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내어 읽는 니체

소니 11.26 선악의 저편 4주차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8-11-25 14:41
조회
91
내일이 세미나인데 이제야 공지... 죄송합니다.

이번 주에는 《선악의 저편》 4장과 5장을 읽고 세미나를 했습니다.

앞서 읽은 2, 3장이 너무 어려웠던 데다가, 촌철살인의 아포리즘들로 이루어진 4장이 비교적 쉽게 읽힌 덕분에, 이번 세미나는 지난주보다는 좀 수월했던 것 같습니다. 아포리즘이 더 잘 읽힌다고 하시는 분들이 계신가하면 산문 형식이 더 좋다고 하신 분들도 계신 게 신기했습니다. 같은 텍스트를 읽고 있지만 거기에 접근하고 반응하는 양식들은 다 다른 것 같아요. 이렇게 모여서 함께 세미나를 하는 이유겠죠.

토론 중 언급된 아포리즘들 중 제가 인상 깊었던 구절과 그에 대해 나눈 이야기들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우선 64절. 여기에서 니체는 ‘인식을 위한 인식’이 도덕이 만들어놓은 마지막 함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5장의 내용을 연관시켜서 생각해보면, 니체는 여기서 도덕을 ‘정초’하고자 시도했던 형이상학자들을 비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형이상학자들은 ‘순수한 인식(인식을 위한 인식)’을 도구로 삼아 진정한 도덕을 정초하고자 했습니다. ‘무엇이 진리인가’라는 질문을 파고들어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도출하려고 한 것이죠. 인식을 통해 보편적인 도덕을 틀 짓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니체가 생각하기에 ‘보편적 도덕’ 같은 것은 없으며(“도덕적인 현상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현상에 대한 도덕적인 해석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순수한 인식’ 또한 허상일 뿐입니다. 인식이란 그 자체로 가치평가이며, 스스로를 보존하고 확장하고자하는 힘의 산물입니다. 충동과 본능 바깥에 인식이 있는 게 아니라, 여러 충동들과 본능들의 관계 속에서 출현하는 것이 인식이죠. 따라서 우리는 순수한 인식을 통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가 우리를 이루는 모든 힘들과 관계 맺는 양식 속에서(즉 우리의 존재 방식과 삶의 양식을 통해서) 특정한 인식과 관점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다면 나의 도덕을 입법하기 위해, 즉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능동적으로 답하기 위해서는 ‘순수한 인식’을 통해 ‘보편적 도덕’에 접근하고자 시도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가 순수한 인식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어떤 존재 방식에 의해서 획득된 것인지를 의심해봐야겠죠.

146절에 대해서도 길게 이야기했죠. 니체는 여기서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자신이 이 과정에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만일 네가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심연도 네 안으로 들어가 너를 들여다본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워낙 유명해서 제가 어렸을 때 누군가로부터 주워듣고 ‘와 멋있다’라고 생각했던 게 기억이 납니다. 여기서 니체가 말하는 경우를 주변에서나 역사에서나 정말 자주 접하게 됩니다. 부당한 권력에 맞서던 이들이 어느새 스스로 그러한 권력을 재생산하고 있다거나, 가깝게는 부모를 욕하던 자식이 자기도 모르는 새에 부모와 닮아가고 있다거나 ….
그런데 다시 읽고 보니 이 구절은 처음 접했을 때와는 조금 다르게 다가옵니다. 처음에는 이 구절이 ‘괴물이 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스스로를 경계하라’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꼰대’라고 부르며 싫어했던 이들의 행태를 나는 결코 반복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었죠. 그런데 지금은 이 말이 네가 ‘거부하고자 하는 것과는 다른 리듬과 힘을 구성하라’는 말로 이해됩니다. 아무리 경계하고 스스로를 검열하며 ‘괴물’이 되지 않고자 한들, 다른 가치들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결국 중력의 악령에 붙들릴 뿐이라는 것.

공지하겠습니다. 《선악의 저편》 6, 7장을 읽어 오시고, 늘 그렇듯 함께 이야기 나누고 싶은 구절을 정해서 설명과 질문을 준비해오시면 됩니다. 간식(과 다음시간 후기)은 길례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