과정 자체가 가면을 쓴 것으로 비유되곤 합니다. 고정적이고 최종적인 사유를 부정하는 의미로써 말이죠. 그의 사유의 과정들은 가면을 바꿔 쓰듯 계속 나아갈 뿐입니다. 이렇게 피상적으로(^^) 정리하고 넘어가려 했으나 후기를 쓰려고 다시 읽어본 구절들이 역시나 어렵습니다.

깊이 있는 모든 것이란 “이 미래의 철학자들, 이들 또한 자유로운, 지극히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들”을 말합니다. 여기서 ‘자유정신’은 자유와 평등과 같은 현대 이념의 자유로운 정신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니체는 자유로운 정신은 선악의 저편이라는 위험한 형식과 관계가 있을 뿐이라고 못을 박습니다. 새로운 자유정신의 소유자는 “어느 누구도 쉽게 그 궁극적 의도를 간파할 수 없는 표면에 나타난 영혼과 배후에 숨겨진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그 누구의 발도 마지막까지 내달릴 수 없는 전경과 배후를 가지고 있다. 이는 빛의 외투 안에 숨어 있는 은둔자...”(선악의 저편, 44절) 라고 말합니다. 새로운 자유정신의 소유자는 바로 깊이 있는 것과 통합니다. 그들은 형상과 비유마저 싫어한다고 합니다. 왜냐면 형상과 비유는 무엇인가 고정적이고 확정적인 것을 전제하고 그것을 묘사하려는 시도입니다. 깊이 있는 자에게는 심연이 있을 뿐이지 거기에 무언가가 있을지는 자기 자신도 알 수 없기에 두렵고 조심스럽습니다. 그래서 일단 자신을 가면으로 가립니다.

40절에서 수치라는 번역은 오독과 오해의 소지를 만들어냅니다. “수치라는 것에는 독창성이 있다. 사람들이 가장 수치스러워 하는 것이 가장 나쁜 것은 아니다: 가면 뒤에 단지 교활함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데 수치라기보다는 수줍음으로 번역하는 것이 맥락상 연결이 잘됩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깊이 있는 자들은 심연에 무엇인가 새로운 것들을 감지는 했으나 아직은 무르익지 않았기에 두렵고 조심스럽고 수줍은 것입니다. 니체는 이런 새로운 사상의 탄생을 준비하는 자들을 임산부로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생명을 잉태한 임산부는 알 수 없는 경이와 두려움에 극도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고 최선을 다해 자신을 보호합니다. 사상이든 행동이든 모든 본질적인 완성은 임신했을 때와 같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결실을 맺도록 항상 조심하고 깨어 있고 영혼을 조용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이상적인 이기심이라고 말합니다.(아침놀, 552절 이상적인 이기심) 이처럼 새로운 것을 생성하는 자로서 깊이 있는 자들은 항상 조심하고 또 조심하며 자신을 드러내 보이지 않기 위해 가면이 필요합니다. 마치 좋은 포도주를 숙성시키기 위해 “무거운 쇠테가 박히고 푸른 이끼가 많이 낀 낡은 포도주 통처럼 평생 거칠게 둥글둥글 굴러다닌다”는 사실처럼 말입니다. 우리도 자신의 주장이 진짜 의도했던 것을 말하고 있는지 자신 스스로도 알 수 없습니다. 나는 진실만을 말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오류일 뿐입니다. 그래서 “말 한 마디 한 마디, 모든 발걸음, 그가 부여하는 모든 생의 기호”를 다른 사람들은 오해하고 피상적으로만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자신의 가면 속에 살고 있는데 그것을 가면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일단 가면은 넘어가겠습니다. 세미나 시간에도 이렇게 스리슬쩍 넘어갔습니다.

36절 니체가 “힘에의 의지”를 끌어내는 논리가 재밌었습니다. “우리의 욕망과 정열의 세계 외에 현실로 ‘주어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가정한다면” 기계론적인 즉 물질적인 세계를 이해하는데도 이 “충동”의 세계로 이해하는 것이 “방법의 양심”, “방법의 도덕”을 관철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충동이라는 하나의 인과성으로 물질의 세계, 생명의 세계를 동일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세계는 이런 인과, 저런 세계는 저런 인과로 설명하는 것은 수학적 방법적 정의(定義)에서 벗어납니다. 우리가 의지의 인과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단지 인과성 자체에 대한 믿음을 표현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의지의 인과성을 유일한 인과성으로 하여 이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보자고 합니다. 의지는 어떤 의지와의 작용 속에서만 이해됩니다. 의지는 물질 자체에는 작용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작용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의지에 대한 작용입니다. 이 세계의 모든 작동은 “총체적인 충동의 생을 한 의지의 근본 형태”인 ‘힘에의 의지’이며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단언합니다. 니체가 힘에의 의지를 이런 식으로 도출해냈다는 것입니다. 그의 힘에의 의지가 어디서 뚝 떨어진 개념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하나의 단초에서 시작해서 그것을 끝까지 밀고 나간 결과라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3장 종교적인 것’은 인간이 역사적으로 사회 문화적으로 어떻게 종교적인 분위기에 휩싸여 살고 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어떤 신앙으로서의 종교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종교 속에서 살아가는 종교적 인간(die homines religiosi)에 대한 비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같은 그리스도교라도 원시 그리스도교와 남국의 그리스도교, 북국의 그리스도교가 그 사회의 요구와 상황에 따라 어떻게 다르게 드러내는지 말이죠. 특히 ‘십자가에 매달린 신’, ‘계몽주의’ 등을 통해 종교적인 노예의 반란의 양상을 보여줍니다. 고독, 단식, 성적 금욕과 같은 성자들의 섭생규정을 “종교적 신경증”이라 명명하며 바로 이런 것들을 ‘종교적인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60절의 “신을 위해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이것은 지금까지 인간이 도달한 가장 고귀하고 통례에서 벗어나 있는 감정이었다”라는 구절이 긍정하고자 하는 것인지 비꼬는 것인지 애매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구절로부터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신성 없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에는 추가적인 어리석음이나 동물성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을 ‘체험한’ 사람은 아마도 가장 높이 날아갔으며(remotest) 가장 아름답게 길을 잃은 인간이라고 비꼬는 투로 끝납니다. 아무도 체험할 수 없었기에 혹은 체험했다고 착각하는 사람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입니다.

하나 하나의 텍스트를 같이 더듬거리며 가는 과정 속에서 공통의 신체를 느낍니다. 그래서 매번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사뭇 궁금해지기도 하고 다른 해석들이 가능해지며 풍성해지는 느낌이 듭니다.  특히 이번주 열심히 머리를 쥐어짜내는 저희가 안쓰러웠는지 거놔 반장님이 2,3장만 넘어가면 좀 쉬어진다는 믿고 싶은 위로를 던져주셨습니다~^^ 그럼 한 고비 넘은 것이라 생각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쭉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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