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카프카

10월 19일 카프카 세미나 후기

작성자
보영
작성일
2017-10-21 22:30
조회
94
지난 목요일에는  <시골 의사> 챕터에 있는 카프카 단편을 읽고 이야기했습니다. 더불어 이응샘이 말씀해주셨듯이 시골의사 애니메이션을 같이 보았어요. 글을 읽으면서 머릿속으로 그려보려했으나 잘 그려지지 않았던 장면이 많았는데, 애니메이션을 통해 다른 사람이 해석한 장면은 이런 모습이었구나하고 명료하게 확인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한 구절 한 구절을 구체적으로 해석하려면 정말 꼼꼼히 읽고 생각하고 상상해야하겠구나.. 새삼 깨달은 시간이었습니다.

# 속았구나! 속았어!

<시골의사> 마지막 장면에서 시골 의사는 읊조립니다. "속았구나! 속았어!" 라고 말이죠. 카프카의 글을 읽고 나서 저 역시 같은 말을 떠올렸어요. 속았구나 속았어! 분명 무언가 읽긴 했는데, 다 읽고 나서도 무슨 말인지 도무지 해석이 안 되는 글이었기 때문이에요.. 어느 눈보라치는 밤, 시골의사는 위독한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급하게 여행 준비를 꾸리고 말을 찾아 여행을 떠납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보니 환자는 위독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상처가 있었는데, 처음엔 죽게 내버려두라더니 나중에는 그 상처야말로 자신의 밑천이자 아름다운 상처라고 하지요. 시골 의사는 환자 소년이 잠잠해지자 다시 자기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할까요? 이미 하녀 로자는 마부의 '제물'이 되었을 테고, 일자리는 없어졌고, 입고 온 털외투는 다시 입을 길 없고... 이미 출발할 때와는 많은 게 달라져버린 상황. 돼지우리에서 튀어나온 말, 급하게 뛰어간 환자의 집에서 도리어 누워 있다가 돌아가는 의사. 애초에 정해진 목적을 향해 한 방향으로 움직이지도 않고, 읽는 이가 무심결에 기대하는 모습을 결코 보여주지 않고, 아무튼 어떤 식으로든 예측을 거침없이 뒤집는 카프카 작품은 그래서 역설적으로 어떤 방향으로도 해석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어렵고요...)

<시골의사>에는 '아버지에게 바칩니다'라는 말이 덧붙어있습니다. 가장과 자식의 관계가 카프카에게 빼놓을 수 없는 화두였다는 걸 감안하면 다른 작품도 더 연결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엄마, 아빠, 여동생이 등장하는 가족 구조가 <시골의사> 소년의 집, 그리고 <변신>에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고요, 또 두 작품 모두 침대가 나온다는 것도 공통점인데, 앞으로 읽을 작품에서 또 함께 엮어볼만한 테마가 등장할지 지켜봐야겠네요.

# 가장이 아닌 줄 알았던 자의 근심

시골 의사편에 실린 나머지 단편도 난해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그중에서도 '가장의 근심'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맥을 잡지 못해 정말 난감했는데요, 이번 세미나에서 이응샘이 제시한 해석이 마음에 쏙 들었어요. 이른바 '코드 교란자'로 오드라데크를 보았던 부분이요! 기존의 방식으로는 어떻게도 설명할 수 없는 존재, 오드라데크. 분명 존재하고 이름도 있고 사는 곳도 있지만, 계속 돌아다니고 또 모양도 의도도 형체도 불분명해서 우리가 분류하는 체계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경계'에 선 존재, 오드라데크. 그래서 그의 존재는 가장에게는 근심입니다. 가장은 어떤 식으로든 체계화를 해야 하고 분류 틀에 집어넣어야 안심이기 때문입니다. 해석 안 되는 글, 제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논리와 단어로 설명되지 않는 카프카의 글이 저에겐 마치 '오드라데크'같은 존재였던 건 아닌가.. 하고 저를 돌아보았습니다. 세상이 정해준 기준이 마음에 안 든다고, 가장이 강요하는 걸 따르지 않으리라 외쳤건만 저 역시 제가 설명하지 못하는 걸 불편해하는 또 다른 가장이었던 건 아닐까... 하는 반성이 들었어요. 설명할 수 없는 존재를 불편하지 않게 받아들이려면 얼마나 훈련이 필요한 걸까요? 마찬가지로 이응샘은 <열 한 명의 아들> 역시 하나로 설명하려 하면, 바로 뒤에서 그 설명을 뒤집는 식으로 도저히 표준화하고 정리할 수 없는 아들을 나열하고 있는 게 재미있다고 하셨는데요, 무엇이든 쉽게 설명하고 규정하는 일을 거부하려는 게 카프카가 찾아낸 '출구'였던 걸까요?

#살인의 축복!

이번에 읽은 카프카 단편 여러 작품에서 죽음, 죽어감, 시체, 살인과 피의 이미지가 강렬하게 등장합니다. <어떤 꿈>에서 요제프는 무덤에 매료되고, <재칼과 아랍인>에서 아랍인을 죽이라고 부추기던 재칼은 '김이 무럭무럭 올라오고 있는' 죽은 낙타를 보고 매료되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달려듭니다. <형제 살해>에서 베제를 죽이려는 슈마르는 모든 것이 얼어붙는 곳에서 뜨거워지지요. 그리고 외칩니다, "살인의 축복! 흐르는 낯선 피를 통한 해소, 날아갈 듯한 기분!" 하고요. 카프카의 작품에서 존재의 온도를 높이고, 모든 것을 녹여버리는 죽음, 혹은 죽임은 어떻게 보면 좋을까요? 거리 두는 '쿨한' 상태가 아니라, 뒤섞이고, 용해되고,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단편 <독수리>), 나를 피 속에서 녹이는 이 뜨거움은 망아의 시점에 찾아오는 황홀함이기에 축복이자 해소인걸까요?

# 출구를 찾아 변신하기

선민샘은 인간 그레고르 잠자가 벌레로 변신하는 <변신>과 원숭이 페터가 인간화된 원숭이로 변하는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는 같이 생각해보아도 재미있다고 알려주셨어요. 변신한다는 테마는 공통점인데, 잠자는 변신할수록 말을 잃고, 페터는 점점 말이 늘어납니다. 어쨌든 카프카의 작품에는 이유를 따져묻지 않고, 일단 그냥 출구를 찾는 인물들이 나옵니다. 출구에 어떤 방향을 설정해두지도 않았구요. 출구는 결국 머무름을 거부하는 일, 멈추지 않고 무엇인가로 계속 변신하고 이동하는 일인 걸까요? 그건 완료될 수 없기에, 계속할 수 있는 여행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음 주에는 예술, 작은 이들의 예술이라는 테마에 주목해서 단식광대 챕터의 글을 읽어옵니다. 카프카의 글이 또 다시 우리를 어떤 도착 없는 여행으로 이끌지.. 두렵지만 설레는(?) 오묘한 마음으로 한 주를 마무리해봅니다. 그럼 다음주에 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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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0-21 23:30
    센스 넘치는 소제목들! ㅋㅋㅋ
    카프카 읽으면서 수많은 오드라데크들과 접속하는 내공을 길러보아요 >_< 어쩌면 우리 모두는 오드라데크일지도? ㅇ-ㅇ 에헤헷